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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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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꽃물을 들이며.


BY 빨강머리앤 2003-08-13

봉숭아는 여름한철 보통의 우리사는 화단을 화사하게 꾸며주는 소박한 꽃이다.

그러기에 일제시대엔 민초들의 설움을 '울밑에선 봉숭아야..'라고 노래로 불러주기도

했으리라... 어디서든 쉽게 만날수 있는꽃이면서 볼때마다 다정한 느낌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봉숭아는 훌륭한 천연 염색제이기도 했으니... 나 어릴땐 내 친구들이며

언니와 심지어는 엄마까지 합세해 여름이 깊어가는 이즈음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이곤 했었다.

 

여름한철, 화단을 아름답게 장식할 양으로 봄에 씨를 뿌렸겠으나,

그꽃이 풍성하게 피었다 질 무렵 길쭉한 잎새와 명반가루를 섞어서

손톱에 꽃물을 들일 양으로라도 봉숭아는 화단에 꼭 있어야 할 꽃으로 기억되기도 했었다.

 

집안일로 바깥일로 늘 쉴 틈이 없었던 엄마가 여름마다 빠뜨리지 않고

한창 소담스럽게 꽃피우고 있는 봉숭아를 따와선 딸들에게 손톱을 물들이는 일을

마다 하지 않으셨으니 생각해 보면 엄마의 마음에 깃든 소녀의 꿈을

읽을수 있을것 같다. 엄마 시대엔 메니큐어가 귀했을 테니 치장의 목적을 위해서라도

천연염색제인 봉숭아 꽃물을 들였을 테지만,

우리시대의 소녀의 꿈으로 자리한 '봉숭아 꽃물이 첫눈올때까지 남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그 수줍은 꿈을 또한 가졌음에랴...

 

바쁜와중, 한낮 가장 뜨거운 태양빛이 사정없이 쏟아지면 마루에 나란히 언니와 나를

앉히고선 봉숭아꽃물을 들일 준비를 하셨다. 봉숭아꽃과 잎새 몇개, 명반조금,(명반이

없을땐 소금도 괜찮았다) 손톱을 처맬 투명한 비닐 그리고 굵은실 ...

얌전히 있으라며 손톱위에 조심스레 잘 이겨놓은 봉숭아꽃을 올리고

크기에 알맞게 자른 비닐을 감싼 다음 실로 처매는 일련의 과정을

스무번이나 (언니 손톱, 내손톱)하면서 몇번이고 엄만,'가만히 있어야

이쁘게 물들지.'하시곤 하셨다.

언니와 나의 손톱을 모두 비닐로 처매 주시곤 남은 봉숭아꽃물을 새끼손톱에 올리시곤

모처럼 한가하게 마루에 앉아 계시던 엄마의 모습이 어제 인듯 하다.

 

손톱에 봉숭아 물이 잘 들기 위해선 인내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금방 물이 드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한 붉은 색이 손톱을 물들여줄

것이므로 지루했지만 양손을 대자로 벌이면서 시간을 재고는 했었다.

그러다 매미소리를 들으며 낮잠에 빠지지도 했었으리라..

꿈결엔듯, 손톱에 묶어둔 실이 풀어져 나가는 느낌에 얼른 손을 바로 하고는

다시 잠들기를 몇번,,,, 그렇게 하고 나면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는지

매미소리도 잠잠해지고 엄마는 그새 일하러 가셨는지 아니 보이곤 했었다.

 

자고난 새에 봉숭아 물이 얼마나 들었을까 궁금하여 얼른 풀어 보고 싶은 마음과,

좀더 기다리면 더 붉게 들수 있을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볼까 하는 조바심과의

갈등의 시간을 보내다 결국엔 손톱을 처맨 실을 풀어본다.

손톱이랑 그 주변이 빨갛게 물들고, 손톱 안쪽이 쪼글쪼글해진채 온통 붉게

물들어 있는 모습을 보며 어느땐 만족함에 웃음이 났었고, 어느땐 생각보다

꽃물이 덜 들어 있어서 실망하기도 했었다.

 

손톱바깥쪽의 붉은 물을 얼른 빼려면 즉시 손을 씻어야 했다.

잘 씻어지지 않는 붉은 물을 없애기 위해 수세미로 문질러도 보고

비누를 몇번이고 사용해 보지만 당장에 그물이 빠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몇번 물놀이를 하고 머리를 감고 나면 손톱에 이쁜 봉숭아 물만

남고 주변의 붉은기가 없어지고는 했었다.

