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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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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일생(3편)-맴 몸으로 와서 명주 한필 감고 홀연히 저승으로..-


BY 박 라일락 2003-07-20

 

- 맴 몸으로 와서 명주 한 필을 감고 홀연히 저승으로.... -

 

 

낮과 밤의 길이가 더 도 들도 아닌 절반이라고 하는
춘분이란 계절이 내일 모래인데도 산에 오를 때 중턱에 있었던 태양은
어느 듯 서산 소나무 가지에 걸린 체 오늘 하루의 마감을 서두르고 있었다.
사람이 화가 나면 배고픔도 모른다더니...
그 사람 앞에서 있는 투정 없는 깡이 다 부리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
울음으로 마음을 비우고 나니 배고품이 느껴진다.
그리고 보니 어제저녁에 밥 구경을 했던가 싶다.
사과와 귤 한 조각으로 시장 끼를 때우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나머지 과일과 마른 포는 산짐승 몫으로 그 냥 두고,
한 등선 넘어 자리한 시동생 묘지로 가서 또 다른 한 상을 차렸다.
"삼촌 나 와 수다. 잘 있었소?
살아생전 당신 형수인 날 그렇게 힘들게 하더니
설마 아직도 날 미워하고 있진 않겠지요?"
남편의 3살 터울인 바로 밑의 시동생도 남편이 가고 꼭 20일 훗 날..
형님 가는 길을 함께 하고 싶었는지..
교통사고로 홀연히 자기 형있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이 곳에 묻혔던 것이다.
시동생.
형수인 나보다 다섯 살이나 위였는데...
남편이 살아 있을 때부터 금전관계문제로 엄 첨 우리부부 속을 썩혔다.
형님 황금은 내 것과 무엇이 다르냐 면서..
툭하면 자기보다 나이 어리다고 형수란 존재를 무시하는 가 하면
자기 손아래 여동생 다루듯이 마구잡이로 대하는 모습에 이웃들도 어처구니 없어 했다.
죄 받을 소리인지 몰라도..
시동생의 죽음 두고 우리 친정에서는 하나도 슬퍼하지를 않았으니..

남편 죽음 후..
40초반에 홀로된 형수가 고무신 바꿔 신고 호적 바꿀 것 뻔하다면서..
짧은 순간일망정 가장 많은 정신적 고통을 준 사람이 바로 이 시동생이였다.

그런데 죽은 자에게 그 어떤 원한이 남아 있겠는가?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포용되고 용서해짐을 이를 두고 말함이리라.

산을 내려오는 길목은 제일 먼저 이 산에 죽음의 호적을 올린
사촌시동생 무덤에 꽃을 꼽아 주었고 한잔의 술을 대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촌 동서는 한번도 무덤을 찾지 않았는가..
지난 추석에 우리 가족이 꽂아 논 꽃이 아직도 그대로 이니...

이미 태양은 서산으로 넘어가고 석양의 희미한 그림자도 서서히 꼬리를 내린다.
산(山)지기 인부 몇 명이 하루 해가 마감을 하는 건 만
개의치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또 하나의 묘소를 다듬고 있는 모습이다.
또 어떤 중생이 곡기를 끊고 한 많은 生을 포기하는가?
아마도 내일 이산에 입적할 죽은 자가 예약하는가 보다.
그래도 저승보다는 이 승이 나을 것 같은 데.....
남은 건포와 과일 그리고 술을 현장 일하는 인부들에게 드렸다.
고맙다는 과한 인사를 받으면서.

마음이 서럽고 괴로우면 다시 찾아 올 것을 그 사람에게 약속을 하면서
한번 더 무덤 위에 눈인사를 나누었다.
언제인지는 몰라도 바로 이 옆자리에 내가 누울 것이 아닌가.
이 옆자리를 같이 장만하는 것도 죽은 그 사람 시신을 앞에 두고
친정식구들과 시동생이 참 많은 의견 충돌이 있었지.
아직도 새파랗게 젊은 형수가 이 집안 호적에 남지 못할 거란
섣부른 잣대를 시동생 마음대로 끄었으니...
결국 시아주버니께서 친정식구 편을 들어주셨고 부부묘지를 장만해주었던 것이다.
그 사람. 
이 곳에 묻은 3일 후 삼오 날.
이 산골짜기 전체가 무너지는 여인의 한을 시집식구들에게 내 품었다.

