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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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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아리랑 열차를 타다.


BY 정아네스 2019-08-13


      정선 아리랑 열차를 타다.
 
   정선 아리랑 열차를 타기 위해 민둥산역으로 향했다. 역명도 시대의 요구나 지역적 환경에 따라 변경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민둥산역은 예전에 증산역으로 불렸다. 아침식사를 할 만한 식당을 찾으려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적당한 식당 한 곳을 발견했다.

   “아침 먹을 수 있어요?”
밖에 계시던 주인 할머니에게 말을 건넨다.
그래, 들어가라.”
이웃 분들께 얻은, 삶은 감자를 들고 있던 할머니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신다.
감자하나 먹을래?”
, 고맙습니다.”

   방금 쪄낸 감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감자 한 개를 맛보고 싶었는데 마침 할머니가 권하셔서 반가웠다. 감자를 한 입 베어 물으니 간이 딱 맞다. 하얀 분까지 포슬포슬하게 나있어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감자를 먹으며 주문한 된장찌개를 기다리는데 주방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상추 먹을래?”
아니요, 괜찮아요.”
아침부터 상추쌈 싸 먹는 건 어쩐지 좀 어색하다. 할머니도 물어보는걸 보니 줘야 되나 말아야 되나를 망설이신 듯하다. 할머니가 항상 내 의견을 물으니 식당에 온 게 아니라 잘 알고 있는 할머니 댁에 놀러온 것 같은 기분이다.

가져가 먹어라.”
셀프라는 안내문은 없지만 셀프 식당이다. 손님한테 직접 가져가서 먹으라고 하는 할머니의 말씀에 절로 웃음이 난다. 그것도 가게에 밥 먹으러 들어간 손님한테 매번 반말을 하신다.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보면 할머니는 빵점이다. 그런데도 내 기분이 상하지 않고 오히려 반갑기까지 하다.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가 2인분은 족히 될 것 같다. 열무김치, 오이소박이, 가지 무침 등 갖가지 반찬도 여러 명이 먹을 수 있을 만큼 푸짐하다. 그것도 모자라 밥은 아예 대접에 담아주셨다. 식당에 와서 공깃밥이 아니라 대접 밥을 받아보기는 생전 처음이다.

먹고 더 먹어라.”
할머니는 대접 한가득 밥을 퍼 주시고도 더 먹으란다.
할머니는 식사 하셨어요? 식사 안사셨으면 같이 하시죠?”
찌개와 반찬도 많은 터라 나는 손님이라는 생각도 잊은 채 할머니께 같이 밥을 먹자고 한다.

나는 아까 먹었다. 먹어라.”
할머니도 내가 손님이라는 생각은 안하시는 듯하다. 밥을 배불리 먹고 계산을 해야 되는데 나는 차마 카드를 내밀지 못하고 대신 만 원짜리 한 장을 드린다. 할머니는 잠시 기다리라며 방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접어놓은 천 원짜리 몇 장을 들고 나오며 나에게 건넨다.

또 올게요.”
가게 문을 나서며 나는 잘 먹었습니다.’라는 인사 대신 또 올게요.’라는 말을 남겼다.
, 잘 가.”
할머니도 친한 친구를 보내듯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

   앞으로 살아가며 마음 한구석에 쓸쓸한 파도가 일렁이는 날, 꿈속에서 만난 엄마의 모습에 아련한 통증이 밀려오는 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에 순응하지 못하고 혼자서 애통해 하는 날, 그런 날들이 오면 할머니의 식당을 다시 찾아와 푸짐한 밥상을 마주하리라 생각한다.

   열차를 타고 정선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은 정선 아리랑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다. 정선 아리랑 열차는 A-train이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서의 AArirang, Ace, Activity, Adventure, Amazing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청량리역에서 출발해 제천, 영월, 민둥산, 정선을 거쳐 아우라지까지 들어가는 관광 열차다. 정선선을 오가던 비둘기호가 무궁화로 대체되고, 한동안 운행되던 그 무궁화호마저 없어진지 벌써 몇 년째다. 열차 안에는 지자체에서 파견된 관광안내 도우미분들이 타고 있었다. 관광 안내 책자도 나눠 주고, 정선 시장가는 방법, 정선에서 봐야 할 공연, 관광명소 등을 상세히 알려주고 있었다.

   정선장터는 많은 사람들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상업화, 관광지화 되어 아쉬운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많은 볼거리들이 있어 시간가는 줄 몰랐다. 메밀전병, 즉석 강정, 곤드레밥, 콧등치기 국수에서부터 갖가지 약초와 산나물까지 모든 것들이 풍성했다. 정선 장은 몇 년 전에 구경 왔을 때보다 훨씬 더 규모가 커져 있었다. 관광객들이 꾸준히 늘어 그만큼 장사가 잘되나보다.

