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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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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자유


BY 낸시 2017-06-09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모시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쓰고 전주 향교 행사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장의라는 직책을 맡기도 하였다.

스스로 배움이 짧은 무지렁이 농사꾼을 자처하였던 아버지에겐 영광일 수도 있는 직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더니 차츰 아버지도 할아버지처럼 양반 타령을 시작했다.

어울리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즐겨했을 것이니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가시내라서 족보에도 못오른다는 말을 듣고 자란 나는 아버지의 양반 타령이 듣기 싫었다.

조상이 자랑스런 양반임을 강조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이, 어디가서 조상이 양반이었다고 입도 뻥긋하지 마아....

아버지가 논도 팔고 밭도 팔아서 보내 준 학교에 가서 배운 것인데, 우리나라 역사에 나쁜 짓은 깡그리 양반이 했더라고...

당최 양반 조상 이야긴 하면 안된데니께...집안 망신이여..."

불호령이 떨어질 만도 한데 아버지는 눈을 끔벅이고 쓴 입맛을 다시는 것으로 대신했다.

 

할머니 제삿날이 되면 아버지는 벼루를 꺼내 먹을 갈고 한자로 지방과 축문을 썼다.

제사가 시작되고 작은 아버지는 목청을 가다듬어, "유세차..."하고 축문을 읽기 시작했다.

귀를 기울여 들어봐도 작은 아버지가 읽는 축문이 무슨 뜻인지 알수가 없다.

제사가 끝나갈 무렵 엄숙하게 앉아있는 아버지 옆으로 가서 꾹 찔렀다.

"아버지, 할머니가 살아 생전 한문에 능하셨어요?"

"아니, 겨우 언문을 깨치신 정도였지."

"피이...그러면 할머니가 제사도 못 찾아 드시겠네...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되면 갑자기 유식해지나...

그렇게 못알아 들을 소리로 축문을 읽고  지방을 한문으로 써붙이면 할머니가 어찌 안다고..."

이번에도 불호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말 대신, '요놈 봐라, 제법 일리있는 말을 하네...' 아버지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삿날이면 가까운 집안 어른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 구두쇠 당숙이 있었다.

꽤 넉넉한 살림이었음에도, 자식들 교육에 드는 돈 마저 아까워한다는 소문이었다.

그 당숙 옆에 바짝 다가앉은 내가 물었다.

"당숙, 죽으면 돈도 가져가실 거예요?"

어머니는 내 무릎을 꼬집으며 버릇없음을 야단쳤다.

어머니 손을 뿌리치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철수는 공부도 잘하는데 왜 학교에 안보내세요? 돈이 그리 아까우세요?"

아버지는 모른 척하고 있었다. 

아니, 표정으로 보아 고소해하고 있었다.

 

어려서 나는, 할 말 못할 말 구분도 못한다고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로 알려져 있었다.

야단을 쳐야하는데 그냥 두고 본다고, 그것이 아버지 탓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버지 탓이었을까...나는 아버지 덕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아버지 덕분에 감히, 언론의 자유를 누리고 살았다고 말하고 싶다.

 

결혼하고 가끔, 입 닥쳐!...남편이 그랬다.

아버지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다.

"천만에, 우리 아버지가 날더러 할 말 하고 살라고 논 팔고 밭 팔아서 가르쳤네요.

우리 아버지가 팔아치운 논밭이 아까워 내가 그리는 못하지."

사실, 공부가 싫어 중학교에 가기 싫다는 내게 아버지가 말했다.

"사람이 입이 있으면 말을 할 줄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배우지 못하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제대로 표현을 못하는 법이다."

사람들이 날더러 말을 잘한다고 한다, 말로는 나를 당할 수가 없다 하기도 한다.

아버지를 잘 만난 덕분이다.

헌법이 아무리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면 무엇하나...

집에서 부모가 막으면 그만인데...

아버지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

평생 언론의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탓이 아니고 아버지 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