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도 다 저물어 가는 깊은 겨울이였다.그해 정월초하룻날 고고의 성을 울리며 태여난 조카는 희망이 없던 우리가족에겐 구원과도 같은 아기였다.한입이라도 덜어야 살림살이 였기에 학업을 중단하고 직장을 따라 서울로 간 작은오빠를 빼고구심점인 할머니를 비롯해 큰오빠 부부와 조카 그리고 막내오빠와 내가가족이란 울타리속에 면면히 살아가고 있었다.참으로 순하고 잘생긴 조카녀석의 벙글거림속에 메마르고 건조한 삶속에도 간간히 웃음꽃이 피고...조그만 전방을 꾸리고 할머니의 재력으로 밥을 굶지 않고 사니 절망만 있던 시절은 아니였다.그러던 어느날,겨울도 점점 깊어가는 어느 하루 초저녁에방안요강에서 소변을 보시고 일어서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고꾸라지시듯 엎어지셨다.오른쪽 사타구니(서혜부)가 뭉근히 터져 버얼건 핏물이 스며 나오는 것이였다.(나중에 알고나니 병명이 결핵성 임파선염)집안의 대들보이신 할머니의 병환은 우리가족의 생사여탈이 걸린 중차대한 일이였다.발병후 다음날 큰오빠내외가 할머니를 모시고 서울 병원으로 올라 가셨다.그리고 며칠이 되어 내려 왔는데 아무래도 수술을 하려면 시일이 오래 걸릴것 같다고가게를 할 수 없으니 가게 문을 닫고 물건들은 미제박스 차곡차곡 쟁여 다락에다 집어 넣고할머니의 간병을 위해 오빠네 세식구는 서울 병원으로 올라 가셨다.나와 막내오빠와 덩그라니 남아 긴겨울을 살아내야 했다.그때 내나이가 12살로 접어드는 해였으니 막내오빠는 22살이 되는 셈이였다.오빠는 동네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느라고 집에 안들어 오는날이 태반이고나는 몇달동안 자취생활을 해야 했다.연탄불에다 밥을하고 김장독의 김치를 꺼내다가 끼니를 해결하고어쩌다가 운수가 좋은날은 오빠가 동네 새로생긴 해장국집에 데리고 가서 선지해장국을 사줘서 맛나게 먹기도 했다.그긴 추운겨울을 혼자 살다 시피하고겨울이 다 끝나갈 무렵 할머니가 퇴원을 하셔서 큰오빠네 세식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 오셨다.나는 더이상 큰방에서 덩그러니 혼자 자지 않아도 되었고 다시 예전처럼 우리식구가 웃으면서 살 수 있으리라 가벼운 흥분에 부풀었다.추운 겨울이 가면 따뜻한 봄이 머지 않으리란 기대를 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