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 엄마는 다 끝난거야.아이들 생각하고 살아야지."
오늘 아침 텔레비젼을 보다가 들은 말이다. 남편으로부터 매맞고 살다가 그 처절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혼을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프로그램이었다. 이혼을 하고서도 그녀의 남편은 어떻게든 다시 한 번 새롭게 시작해 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며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당한 폭력도 억울했지만 무엇보다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이 당하는 폭력을 직접 보신 친정어머니가 그로 인해 병을 얻어 돌아가신 아픔때문이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 사무치는 서러움과 남편에 대한 원망이 날이 갈수록 더 선명하게 새겨져서 다시 남편과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주위에서 도움을 주시는 한 분이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남편을 가슴으로 품으라며 했던 이야기가 바로 `엄마 인생은 이제 다 끝났다.이제 자식만 위해 살아야 한다.'는 요지의 이야기였다.
아직 마흔 둘의 그녀. 아들,딸 남매를 두고 소위 말하는 `장돌뱅이(장돌림)'로 생계를 유지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그녀였지만 남편과 이혼한 뒤에야 행복을 느낄 수 있을만큼 그렇게도 힘들었던 결혼 생활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인제 당신 인생은 끝났소,아이의 엄마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시오.아이들을 위해 가정은 꼭 필요하답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남편을 품고 살며 가정을 지키십시오.' 라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왠지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 프로그램은 미안하다는 남편에게 그녀가 떠날 것을 부탁하고 남편은 자신으로 인해 더이상 두려움 갖지 말고 살기 바란다며 그녀로부터 떠나 가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런데 계속해서 내 머리속에는 자신의 인생은 버려야 한다는 그 말만이 억울하게 맴돌고 있었다. 요즈음 정말 주위에서 가정이 흔들리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그와 함께 아이들이 온전히 그 아픔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세상이 많이 변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여자들의 결혼 생활이 남자들보다는 많이 참고 희생하고 어떤 면에서는 참으로 억울한 지경이면서도 견디어 내야 하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물론 반대로 남자들 입장에서도 억울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많이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아마도 여자의 아픔이 세상에는 더 많을 듯하다.
얼마전 큰아이 학부모 모임에 나가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누군가가 남편을 사랑하며 사느냐고 물었다. 나는 너무도 당연하다는듯이 그렇다고 답해 주었다. 그랬더니 한 엄마가 `세상에..세상에..'를 연발하며 다른 엄마들에게 그것을 신기하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십여명 쯤 모여 있던 그 자리에서 나처럼 쉽게 그렇게 답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몇 몇 엄마는 결혼으로 인해 꿈도 잃고 삶의 의미도 잃고 빈 가슴으로 그렇게 자식들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신이 억울하다고 하였다. 남편을 사랑한다는 것과 나를 찾으며 산다는 것은 어쩜 별개의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던 내게 그 뒤 들린 이야기는 의아함을 해소하게 해 주었다.
대부분의 남편들은 아내가 전업주부일 때는 그저 시부모님 잘 모시고 자식 잘 거두어주는 그런 역할만을 강요하는 것 같다. 그 역할의 중요함은 상식을 가진 보통의 주부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할 만으로 끝내기에는 무언가가 빈듯한 허망함을 또한 엄마들은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들이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
`여자가...아이들이나 잘 키우지...'라는 말에 두꺼운 벽을 느끼고 만다. 여자들이 일을 할라치면 사실 주위에서는 원더우먼을 기대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저것도 철저히 잘 해야만 여자를 인정해주려는 것. 그러니 한 여자가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언가 자아를 찾는 여행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인지를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마음을 닫게 되고 부부간의 대화조차 단절되니 사랑하는 맘을 지니며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쉽지 만은 않은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 대해 어느정도는 회의를 느끼며 사는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많은 갈등이 있겠지만 사실 아직은 많은 여자들이 모든 것에 우선 순위로 가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가치관이 아직은 지배적이라 무너지는 가정보다는 지켜지는 가정이 훨씬 많겠지만 그것이 여자의 희생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내 인생은 끝났어!'라는 절망감을 안고 살아 가지 않도록 주위에서 인정해 주는따뜻함이 참으로 필요해 보인다. 그래야만 억울함을 품으며 살다가 자식들 다 출가시킨 뒤 발생하는 황혼이혼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을 것이다.
부디 내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을 가정에 선물할 수 있는 여자들이 많아지기를... 엄마의 엄마가 당신의 생을 희생하며 멋지게 살아주기를 바랐던 그 귀한 자식이 바로 지금의 엄마임을 알아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