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의 고요속으로 눈이 내렸었나 보다. 아무런 낌새조차 느낄수 없었는데 밤새 눈이 내렸는지 아침창 가득 하얀물결이 넘실거렸다.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추위를 아랑곳 하지 않고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 제쳤다. 희끗희끗 눈이 쌓인 산봉우리가 오늘따라 이만큼 가깝게 보여 손에 잡힐것만 같다. 눈이 쌓인 까닭인지 골짜기가 깊게 패여 보인다. 솜씨좋은 조각가가 다듬은듯 눈내린 산봉우리 아래 골골마다 음과 양이 또렷하게 패였다. 다비드상의 근육질 몸매를 보는것도 같은 앞산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파트 앞 측백나무는 혼자서 눈사람이 되어있다. 둥글게 전지를 해놓은 측백나무위로 하얗게 눈이 싸여 꼭 누군가가 일부러 눈사람을 만들어 놓은 것만 같았다. 집앞 학교 운동장엔 일찍 등교한 남학생들이 눈밭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 아침햇살이 따스하게 비춰들고 눈이 하얗게 쌓인 운동장을 반짝이게 하는데 아이들은 열심히 공을 굴리고 있었다.눈밭을 뒹굴며 공을 차는 아이들의 모습이 싱그러웠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눈내린 공간이 두가지로 분리가 되어 보였다. 차가 다니는 길가, 건물이 우뚝 솟은 빌딩숲은 이미 눈의 자취가 없어져 버렸다. 사람의 손이 덜 타는곳 사람사는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상대적으로 하얀 눈세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 대조적이다. 모닝커피를 마시며 우연히 달력을 보게 되었다. 한장 남은 달력이 애처로워 보여 애써 눈길을 주지 않고 있었다. 올한해를 돌아볼 시간.. 그 시간을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시어머님의 병고를 듣고 허둥지둥 날짜만 잡아먹고 있는 시간으로 마무리를 해야하는 12월은 우리가족에서 있어 삶을 감독하는 완고한 감독자와 같은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다. 일년 열두달을 통해 너희가 어찌 살아왔는지 점수를 매겨보자고 한다.
3월, 파릇한 봄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둘째아이가 학교에 들어갔다. 그로써 나는 명색이 두아이의 학부모가 되었다. 이미 한번 경험을 해본 바로는 지나치게 학교와 아이곁은 맴돌지 않아야 한다는걸 배웠는지라 되도록 혼자서 학교생활을 적응해 갈수 있도록 한걸음 물러서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었다. 장난꾸러기였지만 그럭저럭 학교 생활을 잘 해가는구나 싶은 시점에서 이사라는 삶의 터전을 변경해야 하는 갑작스런 경험을 했었다. 서울이라는 삭막한 공간에 심어둔 사람의 정이 아쉬워 눈물을 흘리며 떠나왔던 나나, 학교라는 생소한 공간에 발을 들여놓고 조금 익숙해 졌다 싶은 시점에서 전학을 가야했던 아이에게나 이사는 결코 쉽지 않은 감정의변화와 생활의변화를 요구했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것들을 억지로 떼야했고, 새로운 것들에 억지로 익숙해져야 했던 일은 아이에게 무리였던지 무던히도 아프기도 많이하고 말썽도 많아 몇달을 힘들어 했던지 모르겠다.까닭없이 아이가 아파 병원에 가면 '감기증상 입니다', 혹은 몸이 많이 약해져서 면역력이 부족합니다'라는 진단을 내리곤 했었다.
날개라도 달아주면 훨훨 가장 먼 하늘까지 날아갈것만 같던 에너지 넘치던 아이가 한사코 침대에 몸을 부리며 아무 의욕을 보이지 않을때는 정말 심각하게 이대로 다시 서울로 가야 하는가, 싶은 절망감에 사로잡히기도 했었다.아이가 겪어야 했던 생활의 변화와 감정의 변화의 기복이 유난히 심했던 몇달이었고,전업주부였던 나는 사회생활을 병행해야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 남편을 도와 나또한 직장을 겸해야 했기에 아들녀석의 이상기후에 발을 동동 굴리고 있었던 몇달은 참으로 길게만 느껴졌었다.
세월은 무심하듯 흐르면서도 선물처럼 상처를 치유하는 약이 되어주기도 하는법. 어느덧 아이는 학교생활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고, 나또한 직장생활과 집안일을 병행해야 하는 이중생활(?)에 익숙해 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돌아다보니 곳곳에 펼쳐진 산능선마다 단풍으로 홍엽이 내려오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바퀴 돌고, 집에서 가까운 야산을 꾹꾹 밟아 가며 정을 심어놓고 있었다.조금 멀리도 나가보았다. 이고장에서 유명하다는 산을 찾아 나서기도 하고 아이들과 함께 문화유적지도 돌아보기도 했다. 가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봄과 여름이 힘들게 지나가고 가을은 자잘한 행복을 축복처럼 뿌려주는듯 했다. 이젠 새로운 것에 적응하면서 감정의 기복을 심하게 느낄 만한 것들이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지루한듯한, 강물처럼 잔잔한 듯한 일상을 기꺼이 받아 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겨울초입에 들어 섰는데 북풍에 실려온듯한 소식은 시어머님의 병고 였다. 그것도 시한부인생이라는 무지막자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선고를 받고 퀭하니 야위어 가시는 중이셨다. 인생은 덧없는 거였더냐고 지나가는 바람을 붙잡고 묻고 싶었다. 무심한 바람은 휘잉~ 소리만 내고 지나가 버렸다. 12월 마지막 남은 달력한장이 마지막잎새처럼 애처롭다.
그래도 첫눈은 내렸었다. 함박눈이 펄펄 날리며 세상을 한가지 빛깔로 바꾸어 놓았었다. 잠시였지만 평화로운 하얀세상을 연출한 눈은 바람도 잠재우고 세상의 소란도 잠재우고 있었다. 눈내린 평화로운 세상을 가슴에 품는다. 찬바람 에이는 추위가 찾아와도 눈내린 세상의 평화로움을 안고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갈수 있을것 같다. 멀리 희끗희끗 눈을 품은 겨울산이 보인다. 침묵속에 의연하게 서있는 겨울산, 제일높은 봉우리 위로 조각구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산봉우리와 하얀조각구름의 조화가 평화로운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