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이 자식?”
와락 달려들어 멱살을 움켜쥐고 마구 흔들어댄다. 한데 이균이 반항하지 않는다. 흔드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린다. 흔들어대던 걸 멈추고 허깨비인가 해서 들여다본다.
“왜? 겁나냐? 좀 섬뜩하지 않아? 죽은 사람을 보니까 저승이 눈에 보이지 않아?”
이균이 바짝 거리를 좁힌다. 애니가 놀라서 몸을 뒤로 뺀다. 괜히 몸이 오들오들 떨린다.
“그럴 거 없어. 나 저승사자 아니야. 니 목숨 따윌 헤칠 생각은 조금도 없어. 그러니 벌벌 떨지 마!”
이균의 말에도 애니는 경계심을 풀지 못한다. 몸을 사린다.
“그럼 니가 여긴 왜 왔는데?”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애니가 사력을 다해 묻는다.
“끝은 내야 할 거 같아서. 나 말고 또 한 사람 같이 왔는데?”
“누구야? 경찰이야?”
애니가 바짝 긴장해서 묻는다.
“죄를 짓긴 지은 모양이군. 경찰이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는 걸 보면. 하지만 걱정 마! 경찰은 아니니까.”
“경찰이 아니라고?”
“맞아. 나 경찰이 아니야.”
이선이 웃으며 들어선다. 애니가 마음을 쓸어내린다.
“으흐. 겁먹었던 모양이군?”
이선이 애니의 바짝 졸아 있는 얼굴로 시선을 던진다.
“이 여잔 누구야?”
애니가 말까지 더듬거린다.
“왜 엉뚱한 사람한테 묻고 그래? 나한테 물어!”
이선이 말을 가로챈다.
“누, 누굽니까?”
“나? 작가. 그대들이 훔치려했던 작품의 작가. ‘만 년의 사람’의 작가. 생각 안 나는 모양이지? 내 집 현관문까지 와서 마주친 적이 있는데. 허긴? 허둥대며 서둘러 빠져나가느라고 내 얼굴이나 봤겠어?”
이선이 아무렇지 않은 듯 웃는다. 애니가 눈을 멀뚱거리며 올려다본다.
“믿기지 않지? 아니 믿고 싶지 않지?”
이선의 시선이 애니의 눈 속으로 파고든다.
“노, 놀리는 거요?”
“놀리긴? 끝을 내러 왔을 뿐이라고 이균이 말한 거 같은데? 다시 한 번 말해줘? 끝을 내야 할 거 같아서 왔어.”
“이균 이 새끼, 너 처음부터 이 여자와 손잡고 나를 속여 왔던 거였어?”
“속고 속이고. 쌤쌤 아닌가? 너나 나나 주고받았어. 일방적인 건 없었어. 한데 작가는 끌어들이지 마! 우리 같은 속물 아니거든. 속물은 우리 둘로 족해.”
“속물? 그렇지 속물이었지. 한데 그게 어때서?”
이선이 경찰이 아니라서인지 애니의 결기가 다시 살아난다.
“그냥 속물이면 그래도 다행이지. 우린 생명을 가지고 장난친, 하늘에 반기를 든 속물이었어.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도 감사할 일이지.”
“한데 왜 저 여잔 데려왔어?”
“나 오려고 하지 않았어. 여기에 오자고 한 것은 내가 아니야.”
“그럼 저 여자야?”
이균이 고개를 끄덕인다.
“왜 왔어요? 내 꼴이 어떤지 보러 왔어요?”
애니의 못마땅한 눈빛이 이선에게로 옮겨진다.
“사무실이 엉망이네. 분풀이를 얘들한테 한 거야? 돈 벌려다 돈만 깨부쉈군. 와장창 말이야.”
“그래서 고소해요? 그거 눈으로 확인하니까 고소하냐고요?”
이선에게 악을 써대며 묻는다.
“고소할 거까지야. 나 니 꼴아지 따위는 관심 없어.”
“그럼 왜요?”
“내 작품 속으로 끼어들어 와준 거에 고맙다는 말은 해야 할 거 같아서. 덕분에 내 작품이 풍성해졌어. 똘똘한 애니민들도 만나고. 다 니들 덕분이야.”
이선이 대수로울 거 없다는 투로 말한다. 애니는 속이 쓰리다.
“애니민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보냈어.”
이균이 얼른 나선다.
“너한테 안 물었어.”
애니가 톡 쏘아붙인다.
“니들이 있는 이 시간대가 싫대. 떠나고 싶다더라고.”
“어디로요?”
“만 년으로. 그 시간대의 현실로 가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해줬어.”
“빌어먹을. 말도 안 돼. 니가 한 거야?”
애니가 이균을 날카롭게 쏘아본다.
“너와 함께 했어. 니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 혼자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었을 거야. 안 그래요?”
“맞아. 뫼가 고맙다고 전해달래. 짐을 다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게 해줘서. 고통도 잘 참아냈어. 옆에서 보는 우리가 외려 힘이 들었지.”
“난 끼워 넣지 말아요.”
애니가 딱 잘라내 자신을 빼낸다.
“얘 못 믿네. 자기 손으로 하나하나 삭제해놓고 말이야. 그 덕에 애니민들을 제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었는데 말이야.”
“믿거나 말거나요. 할 일 다 한 걸로 그만입니다.”
“믿기 싫으면 관둬! 억지로 믿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을 테니까. 뫼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르지? 알면 못했을 거야. 한데 뫼가 고통을 얼마나 잘 참아내던지! 외려 우리보다 잘 참아냈어. 옆에서 보는 우리는 모두 눈물 범벅이가 된 채 지켜봐야 했는데 말이야.”
