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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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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쳐보기의 추억


BY 今風泉 2003-08-04

1.

장미가 담장을 감고 올라 곱게도 피었다.

유라는 아침부터 어제 저녁 새로 들어온 화초에 물을 줄 모양이다.
수도꼭지를 물고 길게 늘어선 호스 끝에서 뿜어내는 분수가 기다림으로 목을 뺀 가게안의 꽃나무들에게 생기를 준다. 칙...~~ 소리를 내며 퍼지는 빗살의 물포말에 몸을 흔들며 기뻐하는 아름다운 나무와 꽃 사이에서 유라의 하얀손이 율동한다.

물끄러미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나를 흘끝 처다보고는 즐겁게 일에 몰두하는 그녀.
누군가 밖에서 유라를 훔쳐보는 놈이 있다. 누군가 하고 곁눈으로 본다.
앞집 간판집 아들 놈이다. 중학교 2학년 아니면 3학년... 키가 멀쑥하게 크고 얼굴에 여드름이 성글게  
나고 어깨가 딱 벌어져 몸매는 어른 같지만 아직 아이태를 못벗은 사춘소년이다. 
아마도 물을 뿌리는 유라를 바라보는게 분명하다. 넋을 잃고 쳐다보는 놈을 쫒을까 생각 했지만 그러면 걔가 무안해 할 것 같아 가만히 눈을 감고 조는척 해본다.

"빵 드려요 선생님?"

유라가 나를 향해 소리친다. 이 맘때쯤 늘 그녀는 내게 빵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과일과 커피 한잔을 곁들이면 아침 식사가 된다. 나는 손을 저었다. 물주기를 다 마치라는 신호다.

"조금 기다려요. 나무들이 물달라고 난리예요. 얘좀 봐요. 어제 이사온 애가 낮도 안가리고 고개를 들고 물달라잖아요 ■■ “

나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간판집 아들은 아직도 유라를 주시하고 있다. 내가 저를 주시하고 있는걸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그래, 워낙 유라가 고우니 그 나이에 뚫어지게 보고 싶기도 하겠지...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휠체어를 밀고 장지 안으로 들어 섰다. 공연히 간판집 아들이 유라를 감상하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건 방조가 아니라 사춘기때 성숙한 여인을 바라 보며 두근 거리는 가슴을 감추면서 숨소리를 죽였던 소년의 추억이 나에게도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안으로 들어와서 눈을 감아 본다. 간판집 아들의 그 연민에찬 눈망울과 유라의 사슴같은 동산과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과 풍만한 자태가 어우러져 괜한 아쉬움을 돋운다.

“참...”

불혹의 나이에 바라보니 더욱 곱고 섹시한 그녀.  순전하기도 하고 요염하기도 하고 잔잔하면서도 남자의 가슴에 파문을 던지는 노랑꽃 같은 여자 유라! 그렇다고 유라에게 내가 엉큼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녀가 우리집의 월급을 받는 점원이라는 말고 생각으로도 더 이상 그를 넘본적은 없건만 간판집 아들의 그 간절한 눈망울이 오늘따라 내 가슴에 전이된 것인가....

유라는 나를 가족처럼 대해 준다. 아마도 혼자사는 내가 딱해서겠지....
사람구실 못하며 살던 내게 용기 내어 살라고 누님이 차려준 화원. 그리고 그동안 화원의 점원으로 스쳐간 많은 처녀와 아줌마들이 있지만 유라처럼 따뜻하게 나를 대해준 사람은 기억에 없다. 

아무래도 간판집 아들 놈의 유라 훔쳐보기가 어디까지 이르렀나 궁금하여 문틈으로 그쪽을 살핀다.
유라가 호수를 걷어 사리고 그 모습을 아직까지 지켜보던 녀석이 이제 발길을 돌리려나 보다.
유라를 더 볼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일까? 세상이 하 수상하니 괜한 기우가 전을 편다.
요즘 아이들은 워낙 충동적이서 혹시 다른 맘을 먹지 않을까 하는 그런것...

“사장님, 배고프죠?”
“아니..“
“저는 배고파요..”
“그래, 그럼 어서 먹자”

그녀와 난 서로를 훑으며 빵을 입에 넣었다.

“저, 오늘 잠깐 다녀올 데가 있는데...”
“몇시에..?”
“10시쯤..”
“알아서 해”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녀가 미안한 얼굴을 한다. 미안한 얼굴이 참 사랑스럽다. 내게 저런 여자가 있으면 참 좋을텐데..
하기야 나를 버리고 간 그 여자도 곱기로는 유라 못지 않았다.

2.

“ 저 다녀 올께요”
“ 응, 편히 다녀와.”

그녀가 문을 나선다. 근데 저쪽 편으로 누군가 유라를 보고 서 있다. 누군가. 역시 그놈이다. 간판집 아들 그 놈이다.

“저놈이..”

내 입에서 그런 소리가 툭 튀어 나왔다.

“완전히 빠졌구만 허허”

나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그런 눈치를 채지 못한 유라가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것이 보이고 그 놈이 뒤를 따라 가는게 보인다. 괜히 불안하다. 혹시, 정말 저 얘가 나뿐짓이라도 한다면...
그러나 이내 내 근심은 해소 되었다. 유라가 택시를 잡아 타자 걔는 신호등를 따라 횡단보도를 되건너와 제집으로 가는 것이 보인다. 그러면 그렇지 얼굴을 보면 사람을 안다잖아... 간판집 아저씨가 얼마나 사람이 좋은가. 동네에서 가장 인기좋은 아저씨 아닌가. 오가는 사람 술 다사주고 계모임이라는 계모임에 모두 상관하고 그래서 계 때문에 자기일도 제대로 못한다는 심덕 좋은 사장님 아닌가. 부전자전이겠지.
난 담배 한 대를 빼 물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유라의 이쁨이 오락가락 한다. 이상한 아침이구나. 주제를 알아야지...
괜한 잡념을 떨쳐 버려야지 이게 무슨 꼴이람....
담배를 더 깊게 빤다. 가슴을 맴도는 담배 연기가 맘을 삭이려 애를 쓴다.
간판집 아들놈 탓이라고 위로해 보지만 정당하다는 확신이 없다.

“아,...!”

기지개를 켜 본다. 담배 연기를 동그랗게 말아서 쏘아 본다. 고리가 되어 날아 간다.
고리가 잘 허트러지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온다며 담배연기 고리를 정성껏 만드던 사춘기 시절이 생각난다. 화원안으로 햇살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가게안이 쓸쓸하다.
조용히 또 눈을 감아 본다. 유라와 간판집 아들놈.. 그리고 갑자기 내가 서 있다.
강물이 흘러 간다. 그리고 내몸이 둥둥 떠내려 간다. 그 강가에 서성이는 소년. 그래, 네게도 저 아이처럼 간판집 아들놈처럼 참으로 숨겨둔 추억이 있었지...

3.

내 나이 열서너살 되었을까.    
친구들 보다 좀 숙성한 내 가슴에 어느날 다가온 사건(?)이 있었다.

우리집 바로 앞에 빵집이 들어 서던날
누나랑 가게를 들어서다 난 얼어 붙고 말았다.
빵집 여자때문이었다. 아줌마라고 부르기에는 좀 부자연 스러운 여자.
설흔살은 다 안되었겠지
한번도 그렇게 예쁜 여자를 본적이 없었다.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누나가 툭 때렸다.
빵을 봉지에 싸서 넣어 주면서 말을 건내는 그녀의 미소에 난 남극의 팽긴처럼 뒤뚱거리고 있었나보다.

“ 야, 뭐해..”
“ 응...”

난 누나의 손에 이끌리어 집으로 돌아 왔다.

“야, 너 그 아줌마 아는 사이냐?”

누나가 나를 다그쳤다.

