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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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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처럼 여울지다


BY 오틸리아 2022-08-08

각자 맺어진 짝끼리 마주 앉아 커플대화 시간이 되었다. 
 
나와 璡은 처음부터 구석자리에 앉았던 나로인해 璡이 내 맞은편으로 옮겨와 구석자리에 앉게 되었다. 누군가로부터 주목을 받는 것이 불편한 내 성격상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대각선으로 떨어져 앉았을 때 보았던 그의 실루엣은 가까이에서 보니 다소 차이가 있었다. 
전체적인 몸집으로 봤을 때는 커다란 앉은키와 가녀린 목 때문이었는지 많이 말라 보였는데 내 앞에 앉은 璡은 그 또래들처럼 적당한 골격에 매끈하고 흰 피부를 가진 남학생이었다. 
귀밑까지 기른 머리카락 끝이 핀컬파마를 한 것처럼 살짝 말려 올라간 것이 눈에 거슬렸다. 함께 나온 남학생들의 단정한 머리에 비해 어쩐지 불량스러워 보이는 곱슬기 있는 헤어스타일이 바람둥이처럼 느껴졌다.
 
- 반갑습니다. 경영학과 1학년 양 진입니다.
 
그가 먼저 이름을 밝히고는 수줍은 듯 입술을 샐쭉이며 웃었다. 
하얀 덧니가 보일락말락하는 그의 입술에 시선이 고정되면서 자꾸만 덧니에 신경이 쓰였다. 
 
- 혜주씨는 천주교 신자인가봐요?
 
璡은 어느새 내 이름을 외우고 있었다. 
 
- 네. 라고 짧은 대답을 하면서 그제야 아직도 내 묵주가 璡의 손에 들려있음을 알았다. 
그가 묵주를 내밀면서 세례명을 물었다. 
 
- 오틸리아...
 
딱히 존댓말을 쓰기도 그렇다고 딱 잘라 말을 트기도 어정쩡해서 뒤끝이 흐려졌다.
 
- 오.틸.리.아...예쁜 이름이네요. 왠지 혜주씨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미팅이란 것이 이렇게 시시한 건줄 몰랐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 하나쯤은 꼭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시를 줄줄 외던 
꿈 많고 풋풋했던 여고시절에 미팅에 대한 환상이 아주 컸었다. 
그즈음에도 제과점에서 여드름 송송 돋은 남고생들과 미팅을 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모범생 축에 끼는 나에게는 정말이지 꿈같은 일이었다. 
나중에 대학생이 되면 분위기 근사한 곳에서 꼭 멋진 남학생과 미팅을 해보리라는 환상을 가졌건만 내 생애 첫 미팅은 계획도 준비도 없이 그야말로 허무하게 이루어져 버렸다.
 
기껏 호구조사 같은 진부한 대화를 나누면서 점심 한끼 값에 맞먹는 비싼 커피나 홀짝거리는 이런 별볼일없는 소모적인 만남을 그토록 동경해 왔다는 것이 우스웠다. 
게다가 옆자리에서 나누는 대화까지 쓸데없이 다 들어야만 하는 이 밀집된 공간에서 얼른 탈출하고 싶어졌다.
 
- 우리 밖으로 나갈까요?
 
심드렁하게 앉아 옆자리 대화나 듣고 있는 내 모습에서 지루함을 읽었는지 璡이 먼저 자리를 일어섰다. 나는 주섬주섬 책을 챙겨 들고는 일행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커피숍을 나왔다. 
 
- 영화보러 갈까요?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璡이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내 손목을 잡아끌고 근처의 꽃집으로 들어갔다. 
 
- 무슨꽃 좋아해요?
 
그의 도발적인 행동에 당황하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목련...이라고 대답했다. 
璡은 막무가내로 꽃집 주인을 향해 “목련 한다발 예쁘게 포장해주세요.” 라고 소리쳤다. 
순간 풉. 하며 웃음이 터졌다. 
의아한 표정으로 주인이 되묻자 璡은 또 당당하게 “목련 한다발이요.” 하고 대답했다. 
나는 가만히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밖으로 나가자는 눈짓을 했지만 璡은 막무가내로 버티고 서있었다.
 
- 학생, 목련은 다발로 팔수 있는 꽃이 아니야. 더군다나 지금 목련이 어디 있다고, 아직 봉오리도 안나왔을텐데...
 
璡은 그제서야 목련을 포기하고 대신 장미와 안개를 섞은 꽃다발을 주문해서 기어이 내 손에 들려주고는 꽃집을 나섰다.
 
졸업식때 말고는 처음 받아보는 꽃다발이었다. 더구나 남학생으로부터. 
하지만 고맙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것도 타고난 성격이겠지만 누군가에게 고맙다거나 부탁한다거나 혹은 맘에 없는 칭찬같은 것들은 도무지 할 줄 모르는 꽉 막힌 계집애였던 내가 
처음 보는 남자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행복해하고 고마워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수 없었다.
 
璡은 나에게 무언가를 베풀었다는 충만감에선지 표정이 훨씬 밝아 보였다. 
그 성큼한 하체를 내 보폭에 맞추느라 천천히 걸으면서 
내 얼굴과 장미꽃다발을 흘깃흘깃 번갈아 보는 표정이 무척이나 흐뭇해하는 눈치였다. 
정상적인 보폭으로 걷지 못해서인지 璡의 상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약간씩 휘청이는 것처럼 보였다.
 
주말 오후 거리는 약간 쌀쌀한 날씨지만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어서인지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 화사한 봄볕 아래로 해방된 표정의 젊은이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