88년도 대한민국은 온 통 올림픽 잔치로 환호성에 휩싸여 있건만..
내 가족.
봄의 찬란함도 그 더운 여름의 열정도 외면한 체 쓸쓸한 가을을 맞이하였고
추석 한가위도 초라한 병실에서 그 지루한 생활의 연장이었다.
남편병명이 똑 부러지게 나타나지 않았기에
머리부터 시작하여 발끝까지 검사만을 수 차례.....
그런데 위, 간, 폐, 쓸개, 오장육부..
그 아무 곳도 뚜렷이 나쁘지 않는데 병은 자꾸만 깊어 가고..
이 좋은 의료진도 못 밝히니 어찌하란 말인가.
환자는 날로 쇠약해지고 담당의사들은 좀 두고 보자고 하면서
환자를 더 초 죽음으로 몰고 갔다.
아니, 검사만 하다가 어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남편이 입원하는 그 날부터 가족의 생계를 이젠 아내인 내가 맡아야 했다.
어판장 중매사업을 그 사람 대리자격 승인을 받아서
지금껏 남자들만이 판을 치는 험난한 생활정선에 뛰어 들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남은 식구들을 위해서...
자식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아직도 전부가 어린 학생이니깐...
정말 그 때의 고생은 내 평생 잊지 못할 양 어깨의 버거운 짐이었다.
새벽 입찰을 보기 위해서는
병실의 함께 하는 사람들이 깊은 수면에 있는데 깨지 않게 살며시 빠져 나와서 랑..
강구로 오는 버스를 놓칠까 봐 터미널까지 늘 달음박질을 해야 했고..
내가 강구로 들어오는 그 순간 나의 딸아이.
여름방학이라 집에 머물면서
자기 아버지 병간호를 위해 새벽 버스를 타고 나오는데
아마 모녀가 한 선로 위에서 같은 시간대에 오고 가는 교차함이다.

1988년도 그 해 여름.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 열리는 88올림픽으로
온 국민들이 열정적인 환희로 기쁨을 만끽하건만
우리 가족만은 얼마나 지루하고 힘들었던 여름이었던가..
아무리 환자를 깨끗이 씻겨도 거동을 못하니
등에서 난 욕 창으로 간병하는 나를 한결 더 힘들게 하였다.

입원한지 3개월쯤 되었는가 싶다.
하루는 담당의사가 우리가족 전체가 한자리에 같이하기를 원하였다.
아~~~~ '
결국 올 것이 왔구나.
미리 짐작은 했지만 난 너무나 두려워서 의사를 피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담당의사는 아내 몫이라면서 그 자리에 반 강제성으로 끌어들였다.
죄인 아닌, 죄인처럼 목석이 된 나에게 의사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환자가 희망이 눈곱만큼도 없으니 이젠 그만 포기하고 집으로 데리고 가란다.
그 순간..
"야! 미친 인간들아. 너희들이 의사라고 곡 타 먹고 있느냐?
얼마 전까지도 날보고 뭐라고 했니?
희망을 잃지 말고 기다려 보자고 했잖아?
사람 육신 이 곳 저 곳 검사로 다 망쳐 놓고
이제 와서 포기하고 집으로 데리고 가라고 해?"
그 날 그 병원은 화가 머리끝가지 처 오른 나의 울부짖는 고함으로
건물 날라 가는 것을 누가 붙잡아 기둥에 묶어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남편을 쉬이 포기하지 못했다.
그 사람보다 더 형편없이 아픈 사람이 기적적으로 날아 났기 때문이다.
모던 주위 사람들이 그 사람포기 하기를 권했지만
소귀에 경 읽기로 아무 소리도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심한 고통에 괴로와 하는 그 사람.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생명의 주사약으로 일컫는 알부민을 하루에 수없이 투여 시켰다.
물론 오랜 병원생활에 주사약은 의료 보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고,
사비로 구입해야만 했다.
그 해 여름엔 약국에서 알부민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 보다 더 힘들었다.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절친한 여고동기가 그 계통에서 잘 통하는 편이라
남편의 죽음 그 순간까지 주사약을 구입해주었는데 지금도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그 사람 입원하여 生과死의 기로에서 방황할 쯤...
남편을 포기하지 않고  미련스럽게 잡고 있다고 책망하던
나의 동서 큰 댁 형님께서 둘째 딸 혼인 날을 한 달 뒤로 받았고,
그 때부터 자기 딸 시집가기 전에 시동생이 죽을까 봐 안절부절못하였다.
그래. 좋은 것이 좋다고 했지....
여태껏도 있었는데 좋은 혼사 날을 받아 놓고 그 사람 목숨 끊게 할 순 없지..
황금 좀 더 나간다고 금방 우리 집 대들보가 무너질 것도 아니고.....
그 비싼 알부민으로 강제로 그 사람 생명을 하루하루 연장시키고 있는데..

큰 집 결혼식 날.
일가친척이 다 모이는 잔치자리에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는 우리 아이들만 초대받지 못하였단다.
큰집에서 오라는 말 한 마디 없었기에
참석하지 못한 설움에 아이들은 울음 섞인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전한다.
아니 암이란 병이 전염성인가?
아님 자기자식이 축복 받는 날 암에 걸린 삼촌의 자식이 가면 재수가 없어서..
같은 대구의 하늘아래...
호화로운 특급호텔에서 벌어진 잔치에는 많은 음식이 남고 남아돌았다는데..
남도 아닌 친 조카들에게 이런 식으로 푸대접하다니..
조카자식도 자식인데 피 눈물을 흐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음!
그래 두고 보자.
그 길로부터 나의 속 좁은 여자의 가슴에 시집에 대한 한을 품게 하는데...

