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느린 속도로 눈발을 헤치며 기어가는 차들도 점점 멀어져가고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 수도 줄어들고 있었다.
璡이 잔뜩 웅크린 채 내 옆에 바싹 붙어섰다.
그의 얇은 홑점퍼가 계속 마음이 쓰였지만 될수 있으면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택시승강장 간판아래 서서 길건너쪽 상가의 간판을 읽고 또 읽었다.
- 춥기도 하고 이대로 헤어지기엔 너무 서운한데 어디가서 한잔 더하고 갈까?
이미 璡의 안색은 푸른빛이 되어있었다.
두터운 외투를 걸친 나도 종아리가 떨려오는데 그는 얼마나 추울지 짐작이 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디 들어가기는 해야 할것 같은데 그와 단둘이 술을 마시는 것은 어색하고 불편했다.
- 그럼 술은 됐고 따뜻한 차나 한잔 해.
들어갈 만한 곳을 두리번거리며 찾다보니 마침 뒤쪽 건물의 1층에 대형 서점이 보였다.
서점의 한켠에 테이블이 세개있는 자그만 커피 전문점이 딸려 있었다.
종업원인 듯한 살집 통통한 아가씨가 카운터에 앉아 늘어지게 하품을 하다가 우리가 들어서자 황급히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일어섰다.
세개의 테이블 중 가장 안쪽으로 자리를 잡고 핸드백에서 손지갑을 꺼내어 계산대로 갔다.
마지막 커피는 내가 살게.
속으로 되뇌이면서 그에게 마지막 커피를 건넸다.
- 무슨 커피가 오천원씩이나 하네.
璡은 마치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촌뜨기처럼 오천원짜리 원두커피 한잔에 놀란 반응을 보였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나와 璡을 번갈아 보았다.
하긴 그 종업원의 입장에서 보면 멀쩡하게 생긴 여자가 초라한 행색의 남자와 눈내리는 야심한 밤에 커피숍에 들어와 커피값도 직접 계산하면서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 이상해보일 법도 했다.
하지만 난 그저 덤덤할 뿐이었다. 만일 상대가 내 연인이거나 내 남편이었더라면
밝은 불빛 아래 함께 동행한다는 것이 창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행색이 초라하건 말건,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전혀 개의치 않을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그의 처지가 안타깝기도 했지만 지금의 결과는 모두 璡 그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었으므로 현실의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던 이미 나와는 별개의 인생일 뿐이었다.
머그잔에 가득 담긴 원두의 진한 향이 추위를 녹여주는 듯 했다. 그와 마주 앉아서도 나는 연신 머그잔의 둥그런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릴 뿐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 보지 않았다.
- 나 결혼하고 이런데 처음이야.
옛날엔 솔직한 그의 모습이 믿음직스러웠고 그 진솔함에 혹해서 그를 가까이 하게 되었지만
지금 그의 가식없는 언행은 초라하기 그지없을 뿐 차라리 내 앞에서 거짓으로라도 당당했으면 하는 바램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그것도 그의 천성임을 잘 알고 있다.
일부러 과장을 한다거나 동정심을 유발한다거나 하는 성격이 못된다는 것을 예전부터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리들이 향토장학금이라고 이름 붙인, 고향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용돈으로
주머니가 두둑할때면 璡은 나를 맛있는 음식점과 인테리어가 세련된 찻집으로 데리고 다녔다. 그러다가 용돈이 바닥날 즈음이면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기 일쑤였다.
가진게 있으면 아낌없이 쓸 줄도 알고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에게는 아낌없이 베풀 줄도 아는 그였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살았길래 커피전문점이 처음이라 하는지 억지로라도 관심을 끊으려했던 내 의지가 슬슬 무너지고 있었다.
- 나 아마 7년만의 외출일거야.
박선배가 불러서 몇번 거절하다 나왔는데 이렇게 혜주를 만나게 될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미리 알았더라면 좀 멋있는 모습으로 나왔을텐데...
璡의 멋쩍게 웃는 모습이 너무 해맑아서 가슴에 알수없는 통증이 일어났다.
아주 오래전 첫 미팅때 나를 바라보며 입술 샐쭉이며 수줍게 웃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느 사이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 하나하나를 뚜렷이 살펴가면서.
- 내가 혜주 결혼하기 전날 전화로 했던 말 생각나?
璡의 물음에 나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璡 또한 내가 가부간 대답을 해주기를 바라면서 물은것은 아닐 것이었다.
물론 토씨 하나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지만 지금 璡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동조하고 싶지 않았다.
- 그때 난 진심이었어. 그래서 혹시나 하고 몇 년을 기다려 보기도 했고...다 내가 못난 탓이었지만.
두 평 남짓이나 될까 싶은 커피숍 안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져갔다.
카운터의 종업원도 귀를 쫑긋하며 璡의 말소리에 집중하는 눈치였다.
그러다 어느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약간 당황하는 기색을 하며 벽에 걸린 시계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저기...12시에 문 닫아야 되는데요.
아직 절반 쯤 남아 있는 식은 커피를 남겨두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눈발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이대로 마냥 기다리다가는 날이 새도록 택시를 잡지 못할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콜택시를 불렀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우리는 꽁꽁 얼어붙은 보도블럭을 떠날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