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탄진 닷새장이 선 지난 28일.
대전 시내에서 50분을 내달려 도착한 신탄진 역 앞에 서서 건너편 농협 앞 보도를 유심히 살핀다. 아니나 다를까. 책 속에 등장하는 옷 할머니와 떡볶이 아줌마의 수레가 보이고, 농협 계단 맨 가장자리에는 그녀의 작은 일터가 보일 듯 말 듯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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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어떻게 오셨어요, 추운데 얼른 들어가요"
따뜻한 커피 한잔하자며 익숙하게 이끄는 곳은 다름 아닌 농협 안쪽 구석의 소파다. 벽 하나 차이지만 한겨울 거리에서 꽁꽁 언 몸을 녹일 수 있는 그녀만의 쉼터인 듯 했다.
"책 낸 이후로 신문이랑 방송에 나가니까 멀리서 찾아오고 많이들 알아 보세요. 너무 잘해주시고.. 정말 저는 복이 많은가봐요. 호호"
마흔 중반에 접어드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풋풋한 미소를 간직하고 있는 안효숙씨(43)는 유성, 옥천, 금산, 영동 등 대전충남 인근의 시골 5일장을 떠돌며 화장품을 파는 장꾼인 동시에 작가이기도 하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수식어지만 그녀에게서는 시골 장수의 푸근함과 글쓰는 이의 섬세함이 동시에 배어져 나오는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6년 전 IMF때 제가 하던 의류대리점이 파산을 했어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무작정 떠돌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살아야겠다, 어떻게든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삶을 안 놓게 되더라구요. 그런 마음 하나로 시골 장까지 떠돌게 됐어요"
IMF타격으로 파산..'살아야겠다'일념에 시장 나서
"어려서부터 힘들 때 마다 장터에 가면 이상하게 힘이 솟았어요. 어느날인가 우연히 장에 갔다가 '아, 내가 앉아 있을 곳은 여기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어차피 떠돌아다닐 바에는 시골장을 다니자, 그리고 여기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야겠다 결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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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화장품 사라"고 큰 소리로 떠들지는 못해도 예전보다 매상이 많이 올랐다며 은근한 자랑을 늘어놓는 그녀. 하지만 경기불황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침체된 장터 이야기를 하면서는 금세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장사가 안되면 서로 걱정해요. 나만 장사 잘돼도 민망한 거니까요. 요즘에는 경기가 워낙 안 좋아 다들 비슷하지요. 사실 밥 먹을 때도 눈치 보여요. 혹시 점심값도 못 번 거 아닌가 해서 걱정되죠. 남자분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고요"
아침에 장에 나와 한 차례 물건을 내려놓은 장꾼들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장작불을 피우고 몸을 녹인다. 풍경만 바뀔 뿐이지 장이 서는 곳을 따라 함께 떠도는 이들은 늘 같은 자리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보며 서로의 삶을 달래고 또 위로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요즘 어려움을 극복 못하고 귀한 목숨 내놓는 분들이 많지요. 그런데 아무리 대책없고 막막한 상황이라도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길이 보이데요.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면 사람들 틈으로 기어서라도 가라고 하고 싶어요. 사람사는 세상인데 반드시 길이 있어요. 나도 처음엔 피했었지만 내 인생은 결국 내가 헤쳐나가야 하잖아요. 최선을 다하면 아마 무언가가 보일거예요"
최근 난장을 그만 두고 화장품 가게를 내보라는 권유를 종종 받는다. 춥고 더운 거리를 묵묵히 지키는 그녀의 삶이 안타까운 이들의 목소리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 말은 더 이상의 희망사항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장터거리의 삶이 너무도 즐겁고 행복한 삶의 이유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좀 더 형편이 나아진다면 좀 더 깊은 시골로 찾아다니는 계속 장꾼으로 남고 싶어요. 어머니 세대에 아직까지 남은 마지막 인정 을 더 느끼고 싶고요. 몸 불편해 읍내까지 못 나오는 분들을 위해 방물장수처럼 찾아다니고 싶네요. 저는 이게 좋아요. 행복하니까요....
(강민아 기자/esprit@dt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