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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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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나서...모랫말 아이들.


BY 빨강머리앤 2004-02-23

모랫말 아이들을 읽고 독후감상문을 작성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래서 한번 읽을걸 두번 읽어 보았다. 그렇게 하면 정리하는데 쉬울것 같고 감정도 조절할수가 있을것 같아서...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한번 읽었을때는  감정의 가닥이 쉽게 정리 되는 느낌이 들었는데 두번 읽고 나니 오히려 감정선이 복잡해져 버린 느낌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그 동화같지 않은 동화를 읽은 소감을 적어야 하는지 도무지 혼란 스럽기만 더하는 거였다.

황석영씨하면 우리 문학계에 큰 어른이신 분이시다. 대하소설 장길산을 비롯한 굵직한 작품을 쓰신 작가가 동화를 쓰셨다고 했을때 그래서 사실은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척이나 궁금했다. 장길산같은 대하소설을 쓰신 분이 쓴 동화는 과연 어떤 내용이고 어떤 감동을 줄것인가 하고...

동화란, 아이들의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이야기로 엮은 책이라 나름대로 동화책을 분류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랫말아이들을 읽고난 느낌은 내가 기존에 생각했던 동화의 범주에 속할만한 그런 감동과는 조금 거리가 먼 작품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작가가 유년을 보낸 그 시대는 전쟁을 전후한 시기였었으니.. 전쟁의 와중에 겪은 유년의 기억을 더듬어 내놓은 책이 모랫말 아이들이다. 작가는 서문에 유년시절의 이야기를 자신의 어린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어 동화책을 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삶은 덧없는것 같지만 매순간이 없어지질 않을 아름다움이고 따뜻함이 어둠속에서도 빛난다라고 회고했다.

전쟁을 전후한 그 시대에도 아름다움과 따뜻함이 공존했었다는 작가의 고백이 참으로 가슴절절하게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언제나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었고 그 아래서 앞집 친구와 공기놀이를 했고, 어두워 지기 전까지 고무줄 놀이를 했던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던 내 유년의 기억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모랫말아이들, 주인공 수남이와 국원이 광국이 정삼이... 그네들이 겪어나간 전쟁속에서도 이어가던 빛나는 삶의 조각들. 그리고 모랫말 아이들과 연결된 모랫말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담하게 노작가에 의해 조근조근 펼쳐나가며 귀를 기울이게 했다.

책에서 나오는 이들이 하나같이 어딘가 한군데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들이다.꼼배아저씨라 불리는 동네 거지 춘근이가 그랬고, 상도가에서 만난 삼봉이 아저씨가 그랬고, 혀가 짧은 고문관 아저씨인 상이용사가 그랬다. 화염방사기에 한쪽 얼굴에 화상을 입은 낯선 사내가 그랬고, 어느겨울 한밤중에 엄마친구분이 데려온 혼혈여자아이가 그랬고, 한남자를 사랑하다 전쟁중에 미치광이가 되어 나타난 태금이가 그랬다.

전쟁의 와중에 부모를 잃고 떠돌다 곡마단에 팔려온 남매가 그랬고, 백살이 넘었을 정도로 늙은 친이할머니가 그랬고, 양공주를 엄마로 둔 주인공의 첫 애인 영화 또한 마음 한쪽을 잃어버린 아이였다.

그들이 온전한 정신을 갖지 못한것도 멀쩡한 사지와 얼굴을 갖지 못한 것도 전쟁 때문이었다. 전쟁은 부모를 잃게 했고 아이를 잃게 했고, 애인을 잃게 했고 정신을 잃게 했다. 그런 시대 속에서도 아이들은 작당을 해서 도깨비를 잡으로 나서기도 했다. 별이 뜬 맑은 밤하늘을 만나는 일보다 죽어가는 시체를 더 많이 만나야 했고, 비린내 같기도 하고 뭔가가 삭는것 같은 참을수 없는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를 오래 기억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귀신이 화장장 근처를 떠돌거라는 그 아이들 또래의 호기심은 한밤중에 화장장으로 출동케 했지만, 화부아저씨로부터 '어른이 되어 죄를 많이 지어야지 귀신을 볼수 있다'라는 얘길 듣고 발길을 돌린 아이들이 찾은 곳이 미군부대옆 화꼬방이었다. 미군들과 그 미군들에게 몸을 팔던 양공주들을 쉽게 만날수 있었던 시절이기도 했다. 수남이가 좋아했던 영화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전쟁통에 남편을 잃었을 영화엄마는 밥벌이를 위해 집으로 흑인병사를 끌어들이고 영화는 엄마에게 쫒겨 밖으로 나온다. 수남이와 층계참에 앉으니 때마침 지나는 기차가 잘 보였고 별이 몇개 뜬 밤하늘이 잘 보였다.영화는 수남이 볼에 입맞춤을 해준다.

풋내기 첫사랑이 그렇게 싹트기도 하는가 보다. 국원이 큰누나를 사랑했다던 한 낯선남자는 한쪽 얼굴이 일그러진 채로 모랫말에 찾아 들었다. 전쟁중에 남아 있을리 없는 꽃집을 찾았던건 그래도 옛애인을 빈손으로는 찾아가고 싶지 않았던 애틋함이 있어서 였을 것이다. 멀리 연두빛 치마와 흰반소매를 입고 경쾌하게 멀어져 가는 옛애인을 마냥 바라만 보다 올것인 것을 말이다.

온가족이 모두 돈벌러간 사이 수남이를 돌봐주던 태금이는 천성이 쾌할한 처녀였다. 완고하기만 한 어머니와 다르게 수남이를 한껏 멀리까지 데려가 주고 친구를 사귀게 해준 멋진 누나였다. 그녀에게 남자가 생겼다. 남자를 사귀면서 태금이는 조금씩 달라져 갔고, 마침내 취직이 되어 떠난다. 그 사이 전쟁이 터져 모두 뿔뿔이 흩어져 피난살이를 하고 돌아온 모랫말에 태금이가 나타난다. 정신을 잃은 여자는 폐허가 되어 버린 남자의 집근처를 배회하며 밤이 되면 그곳에서 음산한 군가를 불렀다.태금이가 사랑하던 남자는 전쟁통에 죽었을 것이고 사랑하는 남자를 잃은 태금이는 그만 정신을 놓아버린 모양이었다.

모랫말아이들이었던 그네들에게 닥쳐온 일들과 사람들이야기는 대충 그랬다. 그시대의 유년이 그랬다면 당연히 동화는 전쟁이야기 일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말이다. 오늘 그 시대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책을 읽는 우리에게 전쟁의 상흔은 얼만큼 현실적인 고통으로 느껴질까? 문득,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이라크 땅, 그 땅에서 아무 죄없이 태어나 전쟁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을 아이들이 떠오른다. 전쟁의 포연이 앗아갈 또다른 동심을 안타깝게 그려본다. 평화를 지키는 일, 그것은 우리아이들의 동심을 빼앗지 않은 기본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