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TV프로에서 연상퀴즈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노인부부를 상대로
진행자가 낱말 카드를 한 사람에게만 보여주고 그 단어를 설명하게 하여
상대 배우자가 알아맟춰야 하는 게임이다.
시골 할아버지 한 분이 등장하셨다.
사회자는 '찰떡궁합'이란 단어를 보여드렸다.
이젠 그 할아버지가 부인이신 할머니께 그 단어를 설명해야 할 차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는 손짓 몸짓을 동원하여 할머니를 향해,
"자네와 나는 뭔 사이여?"
할머니는 마치 그 정답을 이미 알고 계셨노라는 표정으로
너무도 또랑또랑한 큰 목소리로 외치셨다.
"웬! 수!!"
진행자들은 모두 뒤집어졌고 웃느라 말을 잇지 못하고 마는데
그 할머니의 당당하신 표정은 마치
'내 가 정통으로 답을 맟췄제?'라고 하시는 듯하다.
갑작스런 답에 당황하신 할아버지는 할머니께 이심전심을 기대하며 화급히
"아~니,
웬수 말고 넉자로~..."
안타깝게 턱짓을 하시며 할머닐 바라보신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된 정답을 내놓고야 말리라는 결의에 찬 표정의 할머니,
알았다는 듯 더 큰 소리로 외치신다.
"백 ! 년 ! 웬 ! 수!!"
그 순간,
진행자는 물론
저녁 밥상 앞에 앉아있던 우리 가족은 모두
입 안의 밥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한참동안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백발이 성성하시고 주름투성이이신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얼굴엔
그동안 살아오신 세월의 수레바퀴 자욱이 역력하시건만
할머니의 인생에서 그 할아버지는 평생을 '웬수' 같으셨을까...
일순간의 망서림도 없이 터져 나온 두 분 사이를 표현해 준 단어.
'백년웬수'...
그 프로가 끝나고 가시는 길에 서로 다투시진 않으셨을까.
우리 세대와는 또 다른 생을 살아오셨을 그 할머니의 인생은
어쩌면 끊임없는 인내와 희생의 연속이셨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그렇게 참고 또 참고만 살아오시느라 마음 깊이 한이 쌓이셨으리라.
요즘은 가장의 권위가 말이 아니라고들 한다.
매 맞고 사는 남편들의 숫자도 해마다 늘어난다고 하는 뉴스를 이따금 접하면서
'개가 사람을 물면 특종감이 아니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해외토픽감'이라는 말을 대비시켜 본다.
물론 조선시대와 비교해 본다면 남편의 위세가 좀 떨어졌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 사이트에 가 보면
아직도 가정에서 '권위'만 내세우는 가장들도 많은 거 같다.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다.
'남자가 여자랑 똑 같냐?'를 단골 멘트로 사용하는 남편이었으니까.
그걸 일일이 따지고 들자면 자연히 시끄러워질 터.
내 성깔도 보통이 아니라고 모두들 말 하는데
아이들이 자라면서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많이 참고 사는 편이다.
아이들이 놀랄까 봐 불안해 할까 봐...
정말 참을 수 밖에 없는 까닭이 또 있다.
언젠가 둘째 녀석이 심각하게 부탁하던 말.
"엄마.
난 지금 사춘기야.
한창 예민한 시기인데
엄마 아빠가 부부싸움 하시면 내가 얼마나 불안하겠어?
싸우더라도
아무리 아빠가 미워도 절대 이혼은 하지마!
애들이 아빠 없는 애라고 얼마나 놀리는지 알아?
그러면 아마 나 비행 청소년 될지도 몰라...
아예 반 협박이다.
그래서 아이 앞에선 더더욱 함아야만 한다.
누가 정말 좋아서 참고 봐주겠는가.
다 자식들 때문에 참고 사는게지...
그런 줄도 모르고 때론 기고만장하는 바보탱이...
어느 후배 말마따나,
돈을 아주 잘 벌든지,
성격이 좋던지,
자상하던지,
잘 생겼던지,
존경 받는 남편의 조건이라나 뭐라나...
우리집 '백년원수'는 과연 그 가운데 몇 점이나 받을 수 있을까나...
돈은 잘 못 벌면서 쓰기는 남보다 더 잘 쓰고,
성격은 속된 표현으로 '개떡'깥이 불 같고,
하기야 자상하기는 하지...
생긴것도 그냥 혐오감은 안 줄 정도로 봐 줄만 하게 생겼고...
그러면 칠팔십 점은 되려나...
나이가 양반이라더니
요즘은 그 성격도 많이 좋아져서 내가 따지고 대들 일도 별로 없더구
그나마 없으면 정말 불편할 지 모르니
잘 달래가면서 함께 살아가야 할 밖에...
먼 후일
정말 '백년웬수'가 아닌
'찰떡궁합' 소릴 할 수 있게 잘 살아갸야 할텐데...
그러면
남편 점수고 구십점대 쯤으로 올려 줄 수가 있을걸...
남편이 이런 내 생각을 충분히 느끼고 있어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