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결혼하고 십 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었다.
엄마보다 늦게 결혼한 작은 엄마는 첫딸을 낳고 연달아 아들까지 낳았다.
그 뒤 결혼한 큰 고모도 딸을 낳았다.
둘째 고모까지 결혼해서 딸을 낳고 이어 아들을 낳았다.
고모 둘 다 친정살이를 하였으니, 작은엄마와 고모들의 뒷바라지는 고스란히 엄마 몫이었다.
심지어 시어머니인 할머니도 애를 낳았다.
늦게까지 애를 낳던 때이니 친정어머니인 외할머니까지 애를 낳았다.
다들 낳는 아이, 늙은 시어머니 친정어머니까지 낳는 아이를 못 낳는, 엄마 마음이 오죽 아팠을까.
둘째 고모 아들은 낳은 후 곧 죽었는데, 고모는 이것을 엄마 탓이라고 하였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엄마가 돌본다는 핑계로, 질투심에 불알을 터트려 죽였다는 것이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살인누명까지 썼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아이를 낳지 못해 엄마가 겪어야 할 치욕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이를 못 낳는다고 쫒겨나도 할 말이 없던 시절이었다.
같은 동네 살면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외할머니는 큰딸인 엄마가 쫒겨날까봐 애가 탔다.
결국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시앗을 얻어주게 된다.
애를 못 낳아 소박당한 여자였다는데 행상에 나섰다 외할머니 눈에 띄었다고 하였다.
시앗이 생긴 것도 기가 찰 일인데, 엄마는 그 시앗과 같은 방까지 써야 했더란다.
그 상황을 견디며 울엄마는 어찌 살아낸 것인지.
견디어 낸 엄마가 자랑스럽긴 고사하고 분통이 터져 엄마에게 소리 지른 적이 있다.
'엄마, 바보야?
어찌 그런 일을 참고 견딜 수 있어. 박차고 집을 나왔어야지."
엄마의 시앗 이야기를 나는 주로 이모나 고모들 작은엄마를 통해 들었다.
엄마는 그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시시콜콜 과거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기도 했을 것이다.
순창년은 이모가, 순창댁은 고모들과 작은엄마가 그녀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애를 못 낳아 소박 당한 여자였다더니, 그 여자에게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기대했던 임신이 되지 않으면 그 여자는 부엌 바닥에 다리를 뻗고 울기도 했더란다.
"아이고, 형님 어쩐다요. 또 터져버렸네."
같은 부엌에서 일하던 작은엄마가 전해 준 이야기다.
이 말로 나는 우리엄마와 그 여자 사이를 짐작한다.
엄마는 그 여자에게 맘씨 좋은 손위 동서 노릇을 한 게다.
아니라면 그 여자가 엄마 앞에서 어찌 다리를 뻗고 울며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견디기도 힘든 상황에 너그럽기까지 하다니 우리 엄마는 날개 없는 천사였나보다.
본처가 잘해준다고 그리 처신한 그 여자는 어떤 여자였을까.
짐작컨데 지혜로운 여자는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본처인 엄마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렸더면 차마 그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엄마보다 키도 크고 피부도 희고 애교도 많은 여자였다는데 오래 머물진 못했다고 하였다.
그 여자를 쫒아낸 것은 무당이었다.
할머니가 아픈데 여러 약을 써도 효과가 없으니 무당을 불렀다.
아프면 병원보다 무당을 먼저 찾던 시절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이 잘못 들어와 동티가 났다는 점괘가 나왔다.
무당들이 흔히 하는 말이지만 할머니 병세가 위중해서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해야 했다.
할머니 병세가 호전되면 다시 만나자고, 아버지는 그 여자와 눈물 어린 이별을 했다고.
그 여자와 아버지가 이별을 했어도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는 벽을 기대고 앉아 엄마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고 한다.
"에구, 불쌍한 것. 목침이라도 하나 낳아보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큰언니를 낳은 엄마는 할머니가 언니를 보내주었다고 굳게 믿고 살았다.
애 못 낳아 당한 구박 시집살이 모두 잊고, 엄마는 할머니를 고마운 분으로 기억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돌아가신 할머니 덕에 태어났고 지금도 할머니가 항상 살펴주고 계신다."
우리를 키우면서 엄마가 자주 입에 올리던 말이다.
어찌나 자주 말했던지 세뇌가 되어 정말 그런 줄 알고 자랐다.
사실이건 아니건 엄마가 그리 말한 것은 좋았다.
할머니가 항상 살피고 계신다니 든든하기도 하였고 돌아가신 할머니지만 그 사랑이 느껴지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