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를 빠져나와 해남반도를 거쳐 강진엘 들르기로 했다.
이왕에 해남땅을 밟았으니 땅끝에 가보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땅끝하면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을 일컫는 말이다. 땅끝으로 가는길에
달마산에 있는 미황사에 들러 보기로 했다. 반도끄트머리, 더이상 산새가 솟을수
없을것 같은 곳에 우뚝 일어선 산이 하나 있으니 그곳이 남도의 금강산이라 부르는
달마산이란다. 그 달마산 품에 당당한 자태로 서 있는 미황사는 그 건물이 주는
위용이 과연 대장부 기질을 지닌듯 보였다. 대웅보전에 가기에 앞서 수련원엔 한창
한문을 공부하는 아이들의 한자외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요즈음 한자공부에 재미를 붙인 아이들이 그소리를 듣더니 '나도 여기서 한자 공부
하면 안돼?'한다.
여기 미황사까지 오기가 어디 쉽니? 라며 얼버무리는데 옆에서 듣던 관람객이 한수 거든다.
'여기 공부하러 온 아이들은 서울서도 오고 전국 각지에서 모이는 걸요...'
그 말에 그만 머슥해져서, 나도 한번 생각해 봐야 겠다,며 서둘러 그자리를 벗어났다.
달마산 준봉아래 나래를 펼치듯한 지붕을 인 대웅보전 건물이 시야에 들어오고,
마당 오른쪽에 커다란 돌확이 약숫물을 찰랑 거리고 있었는데
제법 가파른 산길을 오르느라 목이 말랐던 아이들이 돌확이 놓인 곳으로 달려 갔다.
대웅전 뒷편의 요사채를 지나쳐 나한불을 모시고 있는 응진전에 이르자, 벌써 피었다 지고 있는 가운데 몇송이만 탐스런 보라빛을 띤 수국꽃을 만났다. 계단 양쪽에 한창 피었을땐
눈부시도록 이뻤을 수국이 벌써 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입추도 지났고, 수국이 한창 피어나는 7월도 보냈으니 수국이 지기도 하련만,늦게 찾아온 나를 탓하기에 앞서 그새를
못 참고 꽃잎을 떨구고 있는 수국에 원망스런 마음이 이는 것이었다.
그래도 아쉬워 그 계단께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남은 몇송이의 수국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으니까..
동백나무가 틈틈히 섞인 나무들이 울창하던 달마산을 빠져나와 땅끝마을에 다다랐을때
차가 더디 가기 시작했다. 이유인즉, 땅끝에서 보길도로 가는 배편이 있는데 여행객들이
보길도에 가는 배를 타기 위해 그렇게 차량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거랬다.
땅끝에 가면 깍아지른듯 벼랑이 있어서 그곳에 서면 어딘가로 떨어져 내릴것 같다던
아이들의 우스개 섞인 염려가 무색해 지는 때였다.
땅끝은 그렇게 바닷길을 열어 그 바다 지나 있는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 주는 완충지였음을
나도 땅끝기념비 앞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며 깨달았다.
다산초당, 그곳 하나만 보기 위해서라도 꼭 다시와 보고 싶었던
강진에 도착해 보니 벌써 해가 서산으로 지고 있는 저녁무렵이었다.
다산초당 아래 민박집을 숙소로 정하고 저녁을 지어 먹었다.
여행중 맛난 음식을 사먹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지만,
직접 밥을 해먹는 맛도 여행의 즐거움중 하나 이리라...
엄마가 싸준 된장에 풋고추, 그리고 마늘장아찌가 있고, 김치가 있으니
찌게 하나만 더 보태면 훌륭한 성찬이리라....
별이 반짝이고 보름달의 꿈을 안은 달은 그날도 푸르게 빛났다.
밤벌레 소리를 자장가 삼아 별빛과 달빛을 받으며 잠드는 밤은 행복했다.
바로위 귤동마을의 다산초당을 머리맡에 두고 단잠을 자고는 오리소리에 깨어난 아침,
오리농법으로 벼농사를 짓는 논이 민박집 앞에 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온통 초록인 세상에 빨간열매를 드러내놓고 있는 동백꽃열매가 인상적인 남도의 풍경은
강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귤동마을 초입, 다산초당을 오르기전 마을이 예전에 비해 많이 변했다고 탄식의 소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각박한 도시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여행객의
지친 심신을 다독여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단아한 마을에 들어선다.
기념품과 다산초당이 있는 만덕산에서 채취했다는 녹차를 파는 가게를 지나쳐
조롱박이며 수세미등 넝쿨식물들이 자랄수 있도록 쇠로 아치를 만들어 놓은 곳을 통과했다.
그것이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면 훨씬 멋스럽지 않았을까 싶었다.
쇠로 만들어진 아치가 주는 차가운 느낌 때문이었을까.
주렁주렁 매달린 조롱박이며 수세미가 어딘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다산초당을 오르는 길은 대나무와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한낮인데도
다소 어두운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따가운 햇살에 지친 여행객에겐
참으로 고마운 서늘함이었다. 대숲과 소나무 사이를 헤치고 다산초당에 올라,
다산초당 마루에 걸터 앉아 보았다. 대나무와 소나무가 전해주는 청정한 기운과 더불어
초당옆 연못에 대나무 도롱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소리가 시원하게 전해져 왔다.
초당 뒤 바위에 다산이 손수 새긴 '丁石'이라는 글자가 아직도 선명했다.
차를 다려마시곤 했다는 초당앞 '다조대'와 손수 만들었다는 약천과
솔방울을 지펴 차를 다리고는 했을 다산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것도 그곳이라서 가능했을
것이다.
