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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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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사랑 32장


BY 어지니 2003-10-22

 “여보세요? 기혁씨! 어디에요? 기혁씨.."

 "박 영훈입니다...나경씨."

 "아, 네...."

 "정민씨한테 대충 얘긴 들었어요....그러고나서는 아무 연락이 없어요? 이 자식 술에 쩔어서는 횡설수설 하는 꼴이 영 마음에 걸려서...."

 "뭐라고...했길래요?"

 "뭐, 별다른 말은 아니구....혹시, 음주 운전을 하는 건 아닌가...걱정이 돼서요..."

 "서...설마요...."

 "저도 그러지 않을거라 생각하지만......요즘 이 자식 제정신이 아니라서...나경씨? 나경씨?"

 "듣고 있어요...."

 "내가 여기저기 수소문 해볼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있어봐요...그리고, 그 자식한테 혹 전화오면...나경씨가 말이라도...따뜻하게 해줘요."

 "네...전화 기다리고 있을게요....알아보고 꼭 전화주세요..."

 "그럴게요."

삐그덕거리기만 하는 두사람을 이어주기 위한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네에..장 기혁 입니다."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면서도 아직 자신이 장 기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을 보니 인사불성까지는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얌마! 너 그렇게 전화를 안 받으려면 핸드폰은 뭐하러 들고 다니냐?“

 “못 들었지...들었으면 내가 니 전화를 안 받았겠냐...뭐하긴, 술 마시고 있지. 자, 건배!!"

 "나경씨가 니 걱정을 얼마나 하는 줄 알아."

 "김 나경....아, 그 여자가 누구지? 누구드라? 아, 그 여자...엇갈리고..엇갈리는 여자...김 나경..."

 “어디야? 어딘지 말해. 내가 나갈게."

 "아서라, 말아라....이렇게 살다 죽어버리게."

 "야! 씨잘데기 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어딘지나 말해."

 "아서라, 말아라..."

 “음주 운전은 안돼, 임마! 이런 제길!"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는 기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경의 신경은 피아노 줄처럼 팽팽해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팅 끊겨버리고 말 것처럼, 초 긴장 상태였다.
머리속으로그려지는 오만가지의 나쁜 생각들이 그녀의 숨통을 죄어왔다.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충전이 다 됐는지 도중에 전화가 끊겼버렸어요..."

 "어디 있는 지는 알아낸 거에요? 몰라요? 설마....음주운전을 하는 건 아니겠죠?"

  "운전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그러진 않을 거에요....그래도 생각은 있는 놈이니까요...."

무엇인가 확실하지 않는 듯한 영훈의 말투가 그녀를 더 불안하게 했다.
그래도 생각은 있는 놈이니까.....
깨림칙한 기분을 떨어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핸드폰을 집어들고 그의 번호를 누르고, 그냥 폰을 꺼버리기를 여러 번 반복하던 나경은 언제 남겨졌는지 모를 음성이 남겨져 있다는 신호음에 폰을 귀에 바짝 대었다.

“당신 숨결로만 채워진 내 가슴으로 당신을 느끼게 해달라는 걸...아주 잔인하게 잘라냈어. 하지만, 당신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만년이 지난 후에는 당신을 안을 수 있겠지? 이 아픔이 그때는 느끼지 않아도 될테니까...“

어쩌면 다시는 그의 음성을...그의 모습을 듣지도 보지도 못할 것 같은 나쁜 예감에 젖게 하는 그의 슬픈 음성에 나경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으음....."

목에 기름이라도 부은 것처럼 목이 타올랐다.
물을 마셔야겠다는 한가지 생각으로 돌덩이를 얹은 듯 무거운 몸둥이를 일으켰다.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갈증을 호소하는 신음소리를 내던 기혁은 자신을 향해 드밀어지는 물컵을 쳐다보았다.

이것은....꿈인가...

비몽사몽으로 처음엔 꿈이런가 했다.

