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정말 어린가 보다
영감의 얼굴을 본 지가 나흘째다. 혹자는 영감이 어디를 갔느냐고 묻겠으나, 사실은 한 공간에 건재해 있다. 밉상을 떨어서 내가 영감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돌아보지를 않기 때문이다. 한 공간에 있으면서 어떻게 보지 않고 사느냐 하겠으나 우리 부부는, 아니 난만은 용이하다.
“라면 먹을 테야?”
“안 먹는다구!” 영감의 물음이 떨어지기도 전에 나는 책상에 앉은 채 돌아보지도 않고 힘주어 대답한다. 아니, 대답이라기보다는, ‘안 먹는다는데 왜 말이 많아욧!’하는 강 직구다.
영감은 말없이 방문을 닫지만, 나는 영감이 그러거나 말거나이다. 누구라도 그림으로 보자 하면, 영감이 엄청 큰 잘못을 했나 보다 하고 눈치를 챘겠다. 큰 잘못을 하기는 했지. 감히 어부인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아니 그렇겠나. 그렇잖아도 요새 몸도 천근인데 말씀이야.
그럴라치면 좀 큰소리로 나무라기라도 하던지. 아무소리도 없이 혼자 라면을 끓여 먹는가 보다. 라면 스프를 렌지 바닥에 어느 정도로 뿌려놓는가의 문제만 눈을 감아준다면, 이젠 라면 끓이는 것쯤은 대수도 아니다. 제법 맛을 내어 잘 끓인다는 말이지. 라면 맛이 그게 그거지만.
지난 수요일로 기억이 된다. 막내 시누이의 남편이 갑자기 큰 병을 얻어서, 강남의 큰 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다음 날 오전에는 내가 선약이 있어서 나갔다오고, 오후에 바쁜 걸음으로 헐레벌떡 병문안을 갔다. 시누이는 우리를 보고는 두 눈을 붉혔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현대의학의 우수성'을 들어 위로를 했으나,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내가 결혼을 하던 해에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막내시누이는 벌써 환갑이 되어 있었다. 수술도 못하고 내일 퇴원을 한다 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는 집으로 향하는 내내 누구랄 것도 없이 입을 떼지 못했다. 오늘따라 퇴근길 전철의 손님은 왜 이리 많은고. 앉을 자리도 없다. 다섯 손가락 끝으로 온 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듯했다. 3년 전에 셋째 여동생을 잃은 영감은,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더 기운이 없어 보였다.
“밥할 기운도 없네. 우리 저녁 한 그릇 사먹고 들어갑시다.”지하철역을 나오면서 영감에게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달갑지는 않았어도,
“그러지.”할 터인데 완강하게 버텼다. 물론 맛있게 밥 먹을 기분은 아니겠지만 자기만 그런가.
“난 안 먹어. 당신이나 먹고 와.” 내뱉듯 하고는, 바쁜 걸음으로 앞서서 걸었다. 화가 났다.
“나, 들어가서 밥할 기운이 없어요. 먹고 들어가요.”
“당신 밥은 있잖아. 난 저녁 안 먹는다구.”
나는 잡곡밥을 전기밥솥에 따로 해 놓고 먹기 때문에, 영감의 돌솥 밥만 지으면 되니까 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이다. 허긴 기분이 그렇긴 하겠다. 그런데 나도 오기가 났다. 기분은 자기만 있냐는 말이지. 밥을 먹지 않는다고 한 마디 했다고, 어떻게 밥을 하지 않겠는가.
“나, 내 밥 챙기기도 귀찮아요. 먹고 들어갑시다.”들은 채도 않고 팔을 휘휘 저으며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나는 더 큰 오기가 발동을 해서 영감의 등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저렇게 마누라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처음 봐!”그래도 돌아보지도 않고 멀어져갔다.
방에 들어서서 옷을 갈아입던 영감이 뒤이어 들어가는 나에게 말했다.
“밥 하지마.”
“밥을 안 하면!”
“지금 먹고 싶지 않아. 나중에 라면이나 하나 끓여 먹든지.”
“그래요. 매일 라면이나 먹고 살아요. 밥하기 귀찮은데 잘 됐네!”
내 말이 고울 턱이 없었고, 쏘아보는 영감의 눈길이 살가울 리가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말싸움이 장장 오늘로 나흘째다. ‘어디. 라면만 끓여 먹나 밥을 해 먹나 보자.’
나는 내 맘대로 하지 못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그래도 영감은 끼니때마다 묻는다.
“라면 끓이는데 두 개 끓여?”속도 좋다.
다음 날도 또 묻는다.
“라면 두 개 끓여?” 영감이 그런 사람이었나? 오늘은 돌솥에 밥을 하고는,
“밥 먹자.”한다. 안 먹는다는 말에, 싫으면 그만 두라고 한 마디 할만도 한데 역시 말이 없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 갑자기 영감이 사라졌다. 살며시 방문을 열고 안방의 장롱을 살핀다. 아, 오늘은 색스러운 체크 상의를 입고 나간 모양이다. 그건 모양을 좀 부리고 나갔다는 의미이다. 엄니가 계시는 양주로? 아니면 동창모임에? 동창모임에 나갔다면 술을 마시겠는 걸?! 아니, 양주를 갔어도 엄니를 보면 매제의 일로 술을 마시겠는 걸?!
그만 끝내야겠는데 명분이 없다. 생각해 보니 밥맛이 없을 만한데 왜 이해를 못했을까 싶다. 영감은 막내매제를 누구보다 사랑하지 않았던가. 진즉에 휴전을 할 것을. 이러다가 영감이 정말 화가 나면 안 되는데 말이지. 좋지 않은 기분으로 술을 마시면 어쩌나.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영감의 기분을 헤아리지 못한 일을 후회한다.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영감은 현관을 들어선다. 아, 양주를 다녀온 모양이다. 술은 마시지 않은 채다. 눈이 움푹 파인 걸 보니 좀 안됐다. 밥상을 차려놓고 책상에 앉아있는 영감의 등을 향해 말한다.
“밥 먹어요.” 나도 멋쩍어서 얼른 소리치고 영감이 돌아보기 전에 잽싸게 돌아선다.
나도 모르는 새에 ‘밥 먹어요.’소리가 나왔다. ‘진지 잡수세요.’에서 ‘식사하세요.’를 거쳐 오늘 드디어, ‘밥 먹어요.’까지 낙하산을 탔다. 그러고 보니 나도 참 많이 변했다. 그러나 희한한 건 누군가 앞에 서면 영락없이, ‘진지 잡수세요.’가 나오니 나도 참 내 속을 모르겠다.
만석이는 시방 라스베가스의 게임장에서 빠찡꼬에 빠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