동암을 돌아서 천일각에 올라 보았다. 거기서 강진의 너른 들판과 구강포 앞바다를
바라보라고 했던가.. 녹음이 짙푸른 만덕산 그아래, 푸르게 여물어 가는 벼포기를 담은 논,
그리고 이젠 갯벌을 매립해 버려 다소 자연적인 맛이 떨어지는 구강포 앞바다의 푸른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갯벌을 매립한 흔적은 선명한 줄긋기로 보여진다.
바다와 들녘 그사이에 무수히 자라던 해안식물들은 자취를 감춰 버리고 바다와의 간격을
둑으로 막아놓은 구강포를 천일각에서 바라보자니, 바다와 들녘의
부드러운 능선을 사납게 굵은 펜으로 주욱 그어 놓은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천상 다산이 그 만덕산 기슭 어딘가에 앉아 흑산도로 유배간 형 정약전을 그리워 했다는 형제지정을 그려보는 일이 오히려 그 풍경을 가슴으로 안게 되는 이유가 될터였다.
만덕산 줄기를 타고 백련사에 가는 그 여유로운 여정은 생략하기로 했다.
작년에 그리 했다는 핑계로 이번엔 조금 편안 루트를 이용했다. 곧바로 백련사로 직행.
백련사앞 커다란 목백일홍은 올핸 꽃을 덜 피웠는지 작년에 백련사에 들렀을때
시야를 진홍색으로 물들이던 모습에 비해 소박하게 보이기 까지 했다.
백련사는 그 입구에 아름드리 동백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는
백련사의 동백나무 숲은 무려 삼천여평 규모란다.
그 삼천평 규모의 동백나무가 일제히 꽃을 피우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런 상상을 하자니 '동백꽃이 피는 삼월'에 백련사 동백꽃을 보러 꼭 한번
와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지는 거였다.
강진의 무위사를 이르러, '세상에는 이처럼 소담하고, 한적하고, 검소하고, 질박한 아름다움도 있다'고한 구절을 어느책에서 본듯하다.
무위사의 그 소박하면서도 안온한 느낌을 나는 달리 표현하지 못해
위의 말을 빌려 무위사를 소개 하고자 한다.
산사를 찾아가 보면서도 별 느낌이 없던 나에게 산사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느끼게 해준
절이 바로 무위사였다.
'무위란 인연에 의하여 생성되지 아니하고 영원불변의 초시간적인 절대적인 진리'라고
설명되어진 글을 몇번을 읽어 보지만 그 뜻이 너무 고귀해선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무위사의 단정하고도 소박한 아름다움이 무위를 대변해 주는느낌을
받았던 듯 싶다. 그런데 무위사 삼층석탑을 마주하고 있던 대나무숲이 모두 베어지고
새로이 중창불사가 한창인 모습을 보고는 적잖이 실망이 앞섰다.
대숲이 전해주는 청정함은 산사의 모습에서 빠뜨릴수 없는 주요소인듯한데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을 두고 보지 못해서인가,
대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새로운 건축물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 못내 안타까웠다.
탐욕이 부른 자연파괴의 현장을 산사에서 조차 맞딱뜨리게 되는 일은 정말이지 더 이상
없었으면 싶었다.
월출산이 따라왔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로 가던 도중 월출산을 보며 '저산이 꼭 한양의
도봉산 같다'고 했다던가...
영랑생가로 가는 내내 따라오던 월출산이 강진읍에 들어서자 시야에서 멀어졌다.
강진읍으로 들어서 영랑생가를 찾아가는 길, 남편이 나즈막히 동요를 한소절 불렀다.
'라라라,반짝이는 햇살같이...' 어렴풋이 기억나는 동요의 한소절은 김영랑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였다.
영랑생가 주변엔 '영랑'이라는 이름을 단 가게들, '영랑세탁소' '영랑빌라'등이 있어
쉽게 영랑생가를 찾을수가 있었다.
돌담에 햇살이 유난히도 뜨겁게 속삭이던 여름날, 영랑의 시'모란이 피기까지'가 새겨진
시비 앞엔 기념촬영을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시비앞에서 기념촬영을 할 양이 아니었는데 어느 중년부부가 한컷을 부탁하고는 '저희가 찍어줄까요?' 하는데
할수 없이 다른사람들이 했던 대로 모란이피기까지는 기둘릴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 씌여진 시비 앞에 나란히 앉아 가족사진을 찍었다.
영랑의 거처였던 방엔 그렇게 마당을 바라보며 시를 썼을 것이라고 말해 주는듯
영랑의 모습을 재현한 마네킹이 놓여 있었다.
마당의 나무와 꽃들을 바라보며 시심에 젖는듯한 모습으로...
집 뒤란의 단정한 장독대와 뒷산의 대나무가 청정한 기운을 품어내는 그런 곳이라면
시심이 절로 일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흙마당을 거쳐
영랑생가를 돌아나왔다.
다산초당, 백련사와 무위사, 그리고 영랑생가를 둘러 보았으니 강진의 명소를
어느정도 다녀 보았는데 한가지 강진에서 꼭 했어야 할일이 빠졌으니,
강진과 영암의 특산물인 무화과를 사지 못한 것이 그것이다.
무화과가 익기엔 아직 철이 이른 모양인지 무화과 파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쉬웠지만, 어쩌겠는가, 내년을 기약해볼 밖에... 아니, 그럼 내년에도 또 강진에...
그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때는 좀더 느긋하게 들여다 보고 싶다.
한곳에 오래 머물러 주변을 차분히 들여다 볼수 있었으면 한다.
이번 여행에서 받은 감동의 한조각을 소중히 가슴에 품고 집으로 돌아오는길...
늦은밤 귀뚜라미가 벌써 귀뚤대고 있었다. 아, 가을인가! 벌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