그때 즈음이면 손톱 안쪽에서 새손톱이 돋아나 하얀 눈썹달 모양이 되곤 했는데

그때부터 진짜 이쁜 봉숭아 꽃물을 들인 손톱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 손톱을 소중히 여기며 첫눈올때까지 남아 있었으면 하는건

언니한테서 들은 그 이야기, 내게는 해당이 안되었던 , 먼 훗날의 아련한

느낌뿐이었던 '첫눈이 내릴때까지 봉숭아 꽃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단다'라는

말때문이었을까...

그냥 아까워서 였을 것이다. 그 이쁜 꽃물들 손톱을 오래 오래 지니고픈 소박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여름한철, 뙤약볕이 내리는 날 매미소리를  들으며 꽃물을 들이던

봉숭아꽃물이 어느때는 첫눈이 내릴때까지 남아 있을 때가 있곤 했다.

첫눈이 살살 내리는 하늘을 처다보다 내손톱에 남은 봉숭아 꽃물을 쳐다보다를

반복하며 뭔가 희망적인 일이 미래에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싶어 마음이 설레곤 했던

어린시절....

 

엄마는 오랫동안 여름이면 내손톱에 봉숭아 꽃물 들이는 일을 계속했던듯 싶다.

중학생 이던때까지였나...  어느땐 언니랑 돌아가면서 그리했을 것이고,어느땐

앞집 아이 순임이랑 서로의 손톱에 꽃물을 들이고는 했을 테지만 그런 기억이

중학교  다니던 그때까지 였던걸로 기억한다.

 

여름이 와도 봉숭아 꽃물을 들이지 않던 여름이 몇년이 흘렀다.

그때에도 어느집 화단에 핀 봉숭아를 보면 손톱에 꽃물을 들이고 싶은

충동은 일었으나 그것 뿐이었었다.

 

그러던 것을 올해 내 딸을 앉혀놓고 봉숭아 꽃물을 들였다.

마석역을 갔다가, 그 앞에 심어놓은 봉숭아 꽃이 탐스러워 보였는데

비가온 어느날 비를 맞고 낙화하는 봉숭아꽃을 보고는 그래, 손톱에 꽃물들이자

생각을 했던 것이다. 떨어진 꽃잎과 만개한 꽃을 몇개 더 땄더니 한손에 가득 차왔다.

(마석역 봉숭아꽃을 따간 사람이  여기서 밝혀 지누나..^^::)

명반을 준비하고 저녁을 먹고는 딸아이의 손톱에 봉숭아꽃물을 들여 주었다.

쓰고난 비닐 봉지를 일정하게 자르는 수고를 비닐랲으로 간편하게 대체하고,

잘 이겨놓은 봉숭아꽃을 작은 손톱에 올리고 비닐맆으로 감싸고는 실로 칭칭 동여 매줬다.

나도 예전 우리엄마처럼'가만히 있어야 이쁘게 물들지'라고 얘기해 주면서...

딸아이의 열개의 손톱에 봉숭아꽃을 처매놓고

내손톱에도 물들일 생각을 했으나 나혼자서는 불가능했으니,

딸아이의 열개의 손톱에 봉숭아꽃을 올려놓는 동안에도 전혀 관심을 안보이던

남편을 졸라볼 생각을 한다.

의외로 순순히 그러마하고  내손을  잡아주는 남편은 웬일이었는지...

남편덕분에 꽃물이 손톱에 이쁘게 들었다.

잠버릇이 심한 딸아이는 밤새 손톱 때문이 더 심하게 뒤척였던 모양으로 몇개의 손가락은

처맨 비닐이 빠져서 울긋불긋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지만

봉숭아 물든 손톱이 대견한듯 보고 또 보는 양이 재미있었다.

 

마석역 봉숭아꽃이 강렬한 염색제 였는지, 아니면 명반을 너무 많이 섞은

탓인지 손톱 뿐만 아니라 손톱주변부까지 한동안 빨간 색이 들어 빠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야 손톱 안쪽에 새살이 돋듯 하얀 새손톱이 나오며

삐죽이 얼굴을 내민 하얀손톱달 모양과 붉은색 봉숭아꽃물이 참으로 어울리게 되었다.

 

이젠 첫눈이 오면 무슨 소원이 이루어질까.. 이미 첫사랑과 이루어짐은 물건너간

현실을 살고 있는 이나이에 손톱에 들인 봉숭아꽃물을 들여다보며 새삼스럽게

'첫사랑'이나 그리워 해야 하는 건지..

손톱을 메니큐어로 치장하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선

그저 총천연색으로 물든, 그것도 몇달은 거뜬히 지속되는 봉숭아꽃물이

옛추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해본다.

'봉숭아꽃물이 이쁘게 들었네요'라고 내손톱을 본 사람들의 그 칭찬 한마디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