꼭 일주일 전의 일이다.오랫만에 찾아온 지인과 반가운 해후 끝에 차를 마시면서 무심코 내게 던진말이 그랬다. '오른쪽 귀밑에 흰머리가 있네?' ...그러면서 내 머리에서 하얀머리 한올을 뽑아 올리는 것이었다. 악,,, 사람들만 아니였으면 악, 하고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물론, 내게도 새치라는 '세월의 전령사'가 오리란 생각을 전혀 안 한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지, 그건 마흔넘은 다음의 일이라고 누가 정한것도 아닌 나이를 설정하고 그날 이후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나였다. 이 말릴수 없는 오만함은 괜한것이 아니었으니...
어떤 사람 보는 눈이 다소 여유로운(?) 사람들은 나를 보며 애기엄마 치고는 나이가 너무 어려보인다느니, 아가씨라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느니.. 그렇게 한껏 나를 어리게 보아 주었던 것이었으니.... 거기다 큰애의 나이가 11살 이라고 하면 그 사람들은 더욱 못 믿을 표정을 하고 나를 바라봐 나로 하여금 한껏 나르시즘에 빠지게도 했던 것이다.
남편은 한술 더떠서 '나는 아무래도 미성년자랑 함께 사는것 같아'라고 동안인 외모를 놀리듯 말하곤 한다. 여기서 미성년자라 함은, 생긴것 뿐만 아니라 하는행동을 봐도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철없는 행동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래서 남편이 나를 부를때 내이름을 부르는것 말고 '영심이'라는 별명을 붙여 부르는걸 좋아한다.
영심이는 학창시절에 한창 인기리에 연재되던 만화의 주인공을 말한다. 머리를 올백으로 넘겨 뒤로 묶으고 늘 천방지축이지만 한편으로 센티멘탈에 빠지곤 했던 동그란 얼굴의 주인공말이다.
사람들의 입에 발린 '아가씨 같다'라는 말과 남편이 부르는대로 만화주인공 같은 외모를 가졌다고 착각 했던 모양인지 나는 정말로 늙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고 살았던것이 아닌가 싶게 이번 '새치 사건'은 내게 충격 그 이상이었다.
처음엔 그러다 말겠지 했다.. 새치를 보고 가만 생각해 보는건, 최근 아이들이 여러가지로 나를 신경쓰게 했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담배를 끊고 운동을 시작하라는 내 잔소리를 진짜 잔소리 쯤으로 여기는 남편에게 화가 많이 났던 나를 생각해 보았다. 그래, 그런 이유였을 거야. 잠시 집안 문제, 아이들 문제로 신경을 너무 쓰다 보니 '스트레스성 흰머리'가 난게 틀림없을 거야.. 그리고 이건 분명 스트레스성 흰머리 이기 때문에 내 마음에 평정을 찾게 되면 다시 원상복귀 될거야.. 라고 내 스스로를 위안하는 다짐을 혼자말 처럼 되내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고, 단발성 새치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던 것이다. 손가락이 아파 나를 대신해 머릴 감겨주던 동생이 무심코 머리속을 만지다 이제는 제법 많은 흰머리를 발견해 낸 것이다. 새치머리가 많아졌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것이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사실에 대한 충격으로 한동안 아무말없이 있으려니 동생이 머리속을 헤집어흰머리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대론 안되겠다 싶어 어제는 퇴근길에 화장품 가게에 들렀다. 염색을 해서라도 이 난국을 수습해야 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안그래도 까만색 머리를 그대로 지닌채 염색하고는 담을 쌓고 살았다. 신체부위를 지나치게 꾸미는데 영 재주도 없고 흥미도 별로 없는 게으른 내가 머리색깔까지 바꾸고 어쩌고 할 그런 위인이 못 되었으니.. 남들은 다들 금발, 갈색머리 ,심지어는 울긋 불긋 빨간색과 초록색머리를 하고 다닐때도 용감하게 본래 그대로의 까만머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염색한 밝은색 머리속에서 내머리색은 유난스레 검게 보였었다. 그러면서도 고집스레 염색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였던건 내 이날을 위해 저축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흰머리나면 그때 지겹게 염색을 할지도 모르는데 일찍부터 머리를 못살게 굴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면서도 그날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일 거라고 막연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왔었다. 빠르면 마흔살 정도? 동안 (童顔) 이라고 남편과 지인들이 인정해 준 말들을 보증수표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나는 새치걱정 안하고 살아도 될거라는 오만이 마음 한켠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염색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자연스러운 갈색으로 염색을 했다. 머리색깔이 그닥 달라보이진 않지만 웬지 기분이 달라진 느낌이다. 검은색 머리에서 중간톤의 갈색으로의 변신이 새치머리에 대한 고민으로 우울했던 심사를 머리색깔의 변화만큼의 밝음을 건네주는 것 같다. 새치머리를 가릴양으로 염색한 머리를 들여다 보다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눈밑에 잔주름이 보인다. 그래,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어딨겠어? 세월속에서 나도 결코 자유로울수 없는 힘없는 존재가 아니겠냐고? 이 모든 상황을 인정하고 담담하게 세월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나는 아무것도 할수 없음을 인정하니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 해진다..
나이를 먹어간다는것 그건 결코 퇴보가 아닌 또다른 시작일수 있음을 안다. 비록 새치가 돋기 시작하는 나이로 진입을 했지만 내가 만들어온 나이테 만큼 인생을 폭넓게 바라보는 안목이 생길 거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 방황보다는 안정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지금의 내가 나쁘지마는 않다. 아름답게 나이드는것, 그건 내게 주어진 최고의 숙제다.
그래도,...새치라는 녀석 조금 천천히 와주었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