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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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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아가는 정 이야기(시집사는 이야기 한토막)


BY 선물 2004-02-27

저희 어머님은 가끔 서울의 시누이 댁으로 가신답니다.
한 번 가시면 일주일 정도는 계시는지라 제게는 가뭄의 단비 만나듯 그 시간들이 달디 달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어머님이 오시기로 하신 그 하루 전날은 저 나름대로의 초비상사태가 되지요.
그런데 그것도 세월이 제법 지나니 조금씩 겁도 없어지고 긴장도 풀려 예전처럼 곳곳에 신경 쓰지는 않게 되더라구요.

얼마 전 어머님이 서울에 가셨다가 돌아오시기 하루 전날이었답니다.
냉장고의 음식들을 정리하고 베란다를 씻어내고 장독도 씻고.. 쓰레기도 일제 정리하고.. 그래도 하느라 했는데...

어머님 오신 첫 날은 기분 좋으셔서 별 탈 없이 지나갔지요.
그런데 다음 날 방에서 아이 공부 봐 주고 있는데 바깥에서 씽크대 물을 있는대로 틀어 놓으시고 혼자서 계속 뭐라뭐라 말씀하시는 거예요.
얼핏 들리기엔 냄비가 왜 이리 많이 나왔느냐, 반찬이 조금 남았으면 작은 그릇에 옮겨 닮을 일이지 그대로 놔두고 먹느냐... 두껑은 왜 짝이 안 맞는 것을 덮어 놓았느냐...
어머님은 힘든 몸 이끄시며 정리를 하시는 중이었지요.
정리 후에 나온 설거지거리를 보니 씽크대 위에 산을 이뤄 놓았네요. 휴....
언짢아 하시는 어머님 앞에 나서기가 싫었지만 일단 한 번 심호흡하고 나름대로 표정관리를 하고 나갑니다.

역시 어머님 잔뜩 굳은 표정으로 이런저런 말씀 하시네요.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어머님, 실은 어머님 오시기 바로 전날 냉장고를 다 뒤집어 정리하고 다른 곳도 정리를 하느라 했는데 워낙 제가 둔하고 꼼꼼하질 못해서 놓치는 게 더 많으네요. 그러니 또 이렇게 혼날 수 밖에요."라고 말씀드렸어요. 물론 배시시 웃음띤 얼굴로..

그랬더니 어머님.
"내가 없을 때는 난리 굿 해 놓고 지내도 내 안보니까 암말 안할게. 그래도 내가 오기전에는 완벽하게 해 둬라. 아무리 잔소리 안하려고 해도 나는 일단 눈에 보이면 불끓듯 속이 타니까 어쩌겠니... 내 성질이 안 좋아도 그게 또 천성인데..."
하시더군요.
그래서 전
"예, 애써볼게요. 그래두요... 끝까지 제 눈에 안 보여서 못하는 건 할 수 없어요. 어쩌겠어요. 안 보이는데 못할 밖에요. 그게 또 제 천성이니 어머님이 부디 이해해주세요. 네? 네? 어머니~~~임"
저희 어머님 한 번 씨익 웃고 마시네요.
첨엔 어머님도, 저도 입 꾹 다물고 속으로만 맘 상했지만 이젠 속내를 다 말씀드리고 이해를 구하니 저도 어머님도 서로를 더 미워할 일은 별로 없네요.

밥그릇, 국그릇 외에는 반찬 그릇 하나 씽크대 위에 있는 것조차 꺼리시는 깔끔하신 어머님.
빈 그릇은 항상 찬장에 넣어두어야 하고 국물이 조금만 줄어도 작은 냄비로 옮겨 놓아야 하고 양말 한짝 안보이면 하루를 소모해서라도 꼭 찾아야 마음이 개운해지시는 시어머니와 세상에 급할 것이라곤 별로 없는 천하태평 며느리가 함께 하루종일 집안에서 부대끼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뻔한 것이지요.

그런데요. 정말 힘든건 누구일까요?
물론 며느리도 무지무지 힘이 들어요.
그러나 낙천적인 며느리는 혼이 나도 금방 잊고 살거나 아니면 잊으려 애를 쓰고 살지만 꼼꼼하신 어머님은 그것을 참아내고 삭히시느라 얼마나 진이 빠지고 힘이 드실지...

그래서 며느리는 어머님께 게으른 며느리가 죽자고 열심히 하려 해도 그 한계가 있으니 부디 어머님을 위해서라도 어머님이 변하시는 것이 좋다고 말씀드렸어요.
16년 세월을 함께 하며 며느리의 진심이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시는 어머님. 조금씩 어머님도 무디어지려고 노력해 주시네요.

알콩달콩, 그리고 때론 토닥거리며 좋은 날, 미운 날 함께 하지만 예전처럼 벼락 같은 날 없고 억장 무너지는 슬픔 없으니 이젠 정말 정도 들고 가족같네요.

그저 사이 좋게 지낼 수만 있다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셨으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