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시절 나는 참하고 조신한 신부감은 아니었다.
어른들 앞에서도 자기 주장 거침없는 버르장머리 없는 가시내였다.
아버지가 맞선이야기를 꺼내면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같이 살 사람을 왜 아버지 눈으로 골라, 싫어. 내 눈으로 고를 거야.'
오냐오냐 기르셨지만 이런 나를 보면서 아버지는 속으로 은근 걱정도 되셨을 거다.
데려가겠다는 놈이 있으면 돈을 묶어 나를 버리겠다고 말씀하시곤 하였다.
남편이 나랑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을 때 시아버지 반응이 이랬다 한다.
'비싼 돈 들여 서울로 유학까지 보냈더니 기껏해야 이웃마을이냐, 서울에는 여자가 그리도 없더냐...'
도대체 뉘집 딸이냐고 물으셔서 우리 아버지 이름을 말하니 더 이상 반대하지 않으셨단다.
호부에 견자는 없다는 말이 흔하던 시절이니 우리 아버지 딸이 어찌 흠이 있으랴 생각하셨나 보다.
암튼 아버지 덕에 결혼허가는 무사 통과였다.
우리 결혼하고 몇년 후 시누이도 이웃마을 총각과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시누이 시아버지 될 사람이 역시 사돈 될 집안에 대해 궁금해 하셨더란다.
시아버지 이름을 듣고, 나는 그런 사람 모른다 하셨다지.
우리 아버지랑 시아버지가 사돈이라는 말을 듣고는 그럼 되었다 하셨더란다.
우리 아버지가 사돈을 맺은 집안이면 더 이상 알아볼 필요가 없다며 결혼을 승낙했다는 거다.
시누이 결혼허가도 울아버지 덕을 본 셈이다.
우리 아버지, 그냥 가난한 농사꾼이었는데 무슨 수로 그리 좋은 평을 얻고 사셨을까...
초등시절, 나는 선생님들의 관심과 사랑이 부담스러워 싫었다.
언니들도 그랬다고 한다.
남동생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장선생님은 일도 없이 가끔 나를 교장실로 불러 아버지 안부를 묻곤하였다.
우리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노라고 하였다.
교장선생님이 그리 이뻐하시니 다른 선생님들은 말할 것도 없다.
강아지 강아지 우리 강아지라며 놀리고 장난치던 소사아저씨 생각도 난다.
어딜가나 아버지 딸이라는 이유로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자란 나는 윗사람들 사랑과 인정을 많이 받고 사는 것 같다.
시집 어른의 사랑은 물론이고, 선생할 때는 교장 교감의 두터운 신뢰가 있었다.
전업주부가 되었을 때는 남편 직장 상사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그리 남편 내조할 줄 모르느냐고, 상사 부인인 자기를 찾아오지 않는다고 섭섭해 할 만큼 아낌을 받았다.
가끔 그 이유가 무엇일까...스스로 생각해 본다.
아마도 어려서 받은 사랑이 윗사람에 대한 어려움을 내게서 없앤 것이 아닐까...
경계심이 없으니 스스럼없이 윗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고 윗사람들도 그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친구가 날더러 그랬다.
'너는 참 인덕이 많은 사람 같아.'
그럴까...그렇다면 내가 가진 가장 커다란 인덕은 우리 아버지가 내 아버지였던 것이 아닐까...
울아버지 딸이었던 것이 내게는 정말 큰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