이균과 이선의 말이 가슴을 후벼 판다. 신이 나서 한 일이 거드는 꼴이 되었다는 게 뼛속까지 아프다.
“빌어먹을.”
애니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왜? 믿어지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긴? 내 눈으로 확인했는데. 우릴 속이는 재미가 쏠쏠하던?”
“속인 건 아니고, 너를 좀 이용했지.”
“그럼 됐지 왜 왔는데?”
애니의 심기가 뒤틀린다. 말이 고분고분하지 않다.
“쫑은 내야 할 거 같아서. 많이 먹어! 내가 쏘는 거니까. 또 다시 만날 일은 없잖아. 물고 물어뜯을 일도 없고. 밖에서 잠글 일도 없고.”
이선이 가지고 온 음식 가방을 식탁에 올린다. 그리고는 애니를 돌아본다.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있다. 이균이 이선을 거든다. 천천히 손을 놀려 가방에서 꺼낸 걸 펼쳐놓는다. 그러면서 간간히 애니를 본다.
“밖에서 잠가줘서 고맙다. 그 덕에 정신이 바짝 나더라고. 니들 아니었으면 영영 덧에 갇힌 삶을 살 뻔 했다니까. 그 생각을 하니 섬짓하더라. 나도 그에 대한 보답은 해야 할 거 같아서 따라왔어.”
“이제 먹고 마시자! 그리고 뿔뿔이 헤어지는 거야. 어디서 마주쳐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냥 지나치기.”
이선이 펼쳐놓은 것들을 애니 앞으로 밀어준다. 족발에 피자, 닭발, 치킨이 애니 앞에 가득 차려진다.
“니가 좋아하는 것들이라면서? 니가 좋아하는 걸로 골라서 사왔어. 먹보라며? 내숭 떨지 말고 먹어!”
애니가 고개를 돌린다. 속이 뒤틀린다. 입을 실룩거린다.
“빈손이지만 니들은 해냈어. 원하는 걸 만들어냈잖아. 욕심만 죽여! 욕심이 지나치면 손에 잔뜩 쥐고도 늘 허한 법이거든.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허기가 그냥 찾아오는 게 아니라고.”
애니가 이선을 힐끔 쳐다본다.
“비아냥거리는 거 아닌가 해서 확인하는 거야? 그럴 거 없어. 먹고 거듭나란 뜻이니까. 오늘 원 없이 먹고 끝내. 그럼 세상이 좀 더 근사해보이지 않을까?”
“아줌씬 세상이 근사해보여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이유라도 있어? 난 하늘이 내일 날 데려간다고 내게 메일을 보내와도 울상은 안 해.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볼 시간을 허락해준 것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할 일이니까. 그것만큼 멋진 마지막이 있을까?”
“상당히 감상적이군요?”
“니 욕심이라면 그렇게 말해야겠지. 한데 내겐 니 욕심이 없어. 쓰잘머리 없는 말 이어가지 말고 어서 먹기나 해! 니가 좋아하는 것들이잖아.”
이선이 족발 하나를 애니의 손에 쥐어준다. 애니가 밀어내지 않는다.
“난 그쪽과는 생각이 달라요.”
“누가 뭐래? 먹어! 쫀득쫀득한 게 벌써 침이 넘어가잖아. 당기는 입맛 억지로 밀어내지 말고 먹으라고.”
애니가 마지못해 손에 든 걸 입으로 가져간다. 그러더니 게걸스럽게 먹어댄다.
“왜 하필 만 년의 사람이었어요?”
속이 차니까 마음이 차분해진다. 애니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죽을 거 같은데 너무 허무하더라. 그래서 내 발자국 찍는다 생각하고 썼던 거였어.”
이선이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어디 아파요?”
“이젠 많이 좋아졌어. 하늘이 좀 더 이곳에 두려나봐.”
애니가 안쓰럽게 쳐다본다.
“그렇게 볼 거 없어. 내 말했잖아. 내일 하늘이 데려간다고 해도 난 울상은 짓지 않는다고.”
“그러고도 남을 거 같네요.”
“감상적이라더니 그새 생각이 바뀐 거야?”
“아깐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 눈이 흐릿해 잘 안 보였는데, 이제는 제대로 보이네요.”
“그새 내 안을 꿰뚫어봤다고? 그 머리 허투루 쓰지 마라!”
애니가 멍하니 쳐다본다.
“앞으론 이렇게 살지 말라고. 인간의 생명가지고 장난치지 말라고. 결과가 과정은 아니잖아.”
‘언제는 고맙다더니?’
애니는 이선의 알쏭달쏭한 말을 곱씹으며 다시 하나를 집어 든다.
“아참. 내 하나 빠트렸다.”
애니가 한 입 베어 문 채 이선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이선이 그런 애니를 보고는 씩 웃는다.
“다른 게 아니라, 행여 거리에서 낯익은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두 번은 쳐다보지 마! 인연이 닿아 있으면 생판 낯선 사람도 낯익어 보이게 마련이니까. 할 말 다 했으니까 난 이제 갈게. 둘이 잘 지내!”
마지막 말을 남기고 이선이 문 밖으로 사라진다.
애니가 먹는 걸 잠시 멈추고 사라지는 이선의 뒷모습을 따라간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뱉은 말도 곱씹는다. 그리곤 피식 웃는다.
갓 스물을 넘긴 이균이 여자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가물가물 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