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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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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알맞은 일.


BY 빨강머리앤 2003-11-05

자명종 시계가 고장이 났다.

잠들기 전 내 생체리듬의 한자리를 마련해

그곳에 시계를 하나 그려 넣었다. 항상 보아온 우리집 동그란 시계.

그안에 곰돌이 하나가 똑같은 포즈로 웃고 있는 시계가 그려진다.

시침을 7과 8사이 중간에 놓고, 분침을 정확히 6에 가져다 놓는다.

7시 30분, 내 기상시간이다.

잘 될지 모르겠지만 생체리듬이 아침 그 시간에 맞춰 알람을 해주기를

바라면서도 늦게 일어나면 어쩌나 싶어 내심 불안하다.

늦게 일어나서 혼자 정신없이 허둥거리다 아이들 밥을 못 먹여 학교에

보내는 불상사가 가장 두렵단 생각을 하고 하물 하물 잠 속에 빠져 들었겠지...

그런 밤을 아무렇지 않게 숙면으로 보내고 눈을 뜨니 7시 10분이라...

하아, 내 생체리듬 시계 비교적 정확하다. 아직 쓸만하단 생각이 들어

이부자리에서 혼자 웃어보았다. 이건 참 마침 알맞은 일이다.

 

기분이 좋으니 잠이 일찍 깬다.  욕실에 들르니 벌써 며칠째 딸아이의

주황색 나는 운동화가 놓여 있다. 저걸 빨아볼까? 두개의 운동화를 번갈아

신었으면 좋겠는데 딸아인 그 운동화가 좋은 모양인지 낡은 주황색 운동화만

고집했다. 그래도 저 좋다는데 얼른 빨아 말려 줘야지 했던게 며칠이 지났으니

이 엄마의 게으름을 아인 얼마나 원망을 했을까.... 운동화를 빨기로 한다.

운동화를 빨아놓고 부엌에 들르니 밥이 다 되었다고  '치큰 치큰' 압력솥의

배꼽이 요동을 친다. 운동화 빠는 동안 아침밥이 마침 알맞게 되었다.

 

아일 깨우러 방에 들어가니 바지런한 아침햇살이 벌써 베란다의 투명창을

뚫고 아이가 잠자는 방, 불투명한 창문까지 투시해 아이얼굴을

간지럽히고 있다. 곤히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은 어째 이다지도 이쁜가.

그토록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자고 있는 아이가, 말썽 피우고 장난꾸러기인

그 아인가 싶어 살짝 볼을 꼬집어 본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그 아이의 볼에 한 스무번쯤 키스세례를 퍼부으며, 그래 이모습 때문에

엄만 모든걸 다 용서할수 있나 보다 .며 중얼 거렸다. 아이가 눈을 뜨려다

만다. 엄마가 다음 단계를 하기를 기다리듯이.. 햇살이 벌써 얼굴을 간지럽혔는데도

일어나지 않으면 이젠 엄마의 무지막자한 손이 온몸을 간지럽혀야 할 차례다.

엄마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자지러지게 간지럼을 타는 아이는

그래도 엄마의 그 손길이 좋은 모양인지, 볼에 뽀뽀하는 수준에서 절대

일어나는 법이 없다. 까륵 거리며 웃다 마지못해 일어나는 아이얼굴에

행복이 뚝뚝, 떨어진다. 그것도 마침 알맞은 일이다.

 

아이들이 욕실로 들어간 사이 잠시 아침공기가 궁금해 베란다 문을 열었다.

밤새 안개가 머물다 갔는지 산 아랫도리를 감싸고 있는 운무가 신비롭게

마을을 감싸고 있다. 불때서 밥짓던 때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오르던 모습이

연상되는 운무가 싸인 아침풍경 속에 잎떨군 나뭇가지 사이로 짙푸른 측백나무가

마침 알맞게 서서 배경을 완성시켜 준다.

 

차를 마시려고 물주전자를 올렸다. 어디선가 연기가 폴폴 올라오기에

문을 열고 내다보니, 집앞 학교 앞마당에서 낙엽을 태우고 있다.

낙엽 타는 향기,그것은 갓볶은 커피향 같기도 하고 비가 계속되던

여름날 엄마가 볶던 콩 냄새 같기도 한다. 연기속에 추억의 향기도 피어난다.

가을동안 운동장 가엔 프라터너스와 단풍과 은행들이 단풍이 들어

가을빛으로 풍성했는데 이젠 그것들의 잎이 다 지고 오늘은 운동장 한켠에서

태워지고 있었다. 수위아저씨가 불쏘시개로 낙엽뭉치를 들쑤시자

빨갛게 잉걸불이 반짝이다 만다. 다시 연기가  길게 하늘을 향해 머릴 풀어 헤치고

올라가고 갓볶은 커피향에 코를 큼큼 거리다 머그잔 가득 내 커피를 만들었다.

 

어젯밤, 읽을 책을 고르던 아이가 '엄마, 오랫만에 이책 읽어 볼까?'

하고 고른 책은 한동안 꺼내보지 않았던 '스노맨'이다.

글자없는 그림책... 열심히 들여다 보며 혼자 벙싯거리기도 하는

아이를 보며 난 걸레질을 했다. 어라, 에니메이션 '스노맨'에서

흘렀던 'walking in the air'까지 흥얼거리네... 비록, 앞부분만 반복하는

단조로운 읊조림에 불과했지만 그 모습이 겨울로 가는 그밤, 딱 알맞은 일처첨 보였다.

 

오늘은 대입을 위한 수능이 있는날.. 매년 꼭 시험에 앞서 한파가

몰아쳐 '수능한파'란 말이 있었지... 다행히 오늘은 적당히 긴장하고

적당히 기분좋을 만큼만 찬 기운이 감도는 마침 알맞은 날씨다.

부디, 오늘 시험을 보는 수험생들이 자신이 공부하고 알고 있던 내용을

잘 기억해 최선을 다해 시험을 볼수 있기를 바란다.

나도 오늘은 모르는 사람을(수험생)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