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자판을 두드리느라 여념이 없다. 화면 앞으로 다가가자마자 자판 두드리는 소리부터 들려온다.
뫼는 자판 두드리는 소리에 집중하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러다 머릿속이 멍해짐을 느낀다. 한참을 자세히 들여다본 후에야 그게 뭔지 알아낸다. 그의 행동이 먼저인지 아니면 여자의 상상이 먼저인지 알 수가 없다. 그동안은 여자의 상상이 먼저라고 생각해왔다. 한데 그게 아리송하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여자의 상상이 먼저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그의 행동이나 생각이 여자의 상상과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그는 머리를 굴린다. 2013년, 여자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있다. 2013년에 여자가 화면 앞에서 쓰고 있는 글이 1만 년에 그대로 일어나고 있다. 1만 년의 화면에도 여자가 쓰는 글이 그때그때 올라오고 있다. 그 사이에는 7987년의 긴 세월이 넘나들 수 없는 망망대해처럼 가로놓여 있다. 둘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오직 화면뿐이다. 그것도 같은 공간에 나란히 놓여있는 것처럼 가지런하다.
‘화면을 없애면 어떻게 될까? 그리되면 여자가 글쓰기를 멈출까? 그럼 우린?’
갑자기 몸이 한기가 든 것처럼 떨린다. 소름이 돋는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적어도 여자의 상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까진 여자가 글쓰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다행이 여자는 글쓰기를 멈출 뜻은 없는 모양이다. 여자의 중얼거림이 다시 들려온다.
‘만 년의 사람. 만 년의 사람.······.’
여자가 제목을 바꿀 뜻은 없어 보인다. 느낌에 여자가 제목을 싫어하는 거 같지는 않다. 한데도 여자는 자꾸 제목을 되뇌고 있다. 왜일까? 문득 글의 방향을 찾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여잔 만 년의 사람을 되뇌며 방향을 생각하고 있다.
눈길을 걸어가던 여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뼈만 앙상하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거 같은 여자가 조심스레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다. 그런 여자가 글쓰기에 푹 빠져있다.
뫼는 여자가 궁금하다. 글은 매일같이 올라온다. 여자가 살아있다는 뜻이다. 여자의 중얼거림도,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도 들려온다. 하지만 여자의 모습은 화면에서 사라지고 없다. 대신 글이 채워지고 있다. 그뿐이다. 여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연명하고 있다. 그런 느낌이다.
‘왜일까? 살아내기도 버거울 거 같은 몸으로 왜 화면 앞을 떠나지 못하고 글을 써내고 있는 걸까?’
뫼는 까닭이 뭐일지 따져 헤아려본다. 하지만 잡히는 건 없다. 대신 여자의 눈빛만이 살아서 반짝인다. 제 안의 것을 다 태워서라도 글을 써내겠다는 의지의 반짝임 같다.
시선이 화면으로 옮겨간다. 여자의 모습은 이내 사라진다. 생각은 화면 앞에서 정지된다. 눈길이 여자의 글을 따라간다. 여자의 생각이 보이는 듯도 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잡히지는 않는다. 잡힐 듯 말 듯 애만 태운다. 그저 멍하니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다.
시끌시끌 여럿의 소리가 어우러져 들려온다. 밖에서 들려오고들 있다. 뫼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본다. 문 쪽은 조용하다. 아직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들려온 곳은 화면이다. 여자가 써 놓은 글을 읽고 그의 뇌가 만들어낸 환청이다. 어이가 없다. 기분도 나쁘다. 여자의 낚싯줄에 걸려든 느낌이다. 그는 화면을 노려본다. 아무런 생각도 다가오지 않는다. 그냥 기분이 나쁘다는 생각만 다가온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그 사이 들이 다가와 이맛살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걱정스레 묻는다. 뫼는 고개를 든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들이 보인다. 이든도 누리도 버들도 바짝 다가오고 있다.
