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의 인내심도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수행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맨발로 자갈밭을 걷는 아리한 기분의 사랑은 좀제 나아지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와의 사랑은 늘 그렇게 제자리 걸음이었고, 순조롭지 않았었다.
그것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시계추처럼 움직이면서, 시계추가 움직일 때마다 있어야 할 곳이라면, 언제 어느 때고 늘 같은 곳에 있었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하나의 작은 점이 되어 멀어져 가는 그녀를 소리쳐 불러도 그녀는 말없이 가버렸다.
또 시작이구나....
머드팩으로 얼굴을 가리고 침대에 누운 나경은 자는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표정관리가 필요할 때면 언제나 그녀는 그렇게 진한 팩으로 얼굴을 가리곤 했었다.
얼굴을 잠시 볼라치면, 이번에는 스팀타올로 다시 얼굴을 가려버리기 일쑤였다.
“차라리 팩을 할거면, 피부에 맞게 해....넌 건성이라 머드팩은 아니란 말야....우유팩을 하든지 해야지...그러다 피부 다 버린다구...”
정민은 해봐야 들어주지도 않을 말인줄 알면서도 주절거렸다.
“내가 무슨 결정을 내리더라도...넌 이해해 줄거지?”
얼굴을 덮고 있는 팩이 마르면서 얼굴 근육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녀가 혀 짧은 소리로 결정이라는 단어를 내뱉었다.
“동문서답도 아니고,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뜬금없이 결정을 내린다는 말을 시작으로 사람의 궁금증을 유발시켜놓구선 함구령을 내려버리는 친구의 속을 알 길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알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다.
기혁과의 결별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이려니 했다.
설마 사표를 내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야! 너 정말 나한테는 말 한마디하지 않고 이게 무슨 짓이야!”
사장으로부터 그녀를 설득해보라는 말과 함께 받아든 사직서를 나경에게 집어던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말했잖아....어떤 결정을 내려도 이해해 달라구....”
“그러니 뭐야? 나는 니 결정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거야?"
“.....어떻게 황 부장님 얼굴을 봐....나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하구....”
“다른 일은 알아보기나 한 거야? 그것두 아니잖아. 왜 이렇게 경솔하니.”
“일이야 찾아보면 있겠지, 뭐....그리고, 며칠 쉬고 싶어....생각도 좀 하구...”
"평소에 하는 생각이 작다고 또 생각이니? 지겨워, 증말...너 그거 알아? 너도 기혁씨랑 하나 다를 것 없이 이기적이라는 거. 정말 둘다 자로 재면 신기할 정도로 딱 맞아떨어질거야."
가시돋힌 정민의 이죽거림은 오래 계속되었다.
얼굴이 땡겨와 씻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표정관리를 제대로 할 자신이 없어 나경은 친구의 이죽거림이 그치기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황 부장님이 너 사표 낸 거 알면 정말 좋아하겠다. 왜 그렇게 생각이 없어. 정말....”
아무리 이죽거리고, 열을 내보아도 아무 반응이 없는 친구가 마치 벽처럼 느껴진 그 순간...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기 시작했던 정민의 히스테릭한 신경질도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꽝 소리를 내면서 문을 닫는 것으로 정민의 엉뚱한 화풀이는 막을 내렸다.
정민은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경의 가슴을 후벼대는 그녀의 말에 심장이 조각조각 찢어져 주룩 눈물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화장실에 들어서 머드팩을 지워내면서도 그녀는 훌쩍 훌쩍 우는 것을 그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라곤 기혁을 만난 이후....단 한가지도 없었다.
차라리 담배를 피우라는 영훈의 충고가 있을 정도로 술에 쩌려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담배는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다.
뿌연 연기가 목구멍을 가득 메울 때면 치밀어 오르는 기침 때문에 꼭 바보가 되 버린 기분이었다.
“오늘은 늦었네요."
"네...."
카운터앞에 소주병을 내려놓고 있을때, 주인집 여자가 슈퍼로 들어서 기혁에게 말을 건네었다.
"어서 가봐요. 손님이 한시간 째 기다리고 있다우...”