그러나!
눈을 재차 깜박이며 나신의 여자의 형체가 확연히 시야에 담아졌을때, 기혁은 꽥 소리를 질러버리고 말았다.

 "뭐야!"

머리카락이 쭈빗 서는 끔찍한 기운을 느끼며 기혁은 여자에게서 받은 컵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유리컵은 쨍소리를 내면서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히 부서졌다.

 "뭐....뭐야....."

목소리조차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만큼 놀라버린 기혁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말까지 버벅거리고 있었다.

"유리 조심해...."

"이...이게...대체...."

"비켜....그러다 유리라도 밟겠어..."

"이, 이게....어떻게....."

"어떻게 된거냐구? 꼭 말로 설명해야 해? 보고 있는 그대로지."

"야! 장 설희! 너....너, 정말...."

보고 있는 그대로라구?!!!!


 휴우....여기 어디쯤이었는데...
날이 새기가 무섭게 기혁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긴 했지만, 그의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언제던가.
그를 만나야 한다는 한가지 생각으로 처음 그의 아파트를 찾았을 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헤매다녔었지.
결국 그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섰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나경은 일기예보에도 없던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만난 것처럼 당황하기 시작했다.

 40분 넘게를 헤매 다니던 나경은 어렴풋이 떠오르는 병원을 힌트로 그의 집 근처까지 와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또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에 혀끝으로 입술을 얼마나 축였는지 립스틱이 반쯤은 지워진 상태였다.

 누군가 이미 사용한 흔적이 남아 대문은 열려 있었다.
나경은 대문안으로 들어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현관이 열려 있었다.
지난 밤...일도와 나경의 만남에 상심한 나머지 현관문을 걸어잠그는 것도 잊어버린 것인가.

나경은 현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문도 열려있었다.
문이란 문은 죄다 열어있는 현관앞으로 들어선 나경은 다시금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팬티만 입고 침대모서리 부분에 걸터 앉은 기혁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속옷을 입고 있는 여자를 쳐다보고 있는 장면을 보고 만 것이다.
급냉을 당해버린 생선모양 얼어버린 나경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밖으로 뛰쳐나가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이것은 꿈이다.
지독하고 끔찍하면서도 무서운 꿈!

상심과 절망으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기혁이 고개를 들었고, 현관앞에 서 있는 나경과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서로 말을 잃어버렸다.
그 순간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더 이상 놀랄 것도 없을텐데 또 다시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는 기혁이 쳐다보고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여자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네요."

마침 때 맞추어 나타난 나경에게 다소 신경질적인 어투로 말을 건네었지만, 속으로는 [빙고!]를 외치고 있었다.
키득키득 웃음이 새 나오려 했기 때문에 설희는 잇몽을 깨물어야 했다.

대문을 들어서기 이전부터 가슴을 조여오던 그 불안한 예감이 그대로 들어맞은 것이다.
폰을 쥐고 밤을 샌 것도 모잘라,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왔건만....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렇게 다시 엇갈리고 마는 구나.....

 정민의 표현을 빌자면 신기할 정도로 엇갈리는 나경과 기혁의 지랄 같은 사랑은 또 다시 그렇게 엇갈리고 있었다.

 정말 정민의 말대로 이 사랑은 인연이 아닌 것일까....
애초부터 사랑이 아닌 것을....미련많고 집착많은 내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네요....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그러고 섰지말고, 이리와 좀 앉아요."

마치 제 집에 찾아온 손님을 맞는 것처럼 미소까지 띄우며 말을 건네고 있었지만, 그 안에 깔린 차가움을 느끼지 못할 나경이 아니었다.