“내가 여자의 상상에 낚였어.”
“뭔 말이야? 알아듣게 애기해 봐!”
“여자가 화면에서 니들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는 부분을 쓰고 있었어. 한데 그 부분을 읽고는 니들이 옆에 와 있다고 착각을 했어.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그래 돌아봤지 뭐야. 한데 니들이 없더라고. 낚였다는 것을 알고 나니 씁쓸하더라.”
“여자의 의도가 뭘까?”
들이 의아하게 묻는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알면 알수록 스스로가 없어져간다는 생각이다. 처음 멋모를 땐 누군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한데 함께 있을 사람들 다섯을 얻었음에도 마음은 개운하지가 않다. 벗어나보려고 애를 써 봐도 소용이 없다.
들 역시 마음이 말끔하지가 않다. 꺼림칙하다. 밖에서 웃고 떠들 때만 해도 까마득히 잊고 있던 것들이다. 그런 것들이 여자 앞에만 서면 주렁주렁 끌려온다.
“내 느낌인데, 아무래도 우리의 감각기관이 여자의 글에 먼저 반응하는 거 같아.”
뫼가 좀 전의 일에서 느낀 것을 말한다.
“그걸 어떻게 알아?” “느낌이라고 했잖아. 지금은 느낌일 뿐이야. 니들은 그런 생각 안 들어?” “글쎄? 니가 그럴지도 모른다고 하니까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들이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무슨 그런 어정쩡한 말이 있어?”
“아냐. 어정쩡하긴 해도 그럴 수 있어. 나도 들처럼 그렇거든. 니 말을 듣고 나서 내 마음을 더듬어 보니 그런 것도 같아. 하지만 그뿐이야. 딱히 짚어낼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그래서 애매하게 여겨지는 거야.”
이든이 들의 말에 설명을 보탠다. 뫼는 더는 토를 달지 않는다. 지금으로선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하지만 원래는 가지런할 거라는 생각이다. 자신들이 몰라서 헤매다 보니 뒤죽박죽처럼 느끼고 있을 뿐이다. 이든도 들도 마찬가지다.
“그래. 지금은 이게 정상인지도 몰라. 드러난 게 없어서야. 여자도······.”
뫼는 여자가 아직 방향을 온전히 잡지 못했다는 말을 하려다 그만둔다. 그 말을 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모두의 마음에 불안감을 가득 안겨주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그것만은 피해야 한다. 다들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내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다. 2013년의 환상을 꿈 꾸고 있다. 여자가 그걸 허락할 리가 없다. 만 년이다. 만 년에 2013년을 고스란히 옮겨놓을 거 같으면 상상은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 같다. 여자가 그리고 싶은 만 년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 속이 답답해온다. 뭘 어떻게 어디부터 들춰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여자도 뭐?”
들이 뫼가 하려다 만 말을 놓치지 않는다.
“아냐.”
“할 얘기가 있었던 거 아니었어?” 들은 뫼가 갑자기 얘기를 뚝 끊는 게 이상하다. 그래 뫼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뫼는 들에게서 건너오는 시선을 외면한 채 앞을 보고 있다.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알았어.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들이 샐쭉한다. 뫼가 왜 말을 하다 말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걸 알아낼 수도 없다. 뫼가 꼭꼭 여미고 있다. 조금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들은 이든 옆으로 간다. 이든은 화면 앞에서 이러저러한 것을 검색하고 있다.
“삐졌어?”
뫼가 다가가면서 묻는다.
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이든이 열어놓은 화면만 들여다본다. 별 것도 아닌데 괜히 서운하다. 그럼에도 귀에서는 뫼의 말이 촉촉하다.
뫼는 들의 삐짐이 어색하다. 그래 말길을 트고 싶다. 하지만 들은 들은 척도 안 한다. 뫼는 스스로를 다독인다. 들의 서운한 마음도 곧 풀어질 거라 믿는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화면 앞으로 다시 몸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