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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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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동안.


BY 빨강머리앤 2003-08-28

컴퓨터가 문제를 일으켰었다.

뭐가 잘못 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던지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컴퓨터 전원을 올리면 기본화면만 커다랗게 확대되어 나올뿐,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기미는 없이 그저 망연자실하게 손을 놓고 있는

듯 하였다.

컴퓨터가 힘없이 이어가는 말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아무 문제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생각을 모으고 마음을 정리하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싶다는 오롯한 생각으로 일단,

컴퓨터가 빠진 문제를 나도 함께 되짚어 보고 싶었다.

 

컴퓨터가 하는 말인즉슨, 그랬다.

나를 너무 함부로 대했어요. 특히, 아이들이 내 기본 용량을 무시하고

되는대로 게임을 깔아놨어요. 그래서 너무 힘이 들었어요.

내게 허용된 용량 이상의 것들을 나도 주는 대로 받아 들이려고 노력을 했지요.

그러다 보니 소화불량에 걸린 거랍니다.

게다가, 당신도 몇번 확인했다 시피, 당신의 아들 딸

고녀석들이 엄마 몰래 나를 켰다가 엄마한테 들켜서는

얼른 컴퓨터를 끄곤 했잖아요?

순서가 엄연히 있는데 그 순서에 맞게 차례를 지켜서 오프시켜야 하는데도

대뜸 컴퓨터 전원을 꺼버리곤 했지요.

통신회사이름을 클릭해서 연결을 끊고, 실행버튼을 눌러서

시스템종료를 시켰어야 하는데 몰래 하다가 들켜서는 얼른 본체의 전원버튼을

내려 버리곤 했던게 사실은 더 큰 문제였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나를 다루다 보니 내 회로가 온전히 있을리 만무하잖아요?

 

한두번도 아니고 셀수 없이 많은 횟수를 그리 했으니 내 회로는 그만

길을 잃고 미로를 헤맬수 밖에요... 그날부터는 내 관할 밖이었어요.

그러니 난 손놓고 있을수 밖에요...

당신은 애를 태웠지요? 꼭 써야 할게 있다면서

잘 다룰지도 모르는 컴퓨터를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전원만 할일없이 껐다 켰다를 반복하는 당신을 보면서 사실은 난

걱정이 더 해지더군요. 그때 미리 나를 만들어준 컴퓨터 회사에

전화를 했어야 했어요. 그랬다면 제법 친절한 회사직원이 나를 다루는

방법을 알려 주었을 테고, 당신은 그대로 따라만 했어도

그렇게 고장난 나를 고치러 사람이 출동하는 일이 없었을지도 몰라요.

고장난 나를 고치러 온 사람이 컴퓨터를 함부로 다뤘다고

전문가가 조금만 손보면 되는 걸 아이들한테 협박하는걸 듣고

사실 난 웃었답니다. 아이들은 그 말을 듣고는 제법 심각해 했지만요.

'너희들이 컴퓨터를 함부로 써서 어쩌면 이 컴퓨터 버리고

새로 사야 할지도 몰라. 컴퓨터 새로 살려면 되게 비싼데 엄마아빠가

쉽게 사주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어쩔거니? 이제 부터 잘 쓸거야?'

그말에 아이들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정말 나를 갖다 버리기라도 할것 처럼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볼땐

사실 난 웃을수만은 없었어요.

그때 마구 내 머릿속을 헤집는 연장들의 날카로운 손길이 느껴졌거든요.

사실, 나는 알고 있었어요. 내가 왜 고장을 일으켰는지.

그러니, 고치는 방법도 알고 있었고 내 말을 알아 들을수만 있었다면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과연 전문가 답게 컴퓨터 회사 사람은 곧 문제점을 알아 내더군요.

그리고 신속하게 고치기 시작했어요.

당신은 나를 고치는데 꽤 많은 비용을 지불했지요?

그걸 보고는 사실 나도 미안한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그건 순전히 당신네 식구들이 나를 함부로 사용한 댓가이니 나도 어쩔수가 없었답니다.

앞으론 나를 살살 달래며 사용해 주세요.

그러면 오래오래 난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서 당신의 손도 되고

당신의 생각도 옮겨도 줄게요.

 

 

우리집 컴퓨터가 고장을 일으켰던 며칠동안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을 할수 없어서,

난 끄적거리는 글줄이나마 쓰고 싶어서,

남편은 인터넷뉴스가 전해주는 현장뉴스를 빨리 보고 싶어서

컴퓨터 앞에 서성거렸었다.

 

본체 하나에 모니터 그리고 키보드가 전부인 기계에 불과한

컴퓨터가 어느결에 우리가족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그 며칠동안, 아줌마 방에서 쏟아질 수많은 세상살아가는 이야기가

너무도 궁금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함께 하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그리고,

내 방, 아컴이 만들어준 내방이 너무 쓸쓸하지나 않을까 싶은

혼자만의 걱정으로 불꺼진 컴퓨터 앞에 하릴없이 앉아 있기도 했다.

 

아, 이제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다.

새롭게 업그레이드 된 컴퓨터처럼, 새로 시작하는 내 마음도

한층 업그레이드 시키고 싶다.

가을 하늘처럼  파랗게 높아지고도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