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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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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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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이의 고백


BY 생각하는 이 2004-12-23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 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시인 곽재구- 새벽으로 푸른 빛을 홀로 저미는 달빛을 보노라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시 한 편이다. 쌀쌀한 싸락눈 흩뿌리는 날 타닥타닥 장작을 지펴 보글보글 끓이던 보리차처럼 그리움이 묻어나는 이 시를 늘 가슴에 묻어 두고 나는 겨울을 보낸다. 그리고, 내겐 이제 희미한 옛사랑처럼 기억 저편에서 가물거리는 추억 하나가 있다. 스물 아홉의 가을 날 나는 절망의 늪에 있었다. 그 때 내가 택한 문학은 사회 변혁의 주체도 될 수 없는 붓의 힘이 사라진 시대였고, 적잖이 혼란스런 정체성이 내 시를 흔들고 있었다.그 혼란은 나 뿐만은 아니었으리라.사회 변혁을 꿈꾸었던 그래서 박노해 시인처럼 '노동의 새벽'을 쓰디쓴 소주 잔에 담아 내던 이들은 다 그러했으리라. 혁명을 꿈꾸던 자들은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를 필독처럼 읽었던 그 아픈 이데올로기의 상처를 안고 우리는 이렇게 또 한 세기를 어루만지며 가는 것이다. 내 스물 아홉의 절망은 그래서 마땅히 아파야 했다. 그 해 나는 현실과도 타협하지 못했고 글쟁이로서의 삶도 길이 보이지 않았고 사랑은 죽음처럼 아팠다.눈이 멀도록 바다를 그리워하며 미친듯이 쓴 시가 한 권의 시집으로 나왔을 때 나는 운둔을 택했다. 유년의 기억을 빼고는 도시를 떠나보지 못한 내가 운둔을 택한 곳은 나보다 더 치열한 시를 쓰던 후배의 운둔처였다.그녀 역시 지척에 집을 두고 시를 쓰기 위해 도외지의 빈집을 수리해서 들어온 터였다. 그 곳에서 게으른 나의 일상은 마루로 쏟아지는 가을 햇살에 잠을 털어 내고 텃밭에서 뜯은 상추로 허기진 아침을 채우곤 했다. 앞 마당에 있는 텃밭에는 후배가 심어 놓은 콩들이 한창 여물고 있었고 짝짓기를 하기 위해 풀숲을 뛰어다니는 사마귀를 보는 재미도 경외스러웠다.또 울타리 를 감싸 안고 있던 호랑가시나무의 빨간 열매는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가을은 참으로 위대한 자연임을 그 곳에서 절실히 느꼈다.한적한 오후에 마을을 한바뀌 돌다보면 마늘밭을 가꾸는 분주한 어른신들의 모습이 들어 오고 먼 산에서 붉게 익어가는 단풍들이 지친 내 영혼을 다독이곤 했다. 사람 사는 것이 자연과 더불어 가면 이렇게 한적할 수도 있고 속을 끓이는 일이 사소해지는 것을 철든 여인처럼 깨달아가며 나는 겨울을 맞았다. 시를 쓰는 일을 숭고한 일상처럼 대하는 후배는 새벽이면 일기를 쓰고 노트에 시를 쓰고 시집을 읽는 일에 몰두했다. 나 역시도 잠시잠시 내 절망을 껴안고 벽에 기대여 한숨을 쓸어내곤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 시절만큼 시 정신이 맑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그녀와 나는 시대를 논하고 시 정신을 얘기하며 시와 함께 있었다. 그 해 겨울,그녀가 여름 햇살을 등에 안고 가꾸었던 노란 고구마는 풍성한 간식거리가 되어 긴 겨울 밤을 허기지지 않게 해주었다. 마당 한 켠에 있던 우물은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내어 우리의 겨울을 힘 들게 했지만 마을로 물을 얻으러 가는 그 수고로움이 결코 귀찮지는 않았다.도시에서는 수도 꼭지만 틀면 콸콸 쏟아지는 물도 수도 시설이 없는 그 집에서는 우물에 대한 간절함이 생기고 자연을 의지하지 않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경망스럽고 교만한 것인가 깨닫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녀와 내가 지낸 몇개월의 운둔아닌 운둔은 시를 쓰는 일의 성찰과 자연을 경외스럽게 만난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긴 겨울동안 문풍지로 들어오는 쌀쌀한 바람에 문득 방문을 열면 함박눈이 마당으로 쌓이고 달빛은 소복히 마당에 내려와 있었다. 내 삶에서 그 겨울의 사색은 내 영혼을 절망으로부터 성숙한 삶으로 인도한 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