“ 아니.. ”
“ 그럼 왜 그렇게 혼이 빠지냐?”
“ 혼은 무슨 혼. 빵이 하도 맛있어 보여서...”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호감을 살 수 있을까.?
그래 민아에게 환심을 사면 되겠지. 민아는 그녀의 딸인데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난 그 날부터 민아가 다니는 길목을 지켰다. 그리고 우연인 것처럼 접근 했다.

“ 야, 너 민아지?”
“ 근데 오빤 누구야..?”
“ 응, 나..저 앞에 금은방...”
“ 아, 저기 시계포..?”

하기야 우리가게는 시계포이지만 가끔 금반지를 팔기도 했다. 그래서 난 늘 자랑이 하고 싶을땐 우리집을 금은방이라고 말하곤 하는 버릇이 있었다. 아마도 우리집을 어필하고 싶었던 내 생각 때문이었나 보다.

4. 

민아 엄마 - 내 혼(?)을 빼앗아간 그녀는 혼자 산다고 했다.
민아 아빠는 무엇하는 사람일까 궁금했지만 확실히 말해 주는 사람은 없었고 민아도 제 아빠는 사우디에 돈벌러 갔다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나는 그후로 민아를 잘 돌보아 주었다. 가방도 들어다 주고 자전거도 태워주고 무엇이든 다 해 주었다. 점점 어리광이 붙은 민아는 나를 데리고 저희 집엘 가자고 했다.

“어, 시계포 총각이구만. ■■ 착하기도 하지 우리 민아가 그러는데 참 좋은 오빠라고 너무 좋아하더라..”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앉아. 내가 빵 줄게.. 오늘 가게 문닫고 남은 빵이 있어서 좀 가지고 왔지...”

빵이 예쁘게 놓여진 접시도 좋았지만 그녀의 그 긴 손가락과 다소곳이 앉은 모습에 난 자칫 휘청거리는 다리의 충격을 맛보았다.

“아니, 왜 어디 아파?”
“아..아녀요. 하도 빵이 맛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 빵 좋아하나보다. 그럼 내일부터 우리 가게에 와. 시간 있으면 빵도 먹고 나 없을 때 잠깐씩 가게도 봐주면 참 좋지..”

은근히 기다리던 말이었다. 민아 엄마와 같이 있는 시간을 그렇게 소원 했는데 그 소망이 이루어 지다니...
그 이튿날부터 난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빵집으로 갔다. 그녀가 나를 신통하다는 듯 손을 잡아주기도 하고 빵을 먹여 주기도 했다.
밤 9시에 문을 닫고 돌아 가는 그녀의 잔심부름 다 해주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내게 서운치 않게 지폐를 쥐어 주기도 했다. 그녀의 손이 닿으면 가슴이 불덩이가 되는걸 참느라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억눌렀다.

내 방에서 팔베게를 하고 눕는다. 그녀가 어른 거린다. 어림도 없는 연민 속에 빠진 것이었지만 그때는 그걸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빵을 싸주는 그녀의 모습, 시간날때마다 거울을 들여다 보는 모습. 라디오 음악에 따라 노래를 부를때면 정말 목소리마져 그리 곱다니...

날씬한 허리에 풍만한 엉덩이가 아직 영글지 않은 나의 자존을 건드리나보았다. 괜히 일어서서 함성을 지르는 산. 나도 사랑할 수 있다는 궐기가 모아지는 걸 자꾸 느꼈다.
눈을 감는다. 아...민아 엄마. 나중에 알았지만 그녀의 이름은 순영이라고 했다. 난 누구에게 들킬까봐 그의 이름을 “영”라고 정했다. 그리고 낙서를 했다. 수십번도 더 썼다. 그리고 속으로 이름을 부르기를 신음처럼 했다.

“영..”

친구의 이름처럼. 그리운 연인의 이름처럼 난 그렇게 부르며 밤을 보냈다.
챙피한 얘기지만 그때 나의 몸은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였다. 장지 손가락에 억센 털이 솟아나고 수염이 생기고 남자로서의 면모를 갖추면서 봄기운이 폭발하는 시기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5

토요일 오후다. 민아네 빵집이 문을 닫았다. 웬일일까?
내 발걸음은 그리로 옮겨가고 있었다.
민아네 집은 가게에서 좀 멀다. 빵집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네거리의 횡단보도를 건너면 D대로 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다보면 세탁소가 나온다. 세탁소에는 꼽추부부가 살고 있다. 세탁을 워낙 정성껏해서인지 동정심 때문인지 이 일대 사람들중에 그 세탁소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민아내 대문은 파랗다. 대문이 서슴없이 열려 있다. 밀치고 들어 가니 집안이 너무 조용하다. 오늘이 뭔날인데 가게도 문을 닫고 어디를 간거지...어디 아픈가?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벽에 걸린 달력 하나가 눈에 들어 온다. 오늘이 몇일이더라. 17일...아! 그렇구나!

민아네 가게가 있는 시장은 매월 한번씩 쉰다. 시장 모두가 문을 닫고 정기적으로 쉬는 날이 매월 17일이다. 그날이 오늘인걸 내가 미쳐 생각하지 못하고 빵가게 문닫은 것에 놀라서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민아네 모녀 신발이 댓돌위에 나란히 놓여 있다. 나는 살금 살금 도둑괭이처럼 마루쪽으로 다가 갔다. 민아라도 나와서 나를 맞아주려나..그러나 너무 조용하다. 숨소리하나 들리지 않고 펌프샘 옆으로 자란 맨드라미 붉은 잎새만 흩날린다.
여름을 지키는 꽃 수국도 담밑에 도란도란 얘기하고 열매 다 떨군 살구나무 헛잎 푸르러 실바람에 살랑 유희하면 쓰르람 매미라도 울란가 고즈넉한 오후 햇살이 붉게 대지를 달구는데....

난 마루를 올라 섰다. 그리고 안에 누가 있나를 살펴야 했다. 안방문이 빨좀히 열렸는데 아무도 없다.
윗방쪽으로 까치발을 하고 살금살금 발을 옮기는데...
오! 그녀가 침대위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다니.
난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안방쪽으로 발을 옮겼다. 가슴이 이다지도 두근거리단 말인가...
한달만에 찾아온 휴식의 망중한을 낮잠으로 자고 있는 성숙한 여인의 침상을 본 소년의 가슴이니 얼마나 황홀한 혼란에 빠지겠는가.   
돌아서 가자고 생각은 했지만 맘과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그녀의 침상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발가락도 예쁘지...종아리도 어찌 저리 통통할까...사과빛인가 복숭아 빛인가 상상해보지도 못한 속살을 본 소년의 가슴 그리고 이제 막 복받쳐 오는 남자의 근원이 불룩해지는게 느껴졌다.

만약에 깨서 물으면 민아 공부시키러 왔다고 하면 될거고....
몰래보는 여인의 풍만함은 충동이고 감동이고 주체할 없는 체험이고 함성이었다.
침이 꼴깍거렸다. 그녀가 이따금 움직일 때마다 또 다르게 보여지는 살갗들에 숨이 막혀 왔다. 어디선가 물이 쏟아지는가 보았다. 끈적거리는 경험없는 물이 배출구를 찾아 달라고 애걸복걸 하나보았다

소년은 그날 성숙한 여인의 허벅지를 보았다. 연분홍색 팬티 형상을 어렴풋이나마 보았다. 그리고 보일 듯 말듯한 풍만한 여인의 젖가슴의 곳선미를 눈으로 음미할 수 있었다.

