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이란 영화를 보셨는지...
그 햇살 반짝이는 강물의 흐름을 기억하시는지...
영화를 보다가 잠을 자버렸던 내가 그 영화에 대해 깊이 있게 말할 바는
못 되지만 영화의 포스터 처럼, 영화 전반부 내내(내가 보았던 장면까지)
흐르는 강물이 배경이 되었던 영화가 있다.
로버트 레드포드가 감독이 되어 주연배우가 되어 아름다운 영상을 담아 냈던
영화'흐르는 강물'처럼을 기억하는건
지난 토요일의 수동계곡이 그 영화의 배경을 떠 올리게 했던 때문이다.
넓다란 계곡엔 잘거나 굵은 자갈돌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고, 그 위로 어른
발목까지 차오르는 물이 돌돌돌 흐르고 있었다.
햇살이 내릴땐 여지없이 반짝이며 흐르는 물..
계곡 안쪽으로 전나무 숲이 울울하던 산이 펼쳐져서
물빛과 더해져서 푸른 웅덩이가 만들어 지고,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아이들의 노는양을 보거나 고기를 굽고
한가롭게 바람을 붙잡고 누워있던 위로 밤나무 잎새가 굽이쳐내리던
수동계곡이 마치도 흐르는강물처럼의 배경만 같아 보였던 것이다.
영화 속처럼 플라잉 낚시는 아니었지만 가끔씩 강태공이랍시고
쇠추가 촘촘히 박힌 그물을 들고 물고기가 있을 만한 길목 길목을 샅샅히
훑어 내던 낚시꾼이 있었다.
정말 뭔가가 잡힐까 싶었는데 어른 손가락 굵기 만한 피라미들이
매운탕으로 끓여질 냄비속에서 뻐금 거리는 걸 그물 옆을 따라다니는 아주머니가
보여 주셨다.
점심 참에 그렇게 한번씩 계곡 물을 훑고 다니시던 그 중년부부가
저녁 무렵 다시 한번 똑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을때 우리중 한 사람이 그랬다.
'이제 저녁 매운탕 거리 찾으러 나섰나 보다'고..
플라잉 낚시는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자연스럽게 물고기를 낚는
방법이었다. 그에 비하면 작은 물고기 까지 싹쓸이 할 양으로 촘촘하게 엮은 그물을
들고 어디 한군데 빠짐없이 계곡물에 그물을 던지던 사람들의 모습에선
어쩐지 탐욕만이 읽혀서 씁쓸했다. 나중엔 그게 무슨 낚시였는지 모르겠으나
남포등 모양을 한 하얀 상자 비슷한 것들을 들고 한무리의 남자들이
그물로 한번 싹쓸이한 계곡물에 혹 남아 있을지 모를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는
것을 보았다.
여러번 물고기를 잡으려고 시도를 해 보았으나 별 소득이 없었는지 그 남자들이
계곡 상류 쪽으로 가더니 단체로 목욕을 하는 거였다.
그것도 온몸에 비누를 잔뜩 칠하고 말이다.
영화속 배경만 같았던 숲과 흐르는 물이 갑자기 달라져 보였다.
아무리 현실이 영화와 같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온몸에 비누칠을 하고
목욕하는 일은 정말 아니다 싶었다.
계곡에 들어설때, 먼저 다녀간 사람들이 남겨둔
비닐봉지와 고기를 굽다만 흔적이 얼마나 기분을 상하게 했던가?
물과 숲과 깨끗한 공기를 사람들에게 바치는 고마운 자연에
상처를 내는 쪽은 항상 사람이란 사실을 다시한번 절감하던 날이었다.
해가 어느덧 서산 쪽으로 기울여 지려 하고 있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아이들은 물놀이에 열중해 있었다.
저마다 놀이방법을 터득해, 어떤 아이는 계곡 상류 쪽에서 튜브에 앉아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며 아래쪽 까지 떠내려 가기를 반복하고 있었고,
어떤 아이는 튜브와 튜브를 연결해서 튜브기차를 만들어 아이들을 태우고
제법 깊은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놀기도 했다.
그렇게 물과 하나가 되어 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적어도 아이들은
자연과 닮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이 자연을 마구 짓 밟고 상처를 내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자연의 푸른 미소를 간직하고 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어른인 내가 부끄러웠다.
내가 오늘 남긴 쓰레기를 하나씩 챙기며 사람 살아가는데 이토록이나
많은 것들이 필요하고 이토록이나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 내는 구나 싶어 씁쓸했다.
저 아이들에게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과 함께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의무와 책임이 우리 어른들에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날이었다.
하루종일 물에서 노닐던 아이들은 그래도 아쉽다는듯
이제 가자는 어른들의 외침에도 물에서 나올 생각을 아니 하였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 2003년 7월 2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