처량한 바보의 모습으로 한참을 서 있던 나경은 뒤돌아섰다.
차라리 돌아서가 버리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던 기혁이었지만, 막상 그녀가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돌아서버리자....그의 가슴은 와르륵 폭탄맞은 빌딩처럼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 더러운 새끼!]라든가...[너도 인간이니.]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든지...무슨 말이라도 해줬더라면...그런 기대조차 그녀는 무너뜨리고 가버렸다.
기혁은 애궂은 나경을 탓하면서도 무너져 내리는 가슴에 나기 시작한 상채기가 너무나 커 정신이 다 멍멍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놀란 얼굴....그 언젠가처럼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온 몸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 쳐 죽일 놈!
기혁은 자신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퍼부어대는 것으로 모든 것이 꿈이길....가상현실이길 바랬지만...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면서 현실임을 일깨워주는 설희의 얼굴에 다시금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처량한 바보의 모습으로 거리로 나온 나경은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오면서 정신이 멈멍해져 제대로 걸을 수 조차 없었다.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결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았다.


김 경호의 노래소리가 가방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나경씨...박 영훈입니다...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요? 몇 번째 전화하는 줄 알아요?"

가타부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들려오는 여린 흐느낌 소리에 영훈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벌써...그 자식을 만난 것인가? 지금 이 시간에??

 "나경씨? 나경씨!"

전화가 끊겨 버린 것인가?
그녀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자, 영훈은 핸드폰의 모니터를 들여다 보면서, 핸드폰을 툭툭 쳐보았다.

 "아, 미안해요....얘기해요."

 "울어요? 기...혁일 만난 거에요?"

 "울긴요....감기 기가 좀 있어요...."

 "저런...."

저런이라고 말하면서 영훈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기혁이 집에 들어갔데요...걱정 많이 했죠? 별 일없이 있는 거 내가 확인했으니 이제 걱정 안해도 돼요...."."

영훈의 거짓말이 자신을 더 슬프게 한다는 것을 그로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별 일없이 잘 들어갔다며 능쳥스럽게 늘어놓는 영훈의 거짓말...그 거짓말을 정말로 믿고 싶었다.

 "별 일 없었다니....다행이네요....네....그래요.....이제 좀 자야겠어요....그래요..다음에 봐요...."


그가 다시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의 흐느낌은 추수가 끝난 가을 들녘처럼 공허한 가슴에 휘이 한줄기 바람이 몰아치게 했다.
이렇게 그를 둘러쌓던 숨막히던 소용돌이도 끝나버린 것이다.
그런데...이 공허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비참하고, 참담한 기분은....
차가운 서글픔에 설희의 가슴도 눈물겹도록 아려왔다.

장 기혁...이 남자를 만난 그 순간에 생각하지 못했던 고의적인 일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동호회에서 주말이면 있는 정팅에서 만난 포커스...
지나치게 꼿꼿하게 굴어 대나무라는 첫인상을 주었던 남자.....
동호회의 정기 모임이 있던 날의 그 가슴설렘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곧잘 모임에 참가하던 플라워는 매번 오가는 대화가 반복되기 일쑤였고, 신선감이 떨어져 한동안 모임에 나가지 않았었다.
알맹이가 없는 모임에 시간이 죽이는 것이 아까웠다.

그렇고 그런 동호회의 모임이었지만, 동호회의 정기모임에 나간 것은 휘어지는 것보다 차라리 부러지는 쪽을 택하겠다던 포커스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막상 만난 포커스는 화면에서 느껴지듯이 그렇게 꼿꼿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남자였다.
의외로 세심하고, 따뜻함이 느껴지는 섬세한 남자였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기혁을 상대로 시작된 서글픈 외사랑은....

가슴에 지금껏 만나오던 남자들 모조리 쓸어내버리고, 그를 가슴에 담아둔 것은.....
그러나, 그는 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을 대해왔다.

처음 마음을 보였을때 그는 하하하 소리내어 웃기만 했다.
일곱살 차이가 뭐 그렇게 대수라고, 그는 늘 플라워를 어린 아이 취급했고. 자신을 여자로 보아주지 않았다.
처음엔 좋다고 앵겨들면 귀엽다는 듯이 머리도 쓰다듬어주고....웃어주기도 하더니만....
시간이 지날수록 좋다는 말만 나오면 귀찮다는 듯이 툭툭 쏘아부치기 일쑤였다.