포르노라곤 없던 시절에 혼자만 훔쳐본 여자의 속살은 날마다 나에게 달콤한 환영으로 다가왔다.
더구다나 엄마 없이 자란 나로서야 여자의 풍만한 젖가슴에 대한 진저리처지는 향수가 있었기에 그 날의 감격은 너무도 짙게 나를 달구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머리를 쳐박고 누웠다. 얼른 거리는 여신의 침상 모습이 소년의 강에 계속 돌팔매질하면 물파문은 주체할 수 없는 욕망으로 퍼져나가 온통 바다가 풍랑인데 난 그녀의 이름을 신음처럼 부르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 하면 한번이라도 그녀를 안아 볼 수 있을까? 둥근 동산에 내 손을 얹어 볼 수 있을까? 궁리해 보았지만 해답이 없는 밤을 꼴딱세울 뿐이었다.
밥맛도 없고 그저 충동적인 가슴에서 이글거리는 사춘의 활화산 때문에 공부는 물론이거니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조차 싫었다.

날마다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난 빵가게로 갔다.

“어, 이제 끝났니?”
“예, 할 일 없어요?“
“응, 우선 저기 앉아 빵하나 줄께..”
“아네요. 배 안고파요..”
“그래, 민아 오면 같이 먹을래..?”
“예”

오늘은 그녀가 초록색 스커트에 붉은색 브라우스를 입었다. 너무도 곱다. 그녀의 종아리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슬금슬금 훔쳐보는 나를 그가 눈치 챘을까..

“응, 왜 뭐가 이상해?”

나는 얼른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녀요. 그냥 옷이 멋있어서요..”
“그래, 괜찮아 ■■ 옷볼줄 아네..”

내가 피식 웃고 그녀도 검연쩍게 웃는다.
어제 낮의 침상 화면이 그녀의 엉덩이를 따라 간다. 정말 정말 탐난다 만져보고 싶다 그지...

이럴즈음 민아가 들어 온다. 친구들과 놀다 오는 건가.. 눈자위에 엄마의 모습이 박혀 있다.

6.

민아가 4학년이 되고 난 중3이 되었다.

1년 넘도록 난 빵가게를 열심히 도왔다. 크고 작은 심부름은 물론 힘든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기야 덩치는 클대로 컷으니 웬만한 일을 하는데는 힘이 부치지 않았다. 벽에 못을 박거나 형광등을 갈거나 민아네 집 하수구를 파헤치고 막힌곳을 뚫는 것까지도 난 서슴없이 해 치웠다.

“어때? 나를 아줌마라고 부르는게 좋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게 좋겠어?”

그녀가 갑자기 그렇게 물었다.
다른 이름...다른 이름이라면 무엇이 좋을까...

“엄마가 일찍 돌아 가셨다지?”
“예, 얼굴도 몰라요. 저 낳고 바로..”
“딱해라..할머니한테 잘해야겠다. 은혜 잊지마 알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아는 어디를 갔는지 없고 이제 조금 있으면 문을 닫는 시간이다.
문을 닫으면 그녀와 같이 못있어 아쉽다

“저... 나를 이모라고 부르면 어떨까?”
“네..? 이모..”
“그래, 그래야 좀더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
“예에...”

이모라는 단어가 아줌마 보다는 더욱 다감해 보이기는 하지만 별로 내키지는 않았다. 다만 다른 특별한 호칭도 없으므로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이렇게 해서 나의 이모가 되었고 생활 속에 너무도 깊이 뿌리 내린 그녀에 대한 동경은 나의 소원이 되었다.
 
연상의 여인을 사랑한 책들도 사보고 그런 얘기들을 찾아 보기도 하고 주위에서도 연상의 여인과 사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얻은 결론은 어서 자라서 그녀와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당하게 사랑을 고백해야지...그리고 멋지고 행복하게 해 주는거야..
환상에 젖은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나를 더욱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손도 스스럼 없이 잡아주고 가끔 안아주기도 하고 귀엽다고 의젖하다며 칭찬도 해주고 자신의 보디가드처럼 불러 주기도 했다. 그럴수록 그녀에 대한 나의 연민은 신앙이 되어 가는데...

7

일요일 아침 난 여느날과 같이 빵집앞으로 갔다. 그런데 문이 닫혀 있다.
17일도 아닌데..문이 닫혀 있다니..무슨일일까?
나의 발걸음은 자동으로 민아네 집으로 가고 있었고. 걸어가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몸이 아픈건가....

대문을 열고 들어 섰다. 인기척이 있는 것 같은데...

“계세요!”

대답이 들리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평상시 목소리는 아니다.
마루를 올라서 윗방을 보니 그녀가 머리를 싸매고 누워 있다.

“왜 그래요 ?”
“응, 몸살인가봐..저기 요 앞 약방에 가서 쌍화탕하고 몸살 약좀 지어다 줄래?”
“예, 그런데 민아는 어디 갔어요?”
“응, 신안동 할머니 댁에 갔지 어제..”

괴로워하는 그녀를 보며 얼른 약을 사와야겠다고 나서는데 그녀가 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돈 가져 가야지..”
“아 저 있어요”

난 달음질쳤다.
약방에서 자세히 설명을 하고 약을 샀다. 그리고 쌍화탕을 식지않게 가슴속에 품고 되돌아 걸었다.
쌍화탕 열기가 따끈거린다.
그려, 혼자몸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장사를 하다보니 아플만도 하지...
어서 자라서 그녀를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나를 더욱 빨리 달리게 했다.

“여기요, 어서 드세요..”
“그래, 고마워 나좀 일으켜줘”

나는 망설였다. 그녀를 안아서 일으켜 세우라는 말이기에 환자라는 생각보다 여자라는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나 보았다.

“자, 머리를 조금만..”
“예..”

누운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힘을 준다. 몸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뜨건 그녀의 체온이 내 전신으로 전도 되었다. 이럴수가 있었구나. 정말 처음이었다. 그녀를 안아보고 싶던 꿈이 이렇게 이루어지다니..

“왜? 내가 무거워? 손이 떨리는 것 같네...”

그녀가 내 속내를 알아차렸나 아픈 중에도 검연쩍게 웃고 있었다.

“아뇨, 아프다기에 하도 놀래서 그런거봐요...”

난 그렇게 변명했지만 다음에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저, 약 좀 줘바.”

나는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리고 약과 쌍화탕을 따서 턱에 바쳤다.
그녀가 입을 벌리고 있다. 나는 얼떨결에 조제약을 그녀의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쌍화탕을 입에 물렸다. 그녀가 마신다. 내 팔에 기댄 그녀의 체온 탓인지 심장이 쿵쾅대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안왔으면 큰일 날뻔했네. 어제 저녁부터 계속 잠만 잤잖아. 가위도 눌리고 온몸이 쑤셔서 죽을뻔 했어”
“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녀의 눈빛이 정말 고마운 빛이다.

“누우세요..”
“응...알았어. 살갗까지 다 아프네. 몸살 이렇게 지독하게 걸리기는 첨이야.. 몸이 약해졌나봐..”

나는 엉거주춤 하고 있었다.
그녀가 상을 찌그린다. 그리고 몸을 뒤척이면서 신음을 낸다. 온몸이 쑤시고 아픈 모양이다.

“좀, 주물러 드릴까요?”

나는 불쑥 그렇게 말했다. 몸살난 사람들을 치료할 때 주물러 주는걸 보아 왔기 때문인 것 같았다.

“미안해서...괜찮을까...”
“아녀요. 이렇게 누워 보세요...”

나는 그녀의 다리서부터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 시원해! 아이고 아이고..”

내 손이 닿을 때마다 그녀가 신음소리를 냈다. 온몸이 쑤시는 모양이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환자를 두고 미친짓이겠지만 그 때의 나로서는 그런 것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음!”

 내 입에서 신음 같은게 나왔다. 아무리 참으려 했지만 입밖으로 나오는 신음소리 때문에 너무도 긴장이 됐다. 그녀가 양팔을 벌린다.
팔다리 몸까지 그녀는 모든데를 내게 맡겼다. 나는 떨림을 최대한 억제하며 그짓(?)을 즐기고 있었다.

