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생각해 보았나요? 내가 마지막으로 당신한테 쓴 편지가
언제 쯤 이었는지... 그게 그러니까 화곡동에 살때 우리결혼 기념일에
즈음해서 쓴게 마지막 편지 였으니 꼭 오년이 흘렀어.
내가 당신생일에 맞춰, 결혼기념일에 맞춰 편지 쓰는일을 빠뜨리지 않았던건
우리가 살아가는 일년 삼백육십오일중 그래도 그 이틀은 적어도 우리를 이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 가장 끈끈한 인연의 緣으로 묶어준 '역사적인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가장 내 마음을 잘 전달할수 있는 수단이
바로 내마음을 적은 '편지'라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첫해는 당신이 답장을 썼던지.. 잘 생각이 안나는데 내가 마구 우겨서 겨우
몇자 적어 마지못해 답장을 내손에 안기던 기억이 가물거려.
당신은 어쩌자고 그토록이나 편지 쓰는 일을 싫어했던지 나중에
진지하게 한번 따져봐야 겠으니 마음 준비 단단히 해두어야 할거야.
결혼 2주년, 3주년, 그리고 5주년 기념일까진 되돌아 오지 않은 당신의 마음을
기다리며 그래도 편지를 적었었는데 나도 어느정도 무디어 졌는지
아니면 당신에 대해 화가 났었던지 생각은 잘 안나지만 편지를 쓰지 않았지.
아마 화가 났었다는 느낌이 더 정확할거란 생각이 들어.
내가 그렇게나 열심히(?) 편지를 써서 주는데도 답장 한번 없는 당신에게
'그래, 한번 그렇게 해보자구'하는 심사가 더 컸을 거라 생각해.
하지만 편지를 쓰지 않은 당신의 사랑을 의심해 본적이 없어.
나에 대한 사랑이 변했으니 편지 한장 없는 거라고 뽀로통해 있었지만,
'편지가 다는 아니냐. 이렇게 말로 하면 되잖아'하면서 웃어 넘기곤 했던
당신의 잔잔한 사랑을 마음 한켠에 항상 만족하게 채워 놓을수 있었기에
그나마 웃어 넘길수 있었는 일인지도 몰라.
물론 그 사랑의 강을 항상 흐를수 있게 만들어 준건 당신이고 말이야.
그래서 다시 펜을 들어 '오년'만에 당신한테 편지를 쓸 생각을 해.
오늘이 12월 5일 이니 정확히 다음주 금요일이면 우리의 '결혼 기념일'이야.
우리의 10주년 결혼 기념일.. 대단하지 않아? 한번의 권태기도 없이
조금씩은 무디어 졌을 지라도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과 사랑을 배려하는
마음을 여전히 간직한채 10년을 함께 한 우리들.
기꺼이 축하해 주고 축하받고 싶어.
주변 사람들이 우리더러 그랬지. 우리두사람 참 보기좋은 한쌍이라고..
난 그말이 당신과 내게 던지는 가장 아름다운 축복의 말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당신한테 얼마나 감사한지 그마음 전하고 싶어서 오랫만에
편지 쓸 생각을 한거야. 완벽주의를 가장한 나의 개인주의를 당신은
항상 유연하게 넘겨주었지. 새벽일 끝내고 피곤한 몸으로 집에 들어서서
신발 벗기전에 항상 당신은 잠에서 덜깬 눈으로 문열어 주는 나를 꼭 안아주곤
했지. 졸립다며 싫은척 눈을 흘기곤 했지만, 사실은 밖의 찬공기를 묻혀온
당신의 너른 가슴팍에 안기는 일이 얼마나 좋은지 당신이 알까?
우리가 결혼을 하고 첫 결혼기념일을 보낸 그밤에 혼자 생각한게 있어.
당시엔 아주 먼 미래처럼 느껴진던 결혼 10주년 기념일엔
드라마에서 처럼 신혼여행지로 둘이서만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
그때 내 생각으로는 충분히 그럴수 있으리라 생각했었지. 그건 아주멀고
먼후일의 일일거라 생각을 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십년은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았다는걸 알것 같아.
우리가 결혼식을 올리던 날이 너무 가깝게 느껴져지는 걸로 봐서 말이야.
