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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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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내게로 왔다.


BY 빨강머리앤 2003-11-06

일이 끝나고 추운저녁길을 걸어 서둘러 장을 봐야 할때가 있다.

저녁을 준비하는 만만찮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일도 그렇거니와,

또 그것들을 치워야하는 일련의 과정을 날마다 되풀이 하는게 보통 노동이 아니다.

그래도 이젠 습관적으로 오늘저녁 식탁을 머릿속에 미리 차려보는

지혜도 배웠다. 그래도... 가끔은 정말 오늘저녁 어떤 음식을 해야할지,

또 찌개는 어떤게  좋을지...

누군가를 붙들고 묻고 싶을만큼 냉장고에 든 음식과 내가 해야할 반찬사이

연결고리가 연결이 안되는 날도 있는 것이다.

그런날은 머리가 하얗게 되어 그냥 반찬코너를 배회하곤 하는데...

어제 저녁, 쌀쌀해진 저녁바람을 맞으며 할인점에 들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식탁에 올려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할인점을 한바퀴 돌았다. 딱히 뭘 사면 좋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때 눈에 들어온게 그날따라 유난히 신선해 보이는 홍합이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거리에 하나둘 포장마차가 늘어가고

그 포장마차 안에선 오뎅국물이 하얀김을 품어내거나,

홍합이 뽀얀국물을 보글거리면 왠지 가슴이 따뜻해 지는 느낌이 들곤 했었다.

그 포장마차 홍합국물을 훌훌, 들이키는 사람들속에 나도 끼고 싶은 생각이

들고는 했었다.

 

그래, 오랫만에 시원하게 홍합국을 끓여볼까 싶었다.

 

오늘아침, 홍합국을 끓였다.

씻기 위해 커다란 양푼에 와르르 쏟아놓으니 검은돌멩이처럼

반짝이는게 참 보기좋았다.  아닌게 아니라 스륵 문지르며 씻을 때마다

자륵, 자륵,돌멩이 구르는 소리가 난다. 그것도 바닷가의 자잘돌 구르는 소리가 난다.

파도에 씻긴 몽글몽글한 돌멩이, 파도소리를 배경음악삼아 날마다 잠이 들고

깨어나는 바닷가 자갈돌 소리가 난다.

홍합마다에 탯줄처럼 바닷풀들의 흔적이 묻어있다.홍합은 아마도 바다를 떠나고 싶지

않았으리..

엄마품을 태를 삼아 태어난 아이의 탯줄처럼 질긴 줄이

거기에 걸려 있다. 자신을 품어준 바다, 그 어머니의 흔적을

하나씩 떼어내며 내 아이를 생각하고 우리엄마를 또한 생각한다.

 

미리 올려놓은 가스렌지 위의 냄비물이 끓고 있다.

말갛게 씻긴 반짝이는 껍질을 한 홍합을 한웅큼씩 끓는 물에 집어 넣는다.

조금씩 파래지는 물... 홍합이 더 해질수록 그 물빛은 점점 바다, 그 모태의 물빛을

띠어간다. 끓는 물속에서 홍합은 마지막 쉼호흡을 가다듬는듯 뽀금거리다 입을

벌렸다. 연한 살구빛 속살을 쉽게 드러내 놓고 그만 하, 입을 버리는 홍합의

껍질은 나비 한마리가 되어 눕는다..  전골용 냄비속에 살구빛 속살이

드러나고 깃끝이 검은 나비들이 갑자기 여기저기서 군무를 시작했다.

파랗게 깨끗한 바다물에 담긴 살구꽃잎 같은 홍합... 껍질 안쪽에 살짝

바닷빛을 머금은 홍합껍질... 그것은 바다였다.

 

서해바다의 낙조앞에 서면 슬픔과 희망이란 단어가 동시에 떠올랐었다.

진로를 결정하지 못해 방황하던 한때, 친구와 자주 찾아갔던 바닷가 방조제...

바람은 늘 쓸쓸하게 불었고, 살짝 노을이 지면서 하늘이 조금씩 분홍빛 물이

들면 바다는 그대로 하늘을 따라 분홍빛을 띠고는 했었지.

조금씩 해가 서쪽으로 향해 갈때마다 시시각각 하늘빛은 달라지고

그 빛에 따라 일렁이는 바다는 하늘빛을 그대로 반사하고 했었다.

 

한십년쯤, 그런 긴시간이 지나면 너, 그리고 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우린 서로에게 그렇게 묻곤 했었다.

구체적으로 어떤직업이라기 보다, 노을빛 아름다운 저녁바다를

보면서 아름다운 인생을 꿈꾸기도 했었지. 오랜 소망으로 간직한

그꿈을 향해 최선을 다해 꾸준히 나아가길...

서로에게 당부하기도 했던 그 바닷가 방조제엔

우리의 물음에 답이라도 하듯 파도가 철썩 거렸고 갈매기는 저녁비행을

끝마치고 잠자리를 찾아 들고는 했었다.

방황하던 청춘의 한때에 깊게 침잠한 바다는 그래서 내게 영혼의휴식처

같은 곳이기도 했으니... 그 바다를 떠나 서울살이를 했을땐,

한강의 갈매기만 봐도 눈물이 났었다.

그러다 바다가 너무 보고싶어 친구랑 달려갔던 인천의 월미도 앞바다는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부추겨었지.

월미도의 갇힌 바다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드뷔시의 교향시-바다-를 몇번이나 반복해 들었던지..

그렇게 열병처럼 바다를 그리워 했었다.

 

이젠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조개가 진주를 품듯....

내 그리움도 가슴에 품고 살아가다

우연인듯 바다에 당도하면 그때엔 뭉쳐두었던 그리움

다 풀어 놓아도 좋으리...

 

오늘아침, 홍합이 풀어놓은 푸른바다를 먹었다.

바다가 내게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