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어머니는 같은 동네 살았지만 서로 얼굴도 모르고 살았다고 하였다.
그 만큼 남녀구별이 엄격하였기 때문이다.
남녀가 길에서 마주치면 여자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 외면하고 남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길을 가던 때다.
같은 동네 산다 해도 남녀가 서로 얼굴을 알기 어려운 이유다.
외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서로 사돈을 맺기로 한 뒤, 어머니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였다.
아버지가 지나가면 길이 훤하다는 소문을 듣고 확인하고 싶었다.
크고 쌍꺼풀 진 눈, 우뚝한 콧날, 흰 피부에 훤칠한 키의 21살 총각이 마을 길을 걷는 모습이 보인다.
유난히 작은 키에 가무잡잡한 피부의 18살 처녀가 사다리에 올라 담장 밖으로 총각을 훔쳐보는 모습도 그려진다.
"뭐, 길이 훤하다더니 길은 그대로구먼." 어머니의 반응이었더란다.
큰언니가 초등을 졸업하던 때, 졸업하면 사범학교에 입학이 가능하였다고 하였다.
공부 잘하는 언니가 아깝다고 사범학교에 보내자는 선생님의 권고에 할아버지의 반응은 이랬다.
'다 큰 처녀가 종아리 내놓고 다니는 꼴은 못 본다.'
효행이 백행의 근본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산 아버지는 할아버지 말을 그대로 따랐다.
사범학교 대신 향교가 세운 고등 공민학교에 다니던 언니는 그 학교가 없어지고 더 이상 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다.
먼 발치서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가슴 졸이던 남자들이 많았다는 것이 이유다.
그 중 일부는 좀 더 가까이서 언니를 보기 위해 따라다니기도 했고 길에서 기다리기도 했으니...
아버지를 닮은 언니의 외모가 지나치게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이 죄라면 죄였다.
어머니는 딸 단속 잘하라는 작은어머니의 비난 섞인 충고를 듣고도 대꾸 한번 못했다.
여고 입학 통지를 받은 후, 나는 세수도 안하고 며칠 째 방 안에서 뒹글거리며 게으름을 피웠다.
산에서 땔감을 구하던 시절, 아버지는 나무하러 가기 위해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다.
그 때, 교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남학생 하나가 대문을 들어섰다.
전화가 없을 때니, 편지나 직접 방문이 의사 전달 수단이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저 낸시에게 할 말이 있어 왔는데요."
그 시절, 남학생이 여학생 집을 방문하는 것은 당돌한 짓이었는데 아버지는 심상하다.
할 말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 이렇게 말한다.
"어...그래. 방에 있으니 들어가 봐."
다 큰 딸이 혼자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다니, 남녀 칠세 부동석은 어디가고...이거는 파격이다.
세수 안한 얼굴에 밥 먹고 닦은 입 주위만 환한 내 모습은 아프리카 토인을 닮았다.
옷차림도 남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은 아닌데...
몇년 째, 속으로 좋아하던 남학생에겐 결코 보이고 싶지 않다.
울고 싶다.
남학생이 돌아가고 난 후, 아버지는 내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처신을 어찌하고 다니기에 남학생이 집으로 찾아오냐...그 시절, 흔히 있을 법한 비난은 물론 없었다.
세월이 흘러 나도 결혼을 하고 아들과 딸도 낳아 길렀다.
연애 풍속이나 성풍속이 세월 따라 변하는 것도 경험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보였던 유연성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았다.
나도 나름 열심히 노력하는데... 아들 딸 따라가기가 버겁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충돌을 피하지 못할 때도 많았다.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살피면 살필 수록,그 분을 내아버지로 가졌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