대구에선 한참 호화로운 잔치가 벌어지고 있던 그 순간.
병실의 그 사람은 죽음이 눈앞에다가 옴 직감했나 보다.
조카 결혼식 날까지 얼마나 아픈 고통을 잘 참아 주었던가.
그리고 결혼식이 끝나는 그 순간과 동시에 참담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남편은 집으로 가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한다.
자기 침대 밑에 있는 돈 만 원을 내밀면서 택시를 좀 불러 달라나...
죽음이란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 옴을 그 사람 자신이 알고 나 있듯이....

이제 와서 어찌 하겠는가..
자기가 살았던 안식처에서 마지막 가는 길인 삶을 마감하고 싶다는데..
그 사람 나의 가슴에 안겨서 다 식어 가는 체온을 남기면서
병원 구급차로 집으로 돌아왔다.
간단한 여행길이라고 그 사람 속여서 병원 데리고 갈 때 길목은
한 뺌 자라서 키 자랑하던 코스모스는 한 여름 내 내 지고 피고 하는 가 싶더니
그 사람 데리고 들어오는 지금의 이 길...
코스모스꽃도 가는 사람 동행하려나 제 생명을 다하여 시들어 초라한 모습이어라.

병원에 입원하고 4개월에서 2일 빠지는 숫자였고.
나 역시 병원 차가운 맨바닥에서 4일 빠지는 잠자리를 그 사람하고 같이 했었다.
(그 당시 S병원은 보호자 침대가 없었고, 외곽 좀 떨어진 보호자합숙소가 있음)
어이 어이....
세월아 무심타!.
한 많은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이제 이 사람 내 곁에서 보내야 한단 말인가?

병원구급차가 도착을 하니 지인들께서 먼저 연락을 받고 랑..
우리 집에 많은 분들이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거래 처 사람들도 마지막 가는 그 사람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고 싶었기에..
입원 내내 알부민 효과 때문인지 눈앞에 죽음이 놓여 있건만
그 사람은 일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찾아 온 사람들에게 자기는 다 완쾌되어서 돌아왔노라고 하면서
이젠 회복만 되면 곧 어판장에 나갈 텐데
뭐 땜이 이렇게 많이 찾아왔지 하고 의문스러워 했었다.
참 기가막힐 노릇이 벌어지고 있으니....
허지만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그 사람에게 웃으면서
"맞아! 이 사람아. 우리 어판장에서 다시 만 날세...."
마지막 이승에서 고별의 악수인줄 모르는 그 사람...

대구에서 결혼식을 마친 시동생과 사촌형제들이 늦은 저녁에 들어 다쳤다.
아마 이 곳 상황을 연락받은 대구의 형제들도 혼 빠진 잔치를 했으리라.
지네들 형제가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데....
그리고 도저히 내 입으로 그 사람에게 죽음예고를 알릴 자신이 없었다.
자기 친동생 즉 시동생이 그 일을 맡았다.
자기형에게 죽음이 다가 왔음을 ....
그런데, 어찌 할 고나..
그 사람 어쩌면 그렇게 자기 죽음을 아주 침착하게 운명인양 받아들인단 말인가!
주방에 있는 자기 아내를 불러 달라고 하네.
그 당시 난 죽음이란 단어를
그 사람에게 차마 말 할 수 없어서 주방에 숨죽이고 피해있었다.
내 손을 꼭 잡더니..
"보게. 이 사람아.
내 성격이 너무 더러워서 나 어린 자네 데리고 와서 랑..
고생 참 많이 시켰네.
그런데 이 자식들 다 우야만 좋을고?
자네가 다른 정지 밟지 말고 책임 저 주면 좋겠는데.."
한 쉼을 몰아쉬고 선...
"내 병 고치면 제일 먼저 자 네 승용차 사 주고
옷장 바꾸어 줄려고 했는데 약속 못 지켜서 미안 하구만.."
그리고 죽음의 마지막 가는 길목에서 제일 큰 형님을 학수 고대하였다.
아주버니 그 날 따라 회사 입찰 건으로 늦어짐에 눈을 깜지 못하고
오전 내내 기다리다가 가까이 다 오고 있다는 핸 폰이 울려 오는데
그 사람 저승 가는 길이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더는 못 기다리고 자기 동생에게 한마디의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고통이 없는 하늘나라로 입적했다.
"형님이 왜 이리 아직 안 오시지. 이 동생의 가는 길이 보기 싫다고 하던?
동생 자네 이 사람아.
너희 형수 좀 도와줘라. 곱게 자랐는데 날 만나 고생 많이 했잖아.
그리고 형님에게 꼭 전해주렴.
형님은 부자이니깐 내 작식들..남은 조카 공부 좀 책임 져 달라고 전해주렴"
그 사람은 마지막 이 한마디를
자기 형님에게 전해 달라고 동생에게 간곡히 부탁하였고.

맨 몸으로 와서 명주 한 필을 감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한 많은 이 세상 이별하고
저 세상에 누가 기다리고 있는 양
바쁜 걸음 재촉하면서 혼자서 홀연히 이 승길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