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가 한쪽에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끼어든다. 뫼는 빠져나갈 틈새라도 찾은 듯 얼른 누리에게 시선을 돌린다. 때 맞춰 끼어들어준 누리가 고맙다. 들과 이든, 아미와 버들도 뭔가 하여 누리에게 눈길을 옮긴다.
“이대론 안 되겠어. 역할이 필요할 거 같아. 그냥 흐르는 대로 놔뒀다간 서로 눈치 보는 일이 많아질 거 같아. 그러다 서먹서먹해지면 혼자 사는 거나 다를 바가 뭐 있겠어. 만나지 않았던 게 더 나은 꼴이 되겠지. 그래서 말인데, 난 모두의 먹거릴 책임질게. 그게 내 역할이다. 이제 니들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꺼내 놓아봐. 그래야 서로의 역할을 정할 수 있잖겠어? 그럼 서로 미루는 일도, 그로 인해 섭섭하거나 서운할 일도 없을 거 아냐. 눈치 볼 일도 없을 테고. 게다가 역할을 다 해내면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쓸 수도 있고. 어때?”
누리의 말에 뫼는 고마우면서도 속을 들킨 것으로 움찔한다. 살짝 눈을 내리깐다.
“어때가 아니야! 지금 딱 필요한 말이야. 한데 야, 니가 웬 일이냐! 너 누리 맞아?”
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리를 본다. 들뿐만 아니라 다들 마찬가지다.
“좋아. 난 여자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볼게. 우리가 어떻게 만 년으로 오게 됐는지도.”
뫼가 고개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제일 먼저 꺼내 놓는다. 사실 그는 누리가 그 말을 꺼내준 게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솔직히 그 자신도 서운한 마음만 가졌지 거기까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는 누리가 단순한 숲-체질만은 아니라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자신에겐 없는 뭔가가 그에겐 있어 보인다. 암튼 고마운 일이다.
이든은 자신으로 해서 생긴 일 같아 조금은 미안하다. 그래 그런 건 아니지만 누리의 말이 싫지는 않다. 그도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서로 크게 어긋나지 않고 생각과 관심이 다른 여섯이 그나마 맞춰갈 수가 있다 여긴다. 생명체란 어차피 제각각이다. 생각도, 말도, 행동도 같을 수가 없다. 그래 틀이라는 게 필요하다. 누리가 때맞춰 잘 생각해 냈다. 고맙다.
“난 인류의 멸망과 관련한 자료를 찾아볼게. 대신 나머지 시간은 내 맘대로 할 거다?”
틀 속에 들어가더라도 여지는 남겨두어야 한다. 틀에 갇혀 그 안에서만 빙빙 맴돌다보면 미쳐 나자빠질 게 빤하다. 이든은 자신은 뫼와는 다르다 생각한다.
“그래. 그러라고. 그래도 할 일은 하고 놀아라!. 만날 내일 내일 미루지 말고.”
“그렇게 정곡을 찌르면 나 울 거야?”
누리의 말에 이든이 으름장을 놓는다. 누린 이든의 으름장에 끄떡도 하지 않는다.
“야, 나 울 거라고?”
이든이 목청을 돋워 다시 한 번 으름장을 놓는다.
“울어! 누가 울지 말래?”
누린 한술 더 떠 되받아친다. 한 치도 흔들림이 없이 냉정하다.
이든은 웃자고 말했다가 본전도 못 찾고 물러난다. 다들 그런 이든을 보면서 비실비실 웃음을 흘린다. 이든도 따라 웃고 만다.
“야! 니들도 어서 말해! 누리 말이 역할이 있어야 한다잖아.”
그래도 곱게는 물러날 수가 없다. 엉뚱하게 버들과 아미를 겨냥하여 말을 날린다.
“난,······”
버들은 말을 채 맺지 못한다. 할 게 퍼뜩 생각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뫼가 하겠다고 했으니 그다지 부담도 없다. 그래도 할 일이 없는 게 아니다. 다만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한참을 머릿속을 더듬는다. 다들 그런 버들을 보며 입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난 청소할 게.”
한바탕 웃음이 쏟아진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바람을 집어넣었다가 빵하고 터진 기분이다.
“야, 버들! 그걸 말하기 위해 그렇게 뜸을 들였냐? 무슨 대단한 거라도 나오는 줄 알았잖아?” 이든이 비꼰다.
“대단한 거야. 너 청소를 생각이나 해봤어? 지는 생각도 못 해 봤으면서. 청소 안 해봐? 집안 꼴이 어떻게 되는지.”
버들도 지지 않는다.
“그래 대단한 거다. 그 대단한 걸 생각해 냈는데 더 대단한 걸 해보면 어떠냐? 머리가 아깝지 않냐?”
이든이 밀고 들어간다. 버들은 실실 웃는다.
“봐주라. 나도 누리-파야. 머리 쓰는 건 젬병이라고. 내겐 몸 쓰는 것만 맡겨. 알았지? 괜히 나 때문에 일 그르치지 말고.”
“알았어. 청소는 버들이다.”
누리가 얼른 매듭을 짓는다. 이든도 더는 참견하지 않는다.
“들, 아미, 니들은?”
“난 자료 찾는 일을 거들게.”
“그래. 들은 자료 찾는 책상머리-체질로 끼어. 아미, 넌?”
“나? 뭘 하지? 생각 좀 해 보고.”
아미가 서성이며 할 거리를 찾는다. 다들 아미를 내버려 두고 소곤거린다.
“생각났어. 난 자료를 정리할 게. 것도 우리 중 누군가 해야 할 일이지? 정리를 하면 뫼나 이든, 들이 훨씬 수월하게 일을 할 수 있을 거 아냐. 안 그래?” “맞아. 그러니까 너도 골수는 아니지만 책상머리-체질이네? 그렇게 해. 혹시 그 새 마음 바뀐 사람? 나중에 투덜대지 말고 지금 말하기.”
누리가 모두를 둘러본다.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다.
“그럼 역할 정하기는 끝. 난 가서 먹거리 챙겨온다.”
누리가 밖으로 뛰어나간다.
“어유. 확실하네. 역할이 무섭긴 무섭다. 봤지, 누리? 누리가 역할이 뭔지 확실히 보여준다. 다들 허튼 생각 말라는 뜻 같다. 나도 얼른 가서 자료를 찾아봐야겠다.”
뫼도 일어나 화면 앞으로 간다. 줄줄이 몸을 돌려 흩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