그래도 포기가 안되어 그의 사랑을 기다려왔다.
지금껏 기혁에게 수십번, 수백번 무안을 당해도 그의 사랑을 기다리는 것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런 소중한 자신의 사랑을 감히 울리다니.
나보다 이쁘지도 않은 것이!

그나마 나경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때는 그래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존재가 점점 현실로 다가오면서, 기혁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암처럼 아무도 모르게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제는 그런 두려움 따위는 가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나경은 방으로 돌아와서는 야릇한 비현실감에 빠졌다.  .
무엇이 자신의 현실이고, 어떤 것이 자신의 현실이 아닌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뭐야?"

새벽같이 허둥지둥 집을 나갔던 친구의 얼굴에서 예사롭지 않은 허전함과 슬픔을 찾아내고는 정민은 나경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또 뭐냐구?"

그녀의 마음은 이미 달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눈을 치켜뜨며 음성을 높이고 있는 정민에게 어떠한 대꾸조차도 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단도로 조각조각 찢겨진 듯 시뻘건 핏빛으로 멍울진 가슴을 움켜잡은 나경은 그대로 침대로 쓰러지듯 누워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가수면 상태에서 지친 듯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머리속의 내용물이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따로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잠들 수 없었다.
차라리 잠이라도 잘 수 있다면....이렇게 힘들지도 않을텐데...

약을 어디다 두었더라.....
나경은 서랍속 꼭꼭 숨겨두었던 수면제를 목안으로 집어넣었다.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기혁의 얼굴....그리고, 플라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잠이라도 자야했다.
자고 일어나 다시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야지....
그녀는 마치 스칼렛 오하라 처럼 중얼거렸다.

죽은 듯이 잠들었던 나경은 어렴풋이 들려오는 빗소리에 몽유병 환자처럼 밖으로나왔다.
하늘에서는 그녀의 눈물만큼이나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빗속에 나경은 한그루의 나무처럼 서서 온몸으로 그 비를 맞았다.
그토록 원하던 일상으로의 귀환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녀는 자신이 세상 바깥으로 내던져진 것 같이 허전하고 허망한 것인지...나경은 온몸으로 빗줄기를 맞으며 솟구쳐 오르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그를 잊기 위해 사진을 분해하는 일도 할 수 없었다.
그와 찍은 사진이라곤 단 한장도 없으니....
다만 그란 존재를 먼지를 털어내듯이 털고, 잊어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루한 일상으로 되돌아가면 그 뿐....
그를 잊기 위해서 사진을 찢거나...그에게 받은 선물을 불태우거나 하는 일따위는 하지 않고 다만...잊어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은 아니어도...잊혀지겠지....
잊혀지지 않는다면 무뎌지기라도 하겠지....
시간이 지나면....가슴이 도려지는 듯한 이 아픔도 사그라들테지....
이게 내 마지막 눈물이 될거야...잘가라...내 사랑.....진심으로 너의 사랑을 빌어줄게....진심으로 너의 사랑을.....거짓말!
난 니가 불행해지기를...그래서 다시 내게로 돌아오기를....그게 정말 내진심이야.


"뭐라구요!"

정민은 주위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린다는 것도 잊은채 비명처럼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아무래도....이번엔 좀 힘들것 같아요."

"인간도 아냐. 그 새낀!"

정민의 눈에서 주룩하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년전 그 어느날....온전히 한 사람만을 사랑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던지고 숨어들어왔던 나경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정민은 아려오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렇게....끝나버릴 것을....그렇게 아파했단 말야......이렇게 끝나버릴 것을....바보같이..."

한줄기 소나기처럼 휘몰아치고 사그라들 사랑이고 말것을....
그 사랑은 끝내 친구를 침몰하게 해버렸다....