   구경도 구경이지만 나는 공연 두 개를 보기로 작정을 하고 왔기 때문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얼음이 둥둥 떠 있는 미숫가루 한 컵을 홀짝거리며 5일 장터 공연장으로 향했다. 장날마다 짧은 공연이 열린다고 했는데 인터넷을 보니 사람들 평이 대단히 좋았다. 무료로 보기엔 아까운 공연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보고 싶던 차였다.

   시간이 되자 공연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박수 소리와 함께 무대의 주인공들이 등장했고, 한명씩 돌아가며 전통 가락을 부르기 시작했다. 무대 위의 공연자들이 나를 보고 하소연 하는 듯 툭툭 내던지는 정선 아리랑 가락은 나를 압도했다. 안내책자를 통해 공연자들은 정선 군립 아리랑 예술단의 단원들임을 알 수 있었다. 소란스런 장터에서 펼쳐지는 작은 무대 공연이건만 우리 소리를 잘 모르는 내 귀에도 탁월하게 들렸다.

   화려한 음향 시설도, 요란한 악기도 없었다. 장구와 물박(물바가지) 장단이 다였다. 등장했던 악기 중에 못 보던 게 있었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구유를 형상화하여 나무로 자체 제작한 것이었다. 사람의 소리와 간결한 장단이 어우러져 꽉 찬 무대를 만들고 있었다.

   훌륭한 무대 공연을 접할 때 무대에 선 연주자나 배우들이 오롯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다른 관객들은 없고 오직 나만이 무대를 바라보고 있고,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하는 사람들도 나 하나만을 위해 공연에 몰입을 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경우다. 그만큼 무대에 대한 몰입도가 높을 때 맛볼 수 있는 나만의 감정이다.

   장터에서의 무료 공연 역시 그랬다. 이런 공연을 보고 나면 정서적 포만감이 극에 달한다. 모든 행복이 나에게로 향하는 것만 같고, 이 순간만큼은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샘솟는다. 무료라서 수준이 낮을 거라는 선입견을 완전히 깨뜨린 것이 바로 정선 장터 공연이다.

   장터에서의 공연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공연 관람을 위해 뛰기 시작했다. 아리랑센터에서 펼쳐지는 아리 아라리라는 뮤지컬 관람을 위해서다. 시간이 촉박하여 택시를 타려고 살폈지만 택시가 눈에 띄지 않았다. 운동회 때 달리기를 해서 공책 한번 받아본 적 없는 실력이건만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다행히 공연 시작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뮤지컬 역시 정선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조선시대, 경복궁 중수를 위해 정선의 소나무가 한양으로 보내지고, 정선에 살던 목수가 그 일에 참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었다. 화려한 무대, 해학적이면서도 감동적인 전개, 주인공들의 춤과 노래가 어우러져 시간가는 줄 몰랐다. 공연이 끝나고 객석을 둘러보니 학생들이 단체로 많이 와 있었다. 관광 상품으로도, 교육 상품으로도 어디하나 흠 잡을 데 없는 공연이었다.

   정선은 여행지로써 갖추어야 할 요건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리랑 열차를 타고 가면 관광지를 둘러볼 수 있는 시티 투어버스와 연계가 되고, 장터 구경도 하며 맛있는 음식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고, 정신적 만족을 느낄 수 있는 문화 공연도 관람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정선역에 앉아 열차를 기다리는데 할머니 한분이 나더러 열차가 몇 시에 오냐고 묻는다. 승차권을 끊었는데도 시간을 잘 모르신단다. 승차권을 보여 달라고 하니 가방 안에서 꼬깃꼬깃 접어놓은 표 한 장을 꺼내신다. 나랑 같은 열차다. 영월에 사는 할머니는 주기적으로 정선에 있는 병원에 오신다고 했다. 예전에 탄광에서 석탄 골라내는 일을 하면서 병을 얻으셨다고 한다. 탄광에 근무 했던 사람들 중에 여자들도 많았다는 이야기는 할머니를 통해 처음 듣는 얘기다.

   문득, 오늘 이곳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던 정선 아리랑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할머니만의 구슬픈 아리랑 가락이 세월의 흐름 속에 조용히 녹아드는 듯하다. 열차가 도착할 시간이 멀었는데도 할머니는 열차를 기다린다며 승강장으로 나간다. 굽은 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할머니의 발길 따라 하얀 민들레가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