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인되어진 기억은 묘한 힘이 있다. 내 일은 아니라해도 가끔은 잊을 수 없는 충격으로 기억 되어진 일은 몇십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가 보다. 초등학교 졸업 후 단 한번도 만날 수 없었고 연락 조차 되지 않았지만 아주 가끔씩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조각이 불러오는 상상처럼 생각나는 친구들이 몇이 있다. 전화선 저편에서 흘러 나오는 음성은 오십을 바라보는 여인의 약간 은 꼬부라진 한국어 발음이었다. 혹시 미선이..하며 말을 흐리며 차윤숙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느냐고 묻는다. 분명 이름은 그 아이 이름인데 어른으로 훌쩍 커버린 목소리가 너무 낯설어 당황 되었다. 짧은 세월 검증대를 통과하는 동안 가벼운 떨림이 느껴지고 소설과도 같은 그녀의 삶이 주술에 걸린 사람처럼 줄줄 연기처럼 풀어져나온다. 길고 긴 세월의 시간차가 유년시절의 친구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너질 수 있음은 그리움의 곰삭임이 그만큼 진했다는 말일까.. 한참을 듣다 윤숙이 아버님은 어떠시냐 물었더니 돌아가셨다고 한다. 내 어린 기억에 보았던 그분의 모습을 말했더니 어쩜 그리도 정확하게 기억하느냐고 놀란다 그당시 초등학교 육학년이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이미 어른의 사고를 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나는 그랬던 거 같았다. 그때 내 기억의 뇌리에 박힌 것은 쌍커풀에 까만 눈동자를 가진 곱슬머리의 이쁘장한 윤숙이 보다는 야윈 몸에 구멍 난 반팔 내의, 검정 뿔테 안경 그리고 조금 벗겨진 이마를 가진 그애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삼십 사년을 건너 뛴 나도 그 아이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감으니 윤숙이 집안 풍경까지 다 그릴 수 있겠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윤숙이 아버지께서 왜 그리 슬퍼보였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지긋지긋한 가난한 살림을 꾸려나가는 버거움이 몸에 쩔어버린 슬픈 얼굴을 나는 너무나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빚을 내어 온 식솔들을 비행기에 태워 미국으로 오니 손에 달랑 남은 돈 250불로 미국에서 일구 어 낸 그네 가족의 역사는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다. 한국에서 계속 살았다면 그 가난은 대물림으로 이어졌을찌도 모른다며 확신있게 말하는 대~한민국이라는 내나라에 대한 그녀의 확신이 슬펐다. 체면도 버릴 수 없는 나라.. 학연, 지연..비빌언덕이 없이는 제대로 설수 없는 나라..윤숙이네는 생각하기에 너무나 버겁고 싫은 그런 내 나라를 뒤로하고 자식 다섯 모두가 어려운 살림에 돈 없이도 공부 할 수 있는 기회의 나라에 와서 전문인으로 일하게 되었고 모두 제 밥그릇 채울 뿐아니라 한국유수기업에서 초청해서 데려 갈 정도로 인정받고 잘 살아가고 있음은 그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가족이다. 가진거 많아 기득권을 누리려 살아가는 몇몇계층으로 오해받고 눈총받는 사람들로 미국에 살고있는 한국인들은 한국에서도 이곳에서도 유랑자 취급 을 받고있지만 좀더 진실을 드려다 보면 한국에서 제대로 살고있는 사람 들에 비해 아픈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바벨론 강가의 포로들처럼.. 미국생활 삼십오년이 지난 지금 윤숙이는 두고 온 조국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가난했던 유년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하루 두끼,저녁이면 국수로 끼니를 때워가던 그 시절 웃고울던 친구들이 그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윤숙이네 가족 모두 삶에 자신감과 행복한 자존감을 찾았다는 것 정말 반갑고 감사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