결혼 십년쯤 되면 신혼때 쓰던 텔레비젼도 바꾸고 냉장고도 더 큰걸로
바꾸고 그리고 오디오도 더 멋진걸로 바꿀려고 계획했었는데
굳이 그럴필요 없이 아직도 생생하게 잘들 돌아가 주고 있네.
조금씩 삐그덕 거리는것도 있지만 그리 크게 눈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니
아직도 한 오년은 더 쓸수도 있을것 같아. 사실 그것들이 고장 났대도
이젠 선뜻 버리고 싶은 생각이 없어. 우리가 함께 살아온 날들을 말없이
함께한 것들에게 살아있는 것에 쏟는 정 못잖게 정이 들어 버린 느낌이 들거든.
생각보다 빨리온 결혼 10주년을 맞이하는 감회가 생각보단 담담해.
어머니가 아프셔서 더 그럴거야. 내가 생각했던 결혼기념여행은
다시 몇년후로 미루는건 아무렇지 않지만,
아직 젊다면 젊은 나이에 투병생활을 해야 하는 어머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말할수 없이 착찹해져 와.나도 그런데 당신은 오죽 할까.
어머니가 암선고 받던날, 당신은 열이 펄펄나면서 춥다고 이불을 몇채를
꺼내 덮었었지. 땀을 비오듯 흘려서 그날 이불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어.
그래서 얼른 어머니가 계시는 서울로 못가고 몸살을 그토록이나 심하게
앓아대는 당신 옆에서 내가 얼마나 당황 스러웠던지..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했지. 당신이 얼마나 힘들어 했던지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그런 생각이 들었어.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어머님 걱정에
몸살로 끙끙 앓고 있는 당신 때문에 내 마음은 조금씩 졸아드는
느낌. 그래서 마침내 새가슴이 되는 상상.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해. 다행인건 조금씩 담담해 지고 씩씩해 질려고 노력하는 당신으로 해서
내가 힘을 얻는 다는 거야. 우리가 씩씩해져야 한다고
주문처럼 그렇게 외고 다니자. 그래야 어머님께도 더 잘할수 있을 테니..
올 결혼 기념일엔 우리 마음을 담는 특별한 기념일을 만들었으면 해.
케잌하나 정도면 될거야. 가운데 케잌하나 놓고 촛불을 많이 켜는 거야.
아이들 더러 축하곡 하나만 피아노로 연주해 달랄까?
나는 오랫만에 당신에게 쓴 편지를 건네고 당신은 여전히 편지가 쓰기
싫은 거라면 한번 꼭 안아줘. 뭐 이번 한번더 넓은 아량으로 봐줄테니.
어제 하늘을 보면서 당신이 그랬지. 꼭 눈이 올것 같은 날씨라고.
엷은 회색 구름층이 두텁게 깔린 하늘이 오늘도 꼭 눈이 내릴것 처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듯해. 오늘은 눈이 포근히 날리면 참 좋겠단 생각을
하면서 하늘을 자주 바라 보았어. 실눈처럼 봉숭아 꽃물이
남은 손톱 끝이 자꾸만 첫눈을 재촉하고 있는데 올 첫눈은 왜 이리도 더디
내리는 걸까... 내 손톱에 남은 봉숭아꽃물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때
첫눈이 내려서 마음이 가난하고 슬프고 쓸쓸한 사람들을 위해,어머님을 포함해서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바칠수 있기를 바래.
당신과 나 둘이 있으면 사람들이 우리더러 '두분이서 많이 닮았네요'
라고 말하곤 했지. 그말 들으면 참 좋았어. 예전에 연애할때도
'두분이 오누이 같으세요'라는 말 듣곤 했을때도 뭐랄까
우리를 축복해주는 말같아서 참 좋았거든... 우리 잘 살았나 보다.
둘이 닮았단 얘기도 듣고 말이야. 우리 앞으로 30년, 아니 그 이상의 세월을 더 잘살아서
두사람이 닮은 꼴로 그렇게 알콩 달콩 살아갔으면 좋겠단
바램을 가져보게 돼. 그런 의미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할 듯한 말로 편지를 끝마칠까해.
....당신을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