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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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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을 깍으며...


BY 빨강머리앤 2003-10-22

일주일에 두어번, 적어도 한번은 작정을 하고

카터칼과 넓다란 종잇장과 그리고 연필통을 거실 바닥에 늘여 놓는다.

일주일 분의 연필을 깍기 위해.

두아이가 집에서 일주일 동안 쓸수 있을 만큼의 연필과

학교에서 쓸 연필을 모조리 긁어 모아

작정을 하고 연필을 깍는다.

 

이제 초등학교 새내기인 둘째아이의 필통 속에 다섯개의 연필이 차곡차곡

들어 있다. 3학년 우리 큰애의 연필통을 본지는 오래.

'왜 필통이 없어?'라는 말에.

'요즈음은 아이들이 다 교실에 필통을 놓고 다녀'

괜히 허탈해 진다.  '그럼, 연필은 어찌깍고?' 속으론 자동연필깍기로

깍겠거니 하면서도 괜한 질문을 던져 본다.

'엄만, 교실에 성능이 좋은 자동 연필깍기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하는 딸아이의 말에 또 한마디를 보탠다.

'연필 깍기로 깍는거랑 엄마가 깍는거랑 같니?

자동연필깍기로 깍는거는 빨리 부러져서 못써. 금방 연필이 닿아질게다.

엄마가 직접 이렇게 깍으면 오래 가는걸 ...'

 

아직 뭘 잘 모르는지, 엄마가 가져오라고 해서 항상 가지고 다니는지

둘째는 항상 진한 카기색 필통을 영락없이 가방에 넣고 달랑거리며 다닌다.

그 아이의 필통을 열때마다 뭔가 비밀스럽고 비릿한 추억을 보듬어 보는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 어릴적 키큰 연필보다 몽땅 연필이 더 많았던 빈약하기 짝이

없던 필통이 떠올려 지기도 하고 우리 아이가 그 나이가 되어 내가 깍아준

연필을 써서 받아쓰기도 하고 셈도 하였을 생각을 하면...

 

필통을 열면 그런 냄새들이 가볍게 풍겨나온다. 아이의 손톱냄새 비슷한,

손가락 끝에서 잠시 배어나왔을 옅은 땀냄새와 또박또박 글씨를 쓰느라

애를 썼을 그 가벼운 숨소리까지 연필마다에서 느껴지는것만 같다.

 

그러니 난 아이들의 연필을 깍으며 단지 줄어든 연필심의 키를 키워주는 일 뿐만

아니라 내가 상상으로 그려 보게 되는 아이의 학교 생활도 살짝 엿보게 되는 것이다.

 

예전엔 몽땅 연필도 당당히 한자리 차지했을 필통에 지금은 품질좋고 색감도

그리고 디자인도 다양한 갖가지 연필이 차지하고 있다. 그 위세도 등등하게...

요즈음은 흔하디 흔한게 연필이어서 연필을 선물로 주면 그건 선물로 치지도 않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만할때 난 연필선물이 정말로 맘에 들었는데 말이다.

선물로 연필을 받으면 너무 기뻤던 나는 누군가 내 연필을 뺏어갈까봐 몰래 숨겨놓고

하나씩 꺼내 아껴 쓰곤 했었다. 연필을 조심스레 깍고, 막 깍아 놓은 끝이 뽀족한

연필심이 부러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글씨를 써나가면 그 연필의 사각거림이

얼마나 신선하던지.

부족함을 알았으니 그리 소중한 느낌도 들었으리라..

지금은 모든 물질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나 어릴땐 그리 귀하게 대접받던 연필은 작아지면 미련없이 버리게 되는 일회용품인 것이다.

사실, 여기저기 참 연필이 많기도 하다.

아이들 책상서랍에 필통꽂이에 가득 꽂힌 연필들... 그리고 대기중인

서랍장의 새연필들이 굳이 연필을 아껴쓸 이유를 없게 만들고 있다.

 

유행에 빨바른 문구회사들이 내놓은 연필들은 각종 캐릭터와 상표들로

화려하다. 질도 좋아져서 예전엔 깍기 어렵던 나뭇결이 지금은 부드럽게 깍여나가서

연필을 깍는 느낌도 참 좋아졌다.

아이 필통에 있는 연필을 다 깍아 제자리에 넣어 두면서 나 혼자

흐뭇해 있다가 아이에게 한마디 보탠다. '연필 깍아 두었다' 

내 딴에는 엄마가 깍은 연필을 쓰면서 엄마의 마음 한조각을 들여다 보았으면

하고 보탠 말이었는데 아이의 반응은 시큰둥 하다. '알았어요'한마디 한다.

교실에 연필깍기가 있는데 굳이 이 작은 수고를 자청하는 엄마의 마음을

아이가 알아 주었으면 싶었던가...

연필깍기가 주는 기계적인 느낌보다는 엄마의 손길이 묻어나는 연필을 쓰면서

정서적인 안정감을 기대하는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지 모르나

그런 한가지 한가지가 쌓여 결국은 아이의 심성이 만들어 지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오늘도 난 한무더기의 연필을 신문위에 올려 놓고 카터칼과 휴지통을 준비한다.

 

그렇게 연필을 깍다 보면

나 국민학교때 그리 했던 것처럼 연필로 뭔가를 써보고 싶은 생각이 일곤 한다.

막 깍은 연필심이 부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사각사각, 연필로

시한편을 적어 내려가고 싶기도 하고,

거실에 놓여진 유리병에 꽂힌 국화꽃을 스케치 해보고 싶은 생각이 나곤 한다.

그리고 색색의 연필을 깍아 항상 책상위에 두고 쓴다는

한 수녀시인의 마음도 들여다 보게 된다.

 

참나무와 흑연이 만나 하나가 되는 연필..

그래서 일까, 연필을 깍다 보면 참나무 향이 향그롭게 피어나는듯도 하고

땅속깊이 묻혀 있었을 흑연이 가지고 있었을 흙냄새도 아련히 피어오르는 것만 같은 연필.

 

연필을 깍으며 나무와 흙의 향기를 맡아보는일도,

연필을 다 깍아 단정하게 연필꽂이에 꽂아 두고 보는일도 행복한 일이다.

오늘은 오랫만에 연필로 친구에게 편지를 써볼까 한다.

참나무 익어가는 가을숲, 여기저기 떨어진 도토리를 주우러 다니느라 바쁠 다람쥐 얘기를

섞어 오랫만에 연필로 쓰는 가을편지는 참 향기롭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