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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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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향기


BY 선물 2003-09-05

꼭 1년 전 쯤 아래층에 살던 건희 엄마는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처음 이사와서 아이들이 쿵쾅거리며 뛸 때 아래 층에 끼칠 실례가 미리 죄송스러워서 이사 떡 한 쟁반을 들고 인사를 갔었다.
"윗 층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인데요.저희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많이 뛸 것 같아 미리 양해를 좀 구하려구요.제가 단속 잘 하고 늘 조심 시키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소란스럽게 해 드릴 지도 모르겠네요."
"아유,아니에요.저희 아이들도 그 또래인걸요.잘 됐네요.사실 저도 아래 층에 죄송한 마음 늘 가지거든요.그래서 그 마음을 잘 아니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그렇게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던 1살 아래의 그녀는 참 친절하고 밝게 보였다.덕분에 편안한 마음이 된 나는 좋은 이웃을 만나게 된 새 둥지가 어느새 푸근해졌다.

한 번은 그녀가 점심식사에 나를 초대하였다.어머님이 서울로 다니러 가셔서 안 계신 날이었다.
그녀는 나를 식탁의자에 앉혀 놓고선 꼼짝도 못하게 하고 그녀만 동동 뛰는 듯한 걸음으로 부지런히 부엌을 누비더니 맥주와 과일을 곁들인 스파게티로 근사한 식사를 마련해 주었다.
이쁜 접시에 음식을 담아 내는 그녀에게 나는 실로 오랜 만에 누군가로부터 대접이란 것을 받아 보는 감동을 맛보며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한 번 근사하게 갚으리라는 약속을 했지만 그 말은 끝내 지켜지질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서 인터폰이 걸려 왔다.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까운 호수 공원이나 한 바퀴 돌자는 것이었다.
새로 이사 온 일산에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건강한 아줌마들이 정말 많았다.그래서 이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자전거 한 대를 마련하게 되었다.원래 건희 엄마도 자전거가 없었는데 우연히 베란다 창 너머에서 봄 햇살을 뒤에 안고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자전거를 타는 내 모습이 하도 환해 보여서 자신도 자전거를 마련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와 이웃으로 지낸 3여 년의 세월 동안 자전거를 함께 탄 기억이 내게는 없다.당시의 나에게는 시간이 좀 소요되는 `일'이 있었고 그나마 여유가 생길 때에는 어머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몇 번의 제의를 계속해서 거절 당하게 된 그녀였지만 고맙게도 미안해 하는 내 마음을 잘 읽어 주었고 그 일로 내게 서운한 맘을 갖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그러나 더 이상은 같은 일로 내게 연락하지는 않았었다.그래서 건희네 집 앞에 놓여 있던 자전거는 좀처럼 바깥 구경을 하지 못한 채 거의 새 것인 채로 방치 되어 있었다.
그렇게 아래 윗 층으로 함께 산 몇 년의 세월 동안 아이들의 왕래만 잦았을 뿐 그녀와 나는 그저 오다 가다 잠시 잠시 마주 치는 짧은 만남 외에는 여유롭게 차 한 잔 같이 할 기회조차 쉽게 갖기가 힘들었었다.

그러나 우연히도 그녀가 성당 교우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현재 신앙 생활을 못 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그래서 성당 반 모임이라는 공식적인 자리로 그녀를 인도 했고 그 모임에서나마 서로 많은 생각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그녀는 여러모로 나에 비해 많은 것을 가졌으나 진실로 겸손했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낮추었으며 그런 그녀와의 만남은 나를 늘 행복하게 해 주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그녀의 덕목은 무엇보다 인사를 잘 한다는 것이었다.사람을 만나게 되면 항상 그녀 쪽에서 먼저 밝은 모습으로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아주 점잖아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은근히 사람을 놀래킬 만큼 재미 있는 표현으로 어색함을 없애 주고 상대방을 배려 하는 그 모습은 말 그대로의 건강한 이웃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남편 역시 그녀와 꼭 닮은 성품이어서 겸손과 친절,반듯한 예의 등 어떤 칭찬의 말이라도 하나 아까울 것 없는 그런 이웃이었다.

어느 날 그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 간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우리 부부는 가슴이 철렁했다.정말 소중하고 귀한,다시는 만나기 어려운 보물 같은 것을 잃는 듯한 상실감이 느껴져서 한동안 가슴에 바람이 불었다.어쩌면 무슨 일이라도 생겨서 차라리 이민이 어려워지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제서야 가족들끼리 식사도 하고 노래 방도 함께 가면서 더 깊은 정을 들였으니 오히려 아쉬움만 더 크게 했을 뿐이다.

그렇게 그녀는 떠났고 이제 꼭 1년이 지났다.여전히 6층 그녀가 살던 집은 건희네 집이며 그 불빛은 언제나 내게 따사롭게 비친다.
두 달에 한 번씩 열리는 동네 반상회에 가면 이웃들이 내게 꼭 묻는 것이 있다.
"그 인사 잘 하고 예쁜 젊은 엄마는 잘 지낸대요?"
비교적 젊은 사람이 드문 아파트라 또래끼리 참 친했을 것이라 여기며 언제나 나를 보고 그녀를 떠 올린다.이메일로 간간이 서로의 소식을 전하는 지라
"잘 지낸다고 해요.아직은 적응이 덜 되어서 좀 힘이 든 것 같기도 하구요."라는 정도의 안부는 전해 드릴 수 있었다.

옛날에 워낙 인사성이 밝아서 이웃 어른들에게 참으로 많은 칭찬을 받았던 나도 이제 나이가 들면서 잘 모르는 이웃을 만나게 되면 그녀처럼 쉽게 인사가 잘 나오질 않는다.자꾸 머뭇거리게 되고 먼저 인사 건네기를 어색해 하는 것이다.그나마 연세 드신 어르신들께는 쉽게 인사를 드리게 되는데 젊은 엄마들과는 낯이 익었는데도 서로가 인사를 못할 때가 많다.더구나 한 두 번 시도했던 인사를 상대방이 시큰둥하게 받기라도 했다면 그 뒤로는 다시는 아는 척을 하고 싶지가 않아진다.그러나 그렇게 무심히 지나쳐 버릴 때 그 마음은 참으로 편치가 않다.

그녀처럼 나를 조금만 더 낮추고 조금만 더 환한 모습으로 마음을 열어 주고 상대방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몇 번이라도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넬 줄 안다면 존재 그 자체가 빛이었던 그녀처럼 세상을 정말 향기롭게 할 수 있을 텐데...
유난히 사람을 잘 알아보고 밝은 눈을 가진 나는 때때로 이런 생각까지 들 때가 있다.나를 모른 척 하고 지나갈 사람을 만나게 될 양이면 차라리 내 눈도 멀어서 그 사람을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러나 반성의 눈으로 돌아 보면 연예인도 아닌 평범한 나를 상대방이 진짜로 몰라 보고 지나쳤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내 무슨 교만으로 그들이 쌀쌀하다고만 탓을 했던가 하고  뉘우치게 된다.

가끔은 그녀가 남긴 그 향기로운 향 내음이 아직도 내 주위에 머물러 있어 내 마음까지 그 향이 묻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녀를 잘 아는 지인의 말에 따르면 지금 그 가족들은 많이 힘들어 하며 한국을 그리워 하고 있다고 한다.나는 그들이 그들만의 고운 빛으로, 아름다운 향으로 그 곳의 이웃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아서 예전처럼 씩씩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그 동안 뜸했던 그녀와의 이메일을 다시 한 번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