“됐어..그만해”

식은땀이 난 것인가 등줄기에 땀이 흠뻑 젖었나보다.

“저기 식탁에 빵 있어 가져와봐 나하고 같이 먹자 응”
“예...”

약기운에 좀 회복되었는지 그녀가 먹을 것을 찾았다.
나와 그녀는 마주 앉았다.

“자, 내가 먹여줄까? 아 해!”

그녀가 빵 한조각을 찍어서 내 입에 댄다.
얼떨결에 입을 벌렸다.

“착하기도 하지. 올해 몇살이라고 했지. 다 컷네 이제 어른 같아...”
“.......”
“내가 뭐 해줄거 없어?”
“네?”

그녀의 눈속에 우수가 서려 있는것처럼 느껴졌다.

“뭐든지 해주고 싶어. 언제든지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다 해줄께”

그녀가 갑자기 귀엽다는 듯 내 볼에 연지를 찍었다.
너무 당황한 난 그냥 얼어 붙었다.
넋 나간 나를 그녀가 잡아당긴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를 내 이마에 대고 부벼댄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은혜를 뭘로 갚나..”

그녀의 음성에 눈물이 석여 있는걸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얼떨결에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정말 황홀한 간호였다. 잊지 못할 병간호였다. 그녀의 몸살이 나에게는 정말 큰 행운이었다.

그녀가 기운을 차렸는지 이불을 걷고 일어서려 한다. 나는 얼른 그를 일으켜 세웠다.
나를 잡고 일어난 그녀는 아마도 화장실로 가려는가 보았다. 나는 그녀를 부축했다.
움직일때마다 그녀의 젖살이 나에게 살짝살짝 닿았다. 정말 다시 말하지만 그녀의 몸살병은 나를 더욱 뜨겁게 연모의 모닥불 속으로 집어 넣고 있었다.  

8.

그녀에 대한 나의 충성(?)은 끝이 없었나보다.
시키는 일 모두가 즐거웠고 당연히 해 주어야 하는 보호자 같은 의무감이 나를 뿌듯하게 했다.

"술 먹을줄 알아?"
"네.."
"그 나이면 술 한잔 해도 되지 뭐.."
"그렇지만..."

그녀가 언제 준비 되었는지 모를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낸다.
거품이 곱다. 친구들과 종종 술을 마셔보긴 했지만 아무래도 친구와 마시는 술과는 차원이 다른, 말하자면 긴장감이 고조된 그런 술자리인지라 내 행동이 어줍었던 모양이다.

“자, 한잔 받아. 왜그래? 어디 불편해? ”
“아뇨, 제가 먼저 드릴까요?”
“아냐.. 남자잖아 남자가 먼저 받아야지..”

그라스에 가득 술을 부어주는 그녀의 손이 정말 정스럽게 가슴을 두드린다. 나도 한잔을 그에게 따르었다. 거품이 솜처럼 불어 올랐다가는 가라 앉는다.

“자, 한잔 해, 이제 문도 닫았으니 우리 시간이잖아 시원하게 한잔 마셔.”

오래된 술친구처럼 우린 잔을 부딪쳤다. 술을 마시니 어른이 된 것 같기도하고..
그녀의 얼굴이 고와진다. 사과빛으로 변하는 그녀의 볼과 강바닥의 수석같은 눈동자와 깜박거리는 눈썹,우수에 찬 입술과 머리카락...

“뭔가 내게 하고 싶은거 있으면 해. 다 들어줄께  응?”

두어잔을 비우고 난 그녀의 표정에서 긴장이 좀 풀린 것이 감지 된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면 별말이 있으랴만 그렇다고 함부로 속내를 들어 낼 처지도 아니고 잘못했다가 그녀가 나를 나쁜 사람으로 취급할 것 같아 난 조심하고 있었다.

“응, 술이 다 됐나..기왕 마신거 좀 더 마시지 뭐...”
 
그녀가 냉장고 문을 연다.

“어, 맥주가 없네. 어때, 와인은 안되겠지?”

그녀가 나의 의향을 물었다.

“아무거나요. 전 몰라요 술..”

그녀는 양주를 내 왔다. 아까보다 좀더 요염해진 모습으로, 아니 어쩌면 내 눈이 그렇게 바라보았는지 모르지만 그녀가 좀더 매혹적인 미소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옷이 자꾸 흘러 내릴 것 같은 긴장감이 가슴을 강하게 압박 했다. 

“이 술이 뭐예요?”
“응, 엊그제 나 아는 선생님이 같이 먹자고 가지고 온건데....”
“왜 안마셨어요?”
“먹기 싫어서..”

먹기 싫었다면...
그럼 왜 나하고 먹는단 말인가....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우린 연거푸 술을 마셨다. 얼음이 녹여주는 양주는 참으로 감미롭지 않은가.
아, 양주가 이런 술이구나...

술이 술술 넘어 간다. 마음이 슬슬 쓰러지나 보다. 말해 버릴까? 내 속마음을 애린 마음을 이럴 때 고백해야하는 것 아닌가...재고 또재면서 난 술을 넘긴다.
만개한 여인과 단둘이 마시는 술은 쉽게 절제력이 없는 나이의 나를 긴장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게 했다. 술기운이 높아진 그녀의 몸이 열을 내나 보았다.

“나, 옷좀 벗어도 되지.”
 
그녀의 숨겨진 고운 살빛이 나를 충동질 했지만 나는 동요하지 않으려 어금니를 깨물었고 그럴때마다 진부한 곳에서는 부도덕한(?) 상징이 억지를 쓰며 반항하고 있었다. 워낙 살에 민감한 나이인데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그녀와 단둘이 앉아서 불같은 술을 마셨으니 어쩌랴...

“자, 기왕 마신거 한잔 더해..더..더!”

나도 그녀를 따라 술을 마실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 술을 마시는 걸 일찍이 본적이 없었고 나도 이렇게 술을 마신 경험은 더욱이 없었다. 그러나 우린 오래된 연인처럼 술잔을 부딪쳤다.

밤은 깊어지고 술기운도 깊어지고 그녀의 혀가 점차 말리는 것 같았다.

“나, 나 외로워...나 어떻게 해야돼?”

왜 이럴까? 나보고 무엇을 어찌하라는 걸까? 난 그냥 다소곳이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자, 한잔 더줘..”
“그만 하세요 이모!”

그녀를 이모라고 호칭하라고 한 이후 처음으로 난 그녀를 진지하게 이모라고 불렀다. 아마도 술로 인한 그녀의 자태가 깨지는 것을 막아 보려는 내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녀가 결국 탁자에 머리를 대고 자세를 흩뜨리고 말았다. 왜 그녀가 술에 먹혔는지 난 모른다. 다만 그녀가 외로움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를 흔들어 봤지만 제정신으로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찌할까..그래....

난 그녀를 업었다. 더 이상 그녀의 자태가 흐트러지는걸 보기 싫었다. 행여 나의 신앙같은 그녀에게 추한 모습이라도 보여질까봐 걱정이 되었다. 환상에 금이가고 그녀의 허물어짐은 정녕 나에겐 슬픔이 될 것 같았다. 지켜 줘야지...난 그렇게 다짐하면서...

그녀를 업은 나는 거리로 나섰다. 택시를 탓으면 좋으련만 뜻대로 차는 와주지 않고...
결국 난 소망하던 그녀를 그렇게 업고 가기로 했다. 그녀가 술김에 내 목을 감는다. 나는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거리가 어두워진다 비가 오려나...정말이었다 빗방울이 한방울 툭 나의 머리에 떨어진다.
나는 업은 애를 추슬리듯 그녀를 추슬렸다.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내 몸을 점령하여 온다.

