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턴가 남편에게 노안이 왔다. 아마도 곧 돋보기가 상시로 필요할 듯하다. 거기에다 비교적 많던 잠까지 얼마 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직은 잠이 많고 또 아침잠이 유난히 달게 느껴지는 내겐 여간 고역이 아니다.
그런 남편이 이젠 나에 대한 호칭까지 이사람이라고 한다. 이건 완전히 영감을 옆에 둔 것 같다. 나와는 달리 그렇게 까맣기만 하던 남편의 머리도 이제 조금씩 흰머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말했다. 노친네랑 사는 것 같다고...
남편은 허허 웃는다. 그 말을 듣기 좋아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늙으면 꼭 시골 한적한 곳에 가서 살자고 한다. 그냥 생각하기엔 조용한 시골에 가서 한가로이 사는 것이 좋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게 매일매일이다 보면 그렇잖다도 게으른 나로서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싫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동경하는 마음이 생겨난다고도 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했다.
남편이 그 말에 이렇게 답한다.
<자기도 후일 그렇게 조용한 곳에서 다른 문인들과 교류도 하고 지내면 좋지 않겠어?>
헉...
놀랬다. 문인... 다른 문인들? 그렇다면 나도 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뜻?
<문인은 무슨 문인... 몸이 다 오그라든다.> 라고 답했다.
남편은 문인이 따로 있냐며 글을 쓰면 다 문인이지. 라고 했다.
그래... 그렇다면 나, 문인이다. 호호호
조금 호들갑스럽게 웃어주었다.
남편은 내 글을 한줄도 읽지 않지만 그래도 내가 뭔가를 끄적거린다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고 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거 하나는 그래도 고맙다.
사실 내겐 남들이 이해 못하는 면이 하나 있다.
빨리 나이 들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나름대로 많은 마음고생을 겪은데다 머리를 쓰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게으름이 있기에 빨리 늙어 마음이 쉬고싶은 까닭이다.
물론 주위 어르신들을 뵈면 늙어 죽을 때까지 몸과 마음 다 고생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긴 하지만... 내 팔자는 그렇지 않겠지... 하며 혼자 소망한다.
아직은 남편의 생각이 내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실은 그 때문에 나는 속으로 혼자서 여성운동을 한다. 어디까지나 속으로...
언제 쯤에 내가 남편을 꽉 잡고 살 수 있을까?
정말 그런 날이 오기는 하는 걸까?
나는 내가 똑똑인줄 알았는데 결혼하고 살다보니 완전히 헛똑똑이 바보였다.
그래서 꾀를 쓴다.
남편을 구슬러봐야지.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좀 더 나이 들면 나도 좀 내 맘대로 하고 살아야지. 라고 말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니까 라는 말에 남편은 후하게 그러라고 말한다. 그래, 아직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겠지. 하지만, 두고보시라. 나의 변신을...
일단 혼자 여행을 많이 다닐 거라고 했다.
곰국을 끓이면 두려워할 날이 올거라고 우스개 소리 비슷하게 하며 사실은 조금씩 남편을 세뇌시키고 있다.
남편은 세뇌당하는 줄도 모르고 뭐가 좋은지 허허 웃는다.
아마 자기 손에 꽉 쥐여 살고 뭐라고 조금만 소리지르면 꼼짝도 못하는 내게 여유를 부리는 것이리라.
미리미리 이런 말을 귀가 닳도록 해두면 훗날 정말 그렇게 할 때 덜 당황하고 덜 간섭하지않을까? 이건 내 생각이고 희망이다.
때로 나는 궁금하다.
정말 평생토록 남편에게 쥐여 사는 사람이 있는지, 아니면 늙으면 다들 여자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는지...
또 그렇게 내 손아귀에 남편을 넣으려면 어떤 작전을 짜고 행해야하는지...
그것을 나는 배우고싶다.
길을 걷다가 자목련을 보았다.
이뻐도 이뻐도 어찌 저리도 이쁠까... 혼자 연신 탄성을 질렀다.
만개한 벚꽃을 보고는 또 끙끙 앓았다. 우.... 정말 이쁘다. 탁 터진 팝콘 같다. 먹고싶다.
이쁜 꽃일수록 지는 모습은 흉하던데... 샘이 나서 딴지를 걸어본다.
그래도 한때나마 저토록 활짝 펴서 한껏 뽐낼 수 있다면 피고지는 인생 그다지 허무하지 않을 것 같다. 결국은 다시 무한한 부러움의 눈길이다.
난 언제 저렇게 한번 활짝 펴 본 적이나 있었나. 구시렁구시렁...
이래서 봄을 앓나보다
못난 자신 때문에...
에효.
그래 늙어지면 쓰고싶은 글이나 되든 안되든 끄적이며 자연 속에서 뒹굴뒹굴 살아가는 것도 좋겠다. 그게 상팔자다.
다만 남편을 내 손에 꽉 쥐고...
지금은 남편에게 꼼짝 못하는 못난 새가슴 내가 몹시도 억울하다
2005년 4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