카운터에서 계산하던 그의 손놀림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횡단보도를 향해 뛰던 그는 그 자신을 우롱이라도 하듯이 빨간 신호등으로 바껴버리는 신호등을 확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잖은가.
그는 신호를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가로 질렀다.
빵! 빵.
"야, 이 개자식아! 죽을려고 환장했냐. 죽을려면 혼자 죽지 왜 남의 신세를 망치려고 해. 이 좆같은 자식아!!"
걸쭉하게 귓가를 울리는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기혁은 달음질 치는 것을 계속하고 있었다.
소주병이 서로 맞닿으면서 아프다고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한시간 째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나경이기를....나경일 거라는 기대감에 그는 헉헉 가뿐 숨을 몰아쉬면서 뛰었다.
휴아~.....!
“실망한 얼굴이네.....”
그녀가 아니었다.
아니라고 말해야 했지만,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삼 분이 자나서야 그는 간신히 소리내어 말을 할 수 있었다.
“왠일이야?”
무정한 사람....단 한번도 [어서 와] [반갑다]라는 등의 말을 하지 않지...
늘 그렇게 [왠일이야?] [무슨 일이니?]라고만 하지...
“들어가잔 말도 안해?”
“어, 그래....들어가자....”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밀려오는 허탈감에 짓눌려 기혁은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다리에 힘이 쫘악 빠져나가면서 서 있는 것조차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쨍하는 유리소리가 나면서 소주병이 깨지고 말았다.
그렇게 달음질칠 때도 잘 견뎌주던 소주병들이 안도하는 순간에 깨지고 만 것이다.
나경과 자신의 사이처럼....
매번 그랬지....단 한번도 아쉬움을 남기지 않은 적이 없었고....단 한번도 목 마르지 않은 적이 없었어....단 한번도...깨끗하게 돌아선 적이 없었지....
“제기랄! 되는 일이라곤 없어”
퉁명스럽게 내뱉으면서 깨진 소주병을 쓰레기통에 쑤셔 박아버리곤 기혁은 플라워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나 아닌 다른....사람이길 기대한 거구나..."
"무슨 일이니?"
아니라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아었지만, 기혁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한번도 내가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네...."
한번도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은 더욱 나경이가 그리워졌다.
“언제나 그렇지....포커슨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늘 내가 곁에 있는 데두...늘 딴 생각만 하고 있어....”
플라워의 슬픈 목소리에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여자를 쳐다보았다.
“할말이 있어 왔어.....오늘은 꼭 확답을 들어야겠어.”
“무슨 말인데?”
“난 도무지 안 되는거야? 난 포커스의 여자가 될 수 없는 거냐구?”
“플라워....”
“좀 더 기다리란 말도 좋아....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포커스가 내 남자가 되어주기만 해준다면....”
“니가 그렇게 목 매달만큼 대단한 놈 아니다.”
“그건 내가 결정해.”
“...”
“나한테는 너무나 소중하고 대단한 사람이야....그 여자...아니면 안되는 거야? 나는 안되는 거냐구?”
“미안하다.....”
“조금만 내어주면 돼....당신 가슴 조금만 내어주면 되는 데두 그것두 안돼?”
"플라워...제발..."
기혁은 머리를 싸매고 신음소리와 함께 말을 했다.
제발 제발....그런 똑같은 대답을 해야하는 질문따위는 하지 말아주기를....
이골이 날 지경의 똑같은 대답을 요구하는 플라워를 절망스럽게 쳐다보앗다
차갑게 몰아붙이듯 한 말도 아니었건만, 그의 말은 비수되어 갸녀린 여자의 가슴에 꽂히고 있었다.
그 순간...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주룩하고 울고 있었다.
플라워는 그의 눈물이 놀랍고 놀라워 할말을 잃어버렸다.
허탈감에 기혁의 눈가에는 저도 모를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혁씨만 만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고 있는데두 말야...이렇게 기혁씰 앞에 두고도 자꾸만 보고 싶어져....나, 어쩌면 좋지....]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던 그녀의 말이 떠오르면서 그녀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졌다.
플라워는 확답은 커녕 그의 눈물로 그의 사랑을 재확인하는 꼴이 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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