그녀의 집까지 가면서 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그녀를 방에다 눕히고 베개를 받쳐주 고 이불을 내려 덮어주고 물 한 그릇을 떠다가 머리 위에 놓고는 집으로 돌아 왔다. 그녀의 집 대문을 나오면서 바라본 하늘에는 구름이 웅크리고 좀전보다 더 굵어진 빗방울이 가로등 불빛 아래로 살같이 내려 떨어지는데 미련같은 발자국 속에 술기운인지 모를 그녀의 몽울한 살냄새가 연민으로 살아 나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 가슴이 짠한 시간이었다. 별이 나를 무어라 부를까....

9
이발소에서 머리를 깍으며 그녀를 생각한다.
그녀는 가끔 내 까까 머리를 만진다. 그 순간의 미소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지만 싫지는 않다.

“머리 언제 길러..머리 기르면 징그럽겠네 ■■”
“뭐가 징그러워요?”
“그냥...지금이 좋다는 얘기지 ■■.”
“전 싫어요. 어른이 되고 싶어요. ”

반짝이는 머리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 오늘 길에 빵집을 쳐다보니 그녀와 낮선 남자가 앉아 있다.
누굴까? 낮선 얼굴인데....
가던 발길을 돌려 가게 앞으로 가고 있었다. 그냥 들어 갈까 생각도 했지만 남자의 정체를 알고 싶어 몸을 비켜 안을 살폈다.

다정해 보이는 두사람. 남자의 나이는 그녀보다 좀은 더 먹은 것 같았고 멀리서 보아도 남자의 외모가 헨섬하고 지적으로 느껴졌다.
한참 얘기를 나누고 남자가 밖으로 나온다. 후리후리한 키에 까만 신사정장이 잘 어울린다.
검정색 승용차를 타고 떠나는 남자의 등뒤로 손을 흔드는 그녀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가득하다.
누굴까? 저렇게 만족한 얼굴을 본적은 일찍이 없었는데...

나는 어슬렁 어슬렁 빵집문을 열고 새침하게 들어 섰다.

“누구예요?”

그녀가 흠칫 놀라는 것같기도 하였지만 그건 내 탓이라고 느껴졌다.

“응, 오빠...”
“오빠요. 어디 사는데요?”

나의 말이 거칠어졌는가 그녀가 좀 당황한 모습으로 날 바라본다.

“응, 천안 살지...건설회사 한데..”
“뭐하러 왔어요? 왜 왔어요?”

그녀가 픽 웃었다.

“왜그래 그냥 나 보러 왔지...앉아.. 머리 깍았네...”

그녀가 나를 끌어 앉힌다. 그리고 박박머리를 어루 만지며 말한다.

“이번 일요일날 나하고 같이 어디좀 갈래?”
“어디요?”
“가보면 알아..”
“누구누구 가죠?...”
“나하고 둘이지 또 누가 있어..“
“네....그런데...”

어디를 왜 가는지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둘이 간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할까?

“가게는 어떡하죠?”
“응, 하루 닫지 뭐..”

나는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일요일이라면 3일후가 아닌가..
나는 가슴의 휘파람을 불었다. 꿈이 꿈이 꿈이 가슴에서 아름답다 아름답다 창화하고 있었다.

“그날 10시에 신흥동 버스타는데 있지...그리로 나와...”
“근데 뭘 입고 가죠 옷이 별론데...”
“응, 그거..그냥와 아무거나 입어도 돼.......“

옷이 귀한 시절이기도 하거니와 우리 새 엄마는 나에 대해 관심은 눈꼽만큼도 없고 더욱이 아버지와 가게에서 먹고자고 하여 얼굴 보기도 힘들었으므로 늘 할머니가 사다주는 시대에 뒤떨어진 최소한의 옷을 입어야 하는 나로선 나들이 옷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날부터 난 많은 꿈을 꾸었다. 일요일에 다가올 그녀와의 여행에 대한 꿈을 덧없이 꾸었던 것이다. 정말 꿈은 즐거운 것이고 더욱이 오르지 못할 나무같은 그녀와의 여행이라는 횡재(?)에의 기대는 구름을 나는 기분이랄까 하늘이 거기 있었다. 

10

“어딜 가는거예요?”
“가보면 알아. 내가 가면서 알려줄께..”

신흥동 버스정류장에서 그녀와 난 속리산행 버스를 탓다. 그 당시의 가장 빠른 교통수단인 직행버스는 참으로 의자도 편하고 창밖을 보기에도 불편함이 없는 고급 버스가 아닌가.
빈좌석이 대여섯개 보였다. 나를 창쪽으로 앉힌 그녀의 표정은 애매모호하다. 연록색 스커트에 하얀 블라우스가 찰랑거리는데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청초함까지 곁들여 나를 아지랑이 속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어디 가는지 궁금하지?”
“네..도깨비에 홀린 것 같아요^^”
“그래, 내가 도깨비잖아^^”
“속리산에 가는거예요? 차가 속리산 가는 차네요..”
“응, 속리산쪽으로 가는거야...”

옥천을 지난다. 보은 쪽으로 접어들어 옥천 구읍을 지나면 2차선 도로가 뱀모양으로 꿈틀거린다.
옥수수 수염이 붉은색을 띄고 고구마 넝쿨이 온통 밭을 덮고 있어 참으로 싱싱하다. 길옆에 참외를 파는 원두막들이 장사준비를 하나보다.

우리 아버지의 고향은 화령이라는 곳이다. 보은에서 80여리 쯤 되는 조그만 면소재이다. 5일장이 서던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몇 번 가본적이 있는데, 그때 이 길로 버스를 타고 갔던 기억이 있었다.

“얼굴이 붉어졌네...”
“네..그래요. 너무 좋아서 그런가봐요...”

그녀가 내 무릎에 손을 얹는다. 옴 몸의 피가 속도를 내니 열이 올랐다. 내게 너무도 기겁할 일이니 그럴만도 하지. 난 창 밖을 주시하는척 했지만 모든 신경이 그녀의 손쪽에 가 있었다.

“나, 좀 기대도 돼지..?”

나는 아무말도 안했다. 그녀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후~ 몸이 타올라 승천(?) 할 것 같았다.

“피곤하신가봐요?”

난 그렇게 물었지만 그녀는 기댄체 얇은 미소만 짓는다.

“저기 보이지. 저 산 말야. 아니 이 고개...이 고개가 문티재라는 고개야....”
“네...”
“이 고개에는 추억이 많지...”
“무슨 추억이요?“
“응, 추억이 많아. 벚찌의 추억이라고 할까...”
“..........”

이내 버스가 재를 넘는다. 그리고 금새 보은읍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린다.

“화장실 안가?”
“네...가야죠”

보은읍내 정류장에 버스가 서자 난 달구어진 몸을 식히려는 듯 얼른 화장실로 갔다. 그녀는 그녀대로 난 나대로 화장실로 각각 들어갔다. 갑자기 휴 하고 한숨이 나왔다. 아직도 몸 구석구석에 그녀의 체온이 남아 혼미한 육신이 끈적거린다.

“속리산은 왜 가는걸까?”

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화장실 창 밖을 보는 몸이 진저리를 쳤다. 아마도 내 뇌속에 잔영으로 남은 그녀의 스커트 아래 하얗고 긴 다리 때문인도 모를 일이었다. 사람들은 정말 좋을 때 몸을 부르르 떨지 않던가...

“자, 어서 오세요 바로 출발 합니다.”

보은읍내에서 사람들이 거반 내리고 버스는 헐렁했다.

