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 하실라요
변변치 않은 사람이라 병원 다니는 게 일과다. 오늘도 안과를 다녀왔다. 동행은 당연지사라 말은 없었어도 따라나서는 영감. 내일 아침 이른 시간에 병원을 가야 한다 했더니, 고맙게도 엄청 이른 아침을 지어놓고 깨우는구먼.
허기사 쌀 앉혀놓은 돌솥에 불을 당기는 일이니…. 딸아이 말대로라면 그래도 그게 어디냐더만. 그래서 아주 당신이 아침밥을 전담한 양 의기가 양양하지. 그래 그게 어디냐 해 두자. 병원에 갈 시간에 맞추어 불을 당겨놓은 것만도 어디야.
암튼 그래서 이른 시간에 진료를 보게 되겠다. 대기실은 언제나처럼 만원이다. 고맙게도 한 켠에는 셀프 커피 탁자가 놓여 있다. 그러니까 기다리기 지루하면 한 잔 하시라는 무언의 유혹이다. 센스가 만점이다.
“여보. 커피 하실래요?” 영감은 탁자 위의 신문을 뒤적이면서 미동도 없이, “응~!” 한다. 그 대답에 무척 만족스럽다는 늬앙스가 넘친다. 봉지를 개봉하고 종이컵에 커피를 타는데 뒤통수가 시리다. 돌아보니 시선이 모두 나에게로 쏠리고 있다.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나는 내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아, 알았다. 저기 저 아저씨는 부러움의 시선이고, 그러고 보니 저 아주머니도 뭐, 그닥 날이 선 시선은 아니다. 그러니까 기분이 좋은 시선들을 보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집에서는 별스러운 일이 없을 때면, 영감의 커피를 내 손수 타는 일은 없다. 식사가 끝날 때마다 한잔의 커피를 반드시 마시지만, 언제나 당신이 손수 타서 마신다. 나도 커피 수발은 할 생각도 없지만 영감도 그걸 바라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것은 집안에서의 사정이고, 밖에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그건 영감도 바라는 바다. 그럴싸하게 여러 사람들 보란 듯이 커피 한 잔을 수발들고 영감의 낯을 세우자는 말씀이지. 집에서는 밥을 시켜먹을망정 여러 사람들 앞에서는 체면을 좀 세워 주자는 게지.
병원을 나서는 영감의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잘 하면 내 가방도 들어준다 하겠는 걸. 그런데 그건 또 내가 싫다. 늙어가기는 마찬가지인데 마나님 핸드백 들고 동부인 한 모양새는 보기에 여~엉 남사스럽더라는 말이지. 남자 체면이 안 서지.
우헤헤. 별 것 아닌 것으로 오늘 만석이 기분이 띵호~! 가끔은 이렇게라도 기분전환 해 보는 것도 괜찮은데? 이쯤 되면 저녁에 영감에게 커피 콜~! 해도 통하지 않겠어? 저녁 커피는 수면장애를 부른다 하지만 오늘은 시험 삼아 어디 한 번 시도 해 봐봐? 훗훗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