비가 그친 후...불볕더위로 잠 못 이루게 하던 여름은 가을의 서늘한 바람속에 묻혀졌다.
어김없이 그렇게 한 계절은 가고, 한 계절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김 나경씨."

늦은 퇴근을 하는 나경을 어둠속에서 불러세우는 여자의 목소리에 나경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굳이 누구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 새 새로운 애인을 사겼나보군요. 능력도 좋아요."

비양양거리며 설희가 다가서기 전부터 이미 나경의 표정이 거뭇한 어둠이 깔리고 있다는 것을 일도는 놓치지 않았다.

시작도 해보기 전에 끝을 보아야 했던 사랑이지만, 곤혹스러워 하는 그녀앞에 나서 그녀를 곤란하게 하는 설희로부터 방패가 되어주었다.

"그쪽하고가 아니라...김 나경씨한테 할 말이 있어요."

일도는 한참 아래인 여자가 그쪽이라고 지칭하는 것에 격분해 한 발 다가섰다.

"이것봐요, 아가씨...이 사람이 그걸 원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 그래요? 김 나경씨? 정말 나랑 할 말이 없어요?"

"그래요."

재미난 내기를 하는 사람처럼 다그쳐 묻는 설희에게 나경은 딱부러지게 한 마디하고는 돌아서버렸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서로 같은 입장이 아닌가.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상대 여자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꿰둟을 수 있었다.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던 사랑이 갈취당해버렸으니 엥돌아지는 것쯤이야 불 보듯 뻔한 반응이 아니겠는가.

"언제까지 자기 자신을 그렇게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긴 그런 어영부영한 성격덕분에 내가 기혁씰 차지하긴 했지만 말이에요."

멈칫!
의지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잊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기혁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망부석처럼 굳어버렸다.

일도, 자신의 무엇으로도 그녀의 가슴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일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지금처럼 다정하게 미소지어주며....걱정스럽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는 것 뿐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것 같군요....혼자 있어도 되겠죠?"

일도가 멀어져 보이지 않을때쯤에야 나경은 힙겹게 말문을 열었다.

"더 이상 만날 일이 없는 걸로 아는데요...."

"그건 나경씨쪽 입장이구요. 오는 길에 보아둔 카페가 있어요."

설희가 보아두었다는 카페는 정민과 곧잘 가곤 하는 [하늘빛]이었다.

지나치게 당당한 여자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나경은 부담스러웠다.

마주앉은 그녀가 말했다.

"플라밍고 주세요. 체리가루 듬뿍 넣어서요....나경씬요?"

"전 그냥 커피 주세요...."

달게 해달라는 코멘트를 달고 싶었지만, 나경은 다음 말을 잘라버렸다.
지금 상태로서는 단 커피를 마신다 해도 커피의 옳은 맛을 느끼기엔 애저녁에 글렀으니....

"할 얘기가 뭔지 빨리 좀 해줄래요?'

"그렇게 급하게 굴 거 없잖아요? 하긴, 나와 마주하고 있는 게 편하지 만은 않겠죠...하지만, 그렇게 빨리 끝낼 얘기가 아니니까 조급하게 굴지 말아요."

"플라워 말대로 이러고 있는 거 아무래도 편치가 않네요. 서로가 편치 않은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니 빨리 끝내줘요."

체리가루가 듬뿍 올려져 선홍빛을 자아내는 플라밍고가 설희앞에 놓아졌다.

"잠깐요...내 이름은 장 설희에요....채팅을 하는 것도 아닌데....흙비니, 플라워니 하는 닉네임은 좀 그러네요."

그딴 것이 뭐 중요하냐고 반박하려다 말고,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잔을 쥐었다.
설희는 플라밍고를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또 한잔의 플라밍고를 주문했다.
그리고, 다시 플라밍고가 앞에 놓여질때까지 꿀먹은 벙어리가 되버린 것처럼, 말문을 닫아버린 채...통쾌한 미소인지.....비웃음인지 알 수 없는 입술의 삐죽거림만 계속할 뿐이었다.