“배고프지 않어?”
“네..아뇨..”
“좀만 기다려 말티고개 날망에 가면 장사꾼이 있으니까 거기 가서 커피도 먹고 간식좀 사먹자 응...”
“네...맘대로 하세요“

버스가 움직여 종점지를 향해 간다. 이내 그녀가 말하는 말티고개로 향하는 모양이다. 설레임이 가득한 그녀가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창밖의 펼쳐지는 풍경과 건물들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
여기가 아마도 그녀의 고향인듯도 하고...아니면...

이윽고 말티재라는 안내표지판이 서 있다.
오르막길을 오르니 작은 저수지가 거기 있다. 낚시꾼도 없고 배도 없는 한적한 호수의 중간으로 다리가 있고 그 다리를 지나면 꼬불꼬불한 고개가 나온다. 이 고개가 바로 법주사로 들어가는 말티재라고 그녀가 일러 주었다.

열두구비를 돌아 정상에 오르니 아래로 관목숲이 구름처럼 널려 있고 그 가운데 2차선 도로가 가지런히그림처럼 나 있다. 우린 정상에서 내렸다.

“여기서부터 걸어서 가면 좋아”
“네....”

어디를 가느냐 무엇하러 가는냐 누구에게 가느냐 묻지 않기로 했었고 더욱이 그녀와 둘이라면 아무 곳이면 어떻겠는가. 미리 알아 버려 꿈이 깨질양이라면 그저 그녀가 이끄는대로 가는거지

예상대로 커피를 파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좌판에 함께 놓여 있는 찐빵이 더없이 먹음직 스러웠다.

“찐빵 먹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찐빵을 푸짐하게 산다.

“자, 이리와 앉아”

그녀와 난 벤치에 마주 앉았다. 김이 모락거리는 찐빵을 그녀의 예쁜손이 꺼낸다. 뜨거움을 이기려 손을 호호불다가 빵을 내 입에 댄다.

“먼저 드세요.“
“남자잖아..한입 먹어..”

나는 할 수 없이 빵을 물어 땠다. 그녀가 아주 정답게 웃는다. 그리고 남은 반쪽을 자기 입으로 가져가 입안으로 다 넣고는 참 정겨운 표정을 짓는다.

‘참 이상하네..도깨비에 홀렸나..여우에 홀렸나...’

난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말 예쁜 여우가 내 앞에 그렇게 꼬리를 치고 있는 것 같았다.

11
 
그녀가 내손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 반보 앞서 걷기 시작한다. 대체 가는데가 어디야?

흑담초가들이 고즈넉이 도란도란 둘러 앉은 마을앞을 지난다. 담배 건조실이 보이고 어미소와 장난을 치는 송아지도 보인다. 달구새끼 모래목욕 감고 낮선 우리를 보았을까 개짖는 소리 산메아리를 일으키는데...

“이 동네 이름이 갈목이야”
“예~...“
“이 동네에 내가 좋아하던 영선이라는 오빠가 살았었어..”

그녀가 어떤 남자를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길이 점점 좁아지기 시작하면서 길바닥의 황토색이 더욱 짙어진다.
알 수 없는 산새소리를 들으며 정말 어디로 가는줄도 모르고 그녀의 손을 이끌리어 고개를 넘는다 싶으면 작은 개울이 있고...

잡은 손에 땀이 촉촉하다. 좀은 가라 앉았지만 아직도 그녀가 주는 열기로 몸이 욕망의 풍선으로 사뭇 팽창되어 있다.

“저기 저수지 보이지..”
“아, 호수잖아요...”
“충북에서 2번째로 큰 저수지야.”
“이름은요?“
“삼가저수지..”
“삼가..뭘 삼가라는건가요? ■■”
“웃기는 소리도 할줄아네^^ 동네이름이 삼가리야..”
“아..네...“
두손잡고 타박타박 걷는 산길에 밟히는 질경이와 길옆으로 늘어선 망초꽃. 하늘을 가리고 선 교목들의 틈새에서 피어난 이름모를 잡풀들...

“어때, 이런 숲속길 처음이지?”
“예 정말 시원하고 공기가 참 좋네요”
“여자랑 사랑해봤어?”

갑자기 그녀가 그렇게 물었다. 난 머리를 저었다.

“아직 숙맥이네 ■■”
“...”

우린 마주보고 웃었다. 그녀의 하얀치아가 수목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살짝받아 진한 쇼크를 일으키고 있었다. 안아주고 싶었다. 아니 안아보고 싶었다. 참으로 오랜 시간동안의 꿈을 이루고 싶었다.

호수는 정말 너르다. 둘레가 30리라고 했다. 바람이 물을 간질이면 부채살처럼 퍼지는 파문의 미소위에 물잠자리 암수가 서로를 껴안고 유희를 하고 소금쟁이 물가에서 소금을 파는지 분주하고 그녀의 말에 의하면 이 호수에는 짚단 보다도 큰 잉어가 있는가하면 저수지를 지키는 열두발 길이의 용이 산다는데.....

그녀의 연녹색 스커트가 나폴거리고 산도 물도 다 푸른데 나의 마음만 붉어 낭만의 길을 간다.

“우리 달려볼까..나 잡아봐 영화처럼..”
“그러세요 달리세요 제가 따라잡을께요..”

그녀가 앞서 달린다. 왜 그녀는 이런짓을 하는걸까...?
내가 그녀를 잡으러 달린다. 소녀처럼 달리는 그를 잡는 것이 너무 아까워 나는 손만 뻗치고 그를 따라 보조를 맞출뿐이었다..

“어서 잡아줘”
“못잡겠네요 ^^”

숨이 차왔다. 그녀도 숨이 차나보다. 나의 손이 그녀를 잡았다. 그녀가 주저 앉는다.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부푼 가슴을 보노라니 용암이 분출될 것같은 불안함에 난 정신을 차리려 머리를흔들었다.

“아!..”

난 풀섶에 벌렁 눕고 말았다.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는 충동을 억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자 조금만 더가면 돼 어서 일어나”

그녀가 나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 우리는 다시 길을 제촉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지....

12

<털보농장 입구>

판대기에 그렇게 써 있었다. 이런 산골에서 농장을 하는 사람이 있구나. 아무래도 주인은 털복숭이이고 엄청 마음이 좋은 아저씨겠지.
그녀와 난 계곡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 간다.

“다 왔어. 힘들지?”
“아뇨. 좋아요. 너무 좋아요”
“뭐가 그리 좋아..?”
“그냥요..아주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네..”
“뭐, 살아..누구하고...?”

나는 검지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그녀가 눈을 휘둥그래 뜨는 시늉을 하며 하얗게 웃었다.
그렇다. 이렇게 깊은 산골에서 그녀와 둘이 살 수만 있다면 그보다 행복할 수 있을까만 그건 어림없는 꿈일뿐인걸...

점점 수목이 울창해진다. 나뭇잎으로 가리워진 숲이 어둠 침침할 정도다. 신선하고 고운 바람이 풀섶에서 나오고 전나무, 소나무, 낙엽송, 떡갈나무, 오리나무, 아카시아, 얼키설키 조화를 이루고 싸리나무에 진분홍 꽃이 초롱초롱 달려 있었다.

“자, 다왔어. 저기 집하나 보이지?”
“예..빈집 같네요”

그녀를 따라 난 그집 앞에 섰다.
여기저기 추억의 흔적들을 찾는 모양이다. 그녀의 눈망울이 슬퍼지기 시작하는걸 느낄수 있었다.
허물어진 돌담으락, 페허된 빈집의 문짝들.. 금새 살쾡이라도 나올 것 같은 음산함..
이집은 누구의 집이란 말인가....

“이리와”

그녀가 집 뒤로 돌아 걸어 올라간다. 그곳에는 작은 무덤하나가 있었다. 어떤 무덤일까?
정말 구미호에 홀린 것 같기도 했지만 그녀가 구미호라도 난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녀의 다음을 주시했다.

조용히 그녀가 그 묘앞에 앉았다. 그리고 언제 준비했는지 북어포 하나와 잔 그리고 소주병을 꺼낸다.
나는 얼른 소주병을 땃다. 그녀는 잔을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잔을 채웠다.
그녀는 부어진 술을 묘에다 뿌리고 난뒤 세 번 절을 한다. 나는 그저 멍하니 그녀와 나란히 허름한 봉분을 향해 서 있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그 묘는 요절한 그 여자 남편의 묘였다. 그 여자의  남편은 결혼후 1년만에 죽었단다. 서라벌 예고를 졸업하고 야생화라는 동인으로 활동하며 잡지사를 운영하던 당시 문단에서 촉망받는 시인이며 사업가였단다. 어느날 그녀의 남편은 머리가 아프다며 일찍 집에 들어 왔는데 방에 눕자마자 숨을 몰아쉬더니 손쓸사이도 없이 숨이 멎고 세상을 하직하였다고 했다. 참으로 인간 생명의 덧없음이라고 할까...
한동안 미친 사람 같던 그녀는 유복자인 민아를 낳았고 얼마간의 격동기를 수습한후 생계를 꾸릴 수단으로 빵집을 시작한 것이었다.
 
“자, 가자 이제 됐어. 오늘이 이이 제삿날이야. 이제 안올거야. 다시는 안올거야...가자, 응”
“...”

난 슬퍼하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무슨말을 해야 할까? 그런말을 끌어낼만한 지혜도 없었고 나이도 아니었던 나는 그냥 그여자의 뒤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눈가가 젖었던 그녀의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무언가 작심한 사람처럼 그녀는 슬픔을 떨구어 내려는 듯 모습을 정리(?)하며 행동이 자연스러워 지고 있었다.

“우리 이제 천천히 가자. 가면서 쉬고 쉬다가 가자. 못가면 내일가자 응?”
“네..”
“저기좀 봐 저수지 물잠자리 아직도 짝짓기하고 있네...”

올라갈 때 본 그 잠자리인지는 몰라도 까만 물잠자리가 쌍쌍놀이를 계속하고 있었다.
우리는 호수가를 따라 길을 되짚어 걷기 시작했다. 청정지대 풀벌레 소리와 새소리가 어우러졌는데 초록햇살은 숲속 바람을 가끔씩 일으켜 춤을 추고 난 그녀의 노예처럼 조심스럽게 따라가고 있었다 가슴은 덧없는 기다림으로 가득한채.... 

12

햇살이 좀 식나보았다. 산그림자가 커지기 시작하고 나뭇잎새의 바람이 차분해지기시작한다.
이제 우리의 발길은 그녀가 오빠라고 말하는 남자가 살았다던 산골 마을 갈목리를 지나고 있었다.

“잠깐! 저기 저 나무 아래서 쉬어서 가자.”
“네, 힘드신 것 같네요..”
“아냐, 힘든건 아니고 하루종일 걸었더니 발이 좀 아프네..”

그녀와 난 나란히 나무그늘 아래 돌판에 걸터 앉았다. 그녀가 사방을 살핀다.

“저 앞좀봐... 비구니 산골이라고 저 봉오리 어때 바구니 머리 같지 않아?”
“네, 비구니라면 여자중 아니예요?”
“그렇지..여자 스님을 비구니라고 하잖아...”
“그러네요..그러고보니 그러네요”
“저 봉우리 밑에 가면 정말 근사한데가 있는데 보고 갈까....”
“좋을대로 하세요. 얼마나 좋은 곳인지 보고 싶네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음, 그전에 거기서 많이 놀았어.....”

남편과 왔었는지 아니면 영선이라는 오빠와 왔었는지는 친구들과 얼려 놀았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정말 그녀의 눈망울 속에 설레임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비구니봉 밑에 있다는 그 좋은데로 향해 가고 호기심이 목까지 찬 나도 따라간다. 정말 어떤 곳이길래...

그녀의 녹색치마는 하루종일 걸은 탓에 풀이 죽었고 하얀색 불라우스는 땀에 촉촉하다. 익을대로 익은 그녀의 몸매나 아무도 없는 첩첩산중에 단둘이라는 것 말고도 고이 간직한 그녀에 대한 욕망이 분출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고, 부풀대로 부픈 나의 여린 근성은 깨질 듯 깨질 듯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고 있었다. 

오르막이 그친다. 평지가 곧 나타날 것 같았다.
앞서가던 그녀가 갑자기 감격에 찬 목소리로 앞에 펼쳐진 평원을 향해 소리쳤다.

“야호!”

메아리가 돌아와 누구를 부르는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 하다.
나도 따라서 소리를 질렀다.

“야호!”

그녀가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 달렸다. 제주도의 어느 분지처럼 수천평은 됨직한 초원이 아득히 펼쳐져 있지 않은가. 풀의 바다..초원의 향연이 거기 있었다. 세상의 풀들이 모두 모여 있는 듯 했다.
그녀도 나도 감격했나보다. 그녀는 추억 때문이고 난 초원에 단둘이 서 있는 감동때문이겠지...

이렇게 이토록 너르고 푸르고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원시의 풀밭이 있다니..
복원된 에덴 동산이란 말인가..아니면 하늘 선녀가 내려와 춤을 추는 왈츠의 무대란 말인가....

그녀도 나도 괴성을 질렀다. 가슴이 터지도록... 제비처럼 날개를 펴고 날아갈 듯이 달렸다. 그녀의 스커트가 날개처럼 흩날린다. 어느샌가 그녀가 신발을 벗어 던지고 맨발이 되어 있었다. 나도 운동화를 벗어 하늘 높이 던져 버렸다.

“오오오 우우우 아아아 야호호!”
“빨리와 나좀 잡아줘 어서 나 너무 좋아 미치겠어 어서와 나좀 잡아줘 나좀...”

나는 세차게 달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나꾸어 챘다. 그리고 돌았다. 빙빙 돌았다. 신나게 돌았다.
미친 사람처럼 실없이 웃었다. 무엇이 어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잠자리처럼 돌았다. 고추잠자리가 되었다. 자연의 숭고함 앞에서 난 그녀의 소녀됨을 보았다. 티없는 소녀의 되돌림을 난 거기서 보았다. 순수한 가슴을 보았다. 소녀가 된 그녀는 나의 짝이기에 충분할 것 같았다. 세상의 번민을 벗어던진 한 쌍의 나비가 되고 싶은 순간이었다.

얼마를 돌았을까...돌고 돌고 돌고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머리가 어지럽다. 고추먹고 맴맴 담배먹고 맴맴 노래가 생각 났다.
그녀가 먼저 쓰러진다 그리고 나도 쓰러졌다. 우린 손을 놓지 않았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이 바람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고 있구나...우린 한동안 그렇게 꼼짝안고 누운체 손으로 체온을 음미하고 있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 사이에 나타난 것은 뱀이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과실을 누가 따먹지 말라고 하더냐 하와여!“
“하나님이 그랬지요”
“무슨 소리, 하나님이 그걸 못따먹게 한건 그 실과를 먹는날에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될까봐 그런
 걸 왜 몰라 바보...”

하와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그 금단의 과일을 뚝 땃다.

“나의 남자 아담에게 가져가 같이 먹어야지”

이렇게 해서 우리 인류는 조물주에게 죄를 지었고 지금까지 그 죄값을 치루고 있다는 성경의 내용이 똑같이 내게 적용되려는지 몸이 활화산처럼 요동하기 시작했다.

“우...........”

내 몸이 그녀를 향해 굴렀다. 눈빛이 변했겠지. 광란의 화살이 나를 향해 날아 왔겠지. 점령지를 향해 탱크가 달려가기 시작 했겠지. 폭죽을 터뜨리고 싶어 화약에 불이 붙었겠지. 인공위성 발사대에 카운트다운이 들어 갔겠지. 비둘기가 날겠지 곧...