"설희씨."

"기분이 어때요? 난 나경씨가 지금껏 느꼈었던 가진 자의 오만을 양껏 누리고 있는데....세상은 이래서 살 만하다고 하나봐요. 우리가 이렇게 반대입장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체리가룩가 듬뿍 담겨져 달아보이는 플라밍고에 반해 설희 입가엔 쓰디쓴 미소가 지어졌고, 내 뱉는 말 하나하나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설희씨..."

"왜요? 한번도 내게 그런 오만을 부린 적 없다고 말할 이에요? 처절하도록 그 오만을 받은 내게 요?"

"그래요....그랬다고 해요...하지만, 이제 설희씨 말대로 입장이 바뀌었어요....나도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에요....그래서요?'

"그래서라고 묻다니....정말 대단해요."

이렇게 간절하게, 이렇게 절실하게 누군가를 미워한 적이 없었다.
죽이고 싶도록 말이다.
공통분모처럼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줄다리기를 하며 팽팽한 신경전으로 눈싸움을 해야 하는 저 여자....김 나경이라는 여자가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얼마나 많은 밤을 하얗게 지새웠던가.

손을 내밀면 맞닿을 듯 가까이 있는 남자의 손도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자신의 서글픈 사랑의 원인을 나경에게 두고 있는 그녀로서는 당장에라도 그녀를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구나, 저 초탈한 표정이란....
스멀거리고 기어오르는 담배의 역겨운 향처럼 그녀는 자신에게 더없이 역겨운 존재였다.
죽일 수 없다면 뒤통수라도 한대 후려갈겨 주고 싶었다.

대단해? 내가?....하긴 니가 이 문드러지는 속을 어떻게 알겠니.

그때 가방속에서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정민일 것이다.

나경은 실례의 뜻으로 고개를 가볍게 까딱거렸다.
짐작대로 정민이었다.

"친구 만나고 있어....그렇게 늦지는 않을거야....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 그래,....잇따가 봐."

"단어선택을 잘못 하시네요."

"잘못 하다니 뭘요?"

"친구가 아니고, 웬수를 만나고 있다고 해야 하는거 아닌가요?"

폰을 가방으로 집어넣는 나경에게 말꼬리를 잡으면서 시비를 걸어왔지만, 나경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장 설희씨....이제 그쪽 할말은 다 들은 것 같은데...그만 일어나겠어요."

"아뇨! 아직은 안돼요!"

엉덩이를 반쯤 털고 일어나는 나경을 향해 할기시 노려보며 바락 소리를 질렀다.

"아직 할 얘기가 더 남았어요....이제부터가 아주 중요해요."

나경은 설희의 뒷말을 더 들을 생각이 없었다.
바락 소리를 질러대는 설희를 뒤로 하고, 카운터로 걸어나온 나경은 그녀가 마신 두 잔의 플라밍고 값까지 계산하고는 잰걸음으로 카페를 나와버렸다.

휴아....
나경은 카페밖을 나오서 이제껏 제대로 쉬지 못한 숨을 한꺼번에 들이쉬었다.
긴장할 것도 없었고, 떨 것도 없었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한 발도 내딛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타고나는 것이라지만, 이 미련한 성격....정말 지겹다.

"할말이 아직 남았다잖아요!"

화들짝!
그녀 자신의 뒷꼭지에 대고 바락 악을 질러대는 설희로 인해 나경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발이 엉켜 자빠질 뻔 했다.

"들을 말은 다 들은 것 같은데요...그만하면 됐어요.."

"그건 내가 결정해요. 술 마시러 가요. 지금부터 하는 말은 맨 정신으로는 할 수가 없어요."

"장 설희씨..."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내 이름이 장 설희라는 거 알아요....내가 괜찮은 데를 알아요. 글루 가요."

도무지 감당이 안되는 사람이었다. 설희란 여자는....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더 남았단 건지....
그냥 가버릴까 생각하는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설희는 나경의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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