그녀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가 나의 몸을 당긴다. 손을 벌린다. 나는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손이 내 등을 토닥거린다. 정말 정말 밤마다 꾸어온 꿈이 이루어지려나

“하고 싶은대로 해..맘대로 해도 돼 괜찮아 ”

그녀가 내 귀에 속삭였다.
바람이 분다. 풀잎이 부딪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나를 더욱 끌어 당기고....
나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봇물이 터지려나....산이 해를 먹으려나....
그녀와 난 그날 그 푸른 초원에서 하얗게 되었다. 금단의 열매를 딴 이브가 된 그녀는 나에게 사과를 먹여 주었다. 정말 달콤한 사과였다.

13.

그런 일이 있은 이틀뒤 빵집은 문을 닫고 그녀는 어디론가 쥐도새도 모르게 증발해 버렸다.
나의 하늘과 땅은 모두 암흑이 되었다. 찾아보고 수소문 해보고 여기저기 헤메여 보았지만 아무도 그녀가 간데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청천벽력이었다. 이럴수가...그녀는 어디로, 누구에게로 간걸까?
얼핏 들려오는 소리는 의사의 아내가 되었다느니 빵집을 드나들던 신사와 눈이 맞아 시집을 갔다더라
소위 카더라 말고는 그녀를 찾을 길은 없었다.

살기 싫은 소년, 감격으로 딴 사과를 잃어버린 소년은 충격의 세월을 보냈다. 술을 탐닉하기 시작했고 타락의 늪을 헤메는 나날을 보냈다. 
아무도 내가 왜 그러는지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세상에 늘 외로운 소주병만이 친구가 되 주었다.

그런 세월을 보내기를 얼마였던가. 학생의 신분을 벗어나 이제 새로운 둥지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친구들과 지리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던 길에 난 고속도로 사고로  휠체어를 의지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불행은 늘 설상가상으로 사람을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나 보았다. 지리산에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은 내 다리를 마지막으로 볼수 있는 기록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도 초등학교때 은사님의 인도를 받아 교회에 들어 간 것이 내게는 인생을 다시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어떠한 생명도 하나님의 허락없이 죽는다는건 있을 수 없음도 배웠다.

오늘 난 유라가 없는 공간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이지만 내게 있는 유일한 추억의 향기를 맡으며 그 여자를 일생에 한번이라고 만날수 있도록 해 달라고 늘 기도하지 않았던가. 대다수의 남자는 첫사랑을 그리워 한다던데 나도...

목이 컬컬하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교회는 다니지만 아직 끊지 못한 담배다.
꽃나무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피워진 꽃술들이 향기를 피운다.
화원 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가며 예쁜 꽃들을 쳐다본다. 바라보는 눈동자들이 연민으로 가득차 있다.

유라는 언제오나....
작은 기다림에 담배연기를 내 뿜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이 있다.

“유라 누나 언제와요?”

간판집 아들놈이다. 그를 보니 지나간 날들의 나를 보는 것 같다.
여자에 대한 호기심과 순수한 연정으로 그녀를 따라 다니던 과거의 내가 오늘 다른 이름으로 거기 서 있는게 아닌가. 저 녀석도 그 시절의 나처럼 유라를 연모하고 있는게 분명하다. 밤마다 유라녀를 그리워하겠지. 눈뜨면 유라의 모습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나겠지... 나는 피식 웃었다. 이해가 간다는 웃음이요 그 시절의 추억을 씹은 달콤한 후식과도 같은 웃임인지도 몰랐다.

“야, 너 유라누나 좋아하지..?”
“네?..아저씨...”

그는 검연쩍게 웃었다. 그렇다는 말이겠지.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면 어쩌냐. 너만 손해지..”
“왜요?”

녀석이 모르겠다는 듯 나를 내려다 본다.

“유라 누나가 그렇게 좋으냐?”

녀석이 몸집답지 않게 수줍은 웃음을 짓는다.

그렇고 말고. 사춘기에 연상의 여인을 그리워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라고...
가슴에 품고 홀로 그리워 애를 태우고 상상의 침실에 불러 들여 숨겨둔 사랑을 하지 않은 소년이 있을라고..

담배가 달다. 다시 한모금을 깊게 빨았다. 담배를 끊으라는 구역장님의 권유가 귀에 쟁쟁하다. 그러나 혼자서 있을 때 외로움을 달래주는 담배를 끊는건 몇 번 시도해 봤지만 불가능이다.

녀석이 화원속을 두리번 거린다. 유라가 올때를 기다리나 보다.

“이 나무는 얼마예요?”
“어떤거..아 그거 7만5천원..”

사지도 않을 녀석이 괜히 물어 보는걸 알지만 그라도 말벗이 되주니 심심치 않다.

“요즘 아버지 장사 잘되냐?”
“아뇨, 경기가 없어서 죽쑨대요”
“맞아 죽쑤지..그러면 네가 더 도와 드려야겠구나..”
“네~”

이 꽃 저 꽃을 살피던 그가 금고 앞으로 간다. 그리고 유라가 앉았던 의자에 살며시 주저 앉는다.
혹시 나쁜짓을 하려는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금새 그 생각이 잘못임을 알았다.

“아저씨, 이 사진 누구 사진이예요?”
“무슨 사진?”
“이거요..”
“이리 가져와봐”
“한사람은 유라누나고...”

녀석이 내 손에 사진을 한 장 쥐어 주었다. 나는 사진을 보았다. 사진속엔 세사람의 여자가 박혀 있었다. 어디서 본듯한 얼굴인데.....누굴까....
그래, 누구 같네.. 닮은 여자겠지..나는 뚫어지게 사진을 보았다.

“아저씨 왜그래요..”
“응, 아냐 그냥..”

사진속의 여자는 너무도 그녀, 빵집 여자와 너무 똑 같지 않은가. 좀 늙기는 했지만 그 여자의 모습이 분명하다. 내가 너무 집착해서인가.. 그녀에 대한 환상의 추억을 더듬은 탓인가..난 살을 꼬집었다. 아프다. 분명 꿈은 아닌데....그 뿐인가 옆에 앉은 여자는 어린 시절의 민아를 부풀린 것이 분명하다.

“아니, 이럴수가...정말이라면..설마...내가 너무 진했나...”
 
난 다시 눈을 감았다.
유라의 나이와 그 푸른 초원에서 그녀와 내가 하얗게 되었던 날과의 지나온 세월을 꼽아 본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혹시..그러면..그렇다면...”

나는 머리를 저었다.
세상에는 닮은 사람도 많다지 않는가. 과대망상증에 걸려 사는 나의 인고의 세월탓이겠지...
나는 정신을 차리려 창 밖을 보았다. 사진 들린 손이 심하게 떨고 있었나보다

“사장님 왜그래요. 어디 아프세요?”

간판집 아들 녀석이 놀란 얼굴로 다가와 떨고 사진을 뜰고 떠는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사진이 뭐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을 하였는지 사진을 나꿔챈다. 나는 그 순간 미친 사람처럼 다리도 없는 몸을 일으켜 버등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안돼! 사진 이리줘!”

녀석이 내 행동에 너무 놀랐는지 동그란 눈을 뜨고 사진을 든채 문을 박차고 나가고 있었다.
난 사진을 찾아야 된다는 일념으로 버등거렸다. 사력을 다해 난 녀석을 쫒아가려 했다. 그 순간 내 몸이 휠체어 밖으로 쿵하고 나가 떨어졌다. 내 몸이 나가 떨어진다. 나는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 났다. 그리고 엉겹결에 두손을 모았다. 그리고 이렇게 절규했다.

“하나님,  제발, 한번만 한번만 만나게 해주세요!”

= 끝=
졸작을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또 뵙겠네요. sokny@hanmail.net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