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가 뼈를 풀숲으로 가져가 버린다. 다들 누리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누리를 짐승 보듯 했던 시선은 온 데 간 데 없다.
“다들 모르는 것을 넌 어떻게 알았어?”
버들이 틈을 보다 묻는다.
“또 말해줘? 몸에서 아우성을 해대서 알았어. 신물이 나면서 혀가 열매를 밀어내는데 난들 어째. 혀한테 왜 그러냐고 닦달할 수도 없고.”
“왜 너가 그걸 제일 먼저 겪은 거지?” “움직임이 많아서 그래. 움직일 때마다 몸에 저장된 힘을 쓰게 되는데, 숲-체질이라 누리가 제일 많이 움직이잖아. 게다가 열매는 고깃덩어리에는 있는 뭔가가 부족해. 힘을 내는데 필요한 뭔가가. 물론 내 생각이야.”
뫼가 그럴듯하게 설명한다.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우린 다들 너무 달라. 이것도 여자가 치밀하게 계산해서 상상으로 만들어낸 거겠지?”
“아마 그럴 거야.” 이야기가 여자에게 가서 머문다. 표정들이 시무룩해진다.
“정말 상상만으로도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걸까?”
들이 힘없이 말한다. 믿음은 흔들리는데 여자는 내려놓을 수가 없다.
“글쎄? 실은 나도 그게 마음이 쓰여. 여자일 거라는 생각을 버릴 수도 없으면서 고개가 갸웃거려져. 3013년의 과학자들도 내려놓을 수가 없고. 그들도 인류를 멸망에서 구해내려고 애를 썼다잖아. 그런 그들이 몰랐겠어? 지구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걸. 보통 사람도 아닌 과학자들인데 말이야. 그럼 복제인간을 만들어내도 소용이 없다는 것도 알았겠지.”
뫼가 활기를 되찾은 목소리로 말한다. 고기 몇 점을 먹었다고 몸도 마음도 이전으로 돌아와 있다.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목소리에서도 힘이 느껴진다.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냐. 천 년이라는 시간적 거리를 무시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나도 그게 걸려. 여자도 과학자들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야. 어쩜 여자의 상상과 과학자들의 상상이 함께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요즘엔 그런 생각도 들어.”
“여자는 그냥 글을 쓴 것뿐이라면, 생각할 수 있는 건 3013년의 과학자들뿐이야. 정말 3013년의 과학자들이 여자의 상상을 밑그림으로 생명을 만들어냈을까? 과학이 그 정도로 발달했던 걸까? 한데 그들은 왜 지구는 살려내지 못했지? 인류를 멸망에서 건져내는 것보단 그게 쉬웠을 거 같은데. 인간을 산 채로 7987년 동안 잠재워 만 년으로 보내는 것보단 지구를 살려내는 것이 훨씬 멋진 일이데 말이야. 고작 여섯을 인류라고 말하기도 그런데.”
들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뫼는 들이 뱉어내는 대로 그녀의 말을 따라간다.
“자연의 보복 앞에서 손도 써보지 못하고 인류가 떼죽음을 당했어.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구해낸 게 고작 여섯이야. 말이 안 돼. 여자의 글엔 그런 부분이 나타나 있지도 않아. 그냥 가능성만 열어두고 있을 뿐이야.”
뫼가 들의 생각을 이어간다. 생각 이어 말하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둘 다 아닐 가능성은?”
뫼와 들이 아미를 본다.
“여자가 글은 썼지만 그건 여자의 상상일 뿐이잖아. 상상으로 보내는 게 어렵다면, 또 다른 누군가도 생각해볼 수 있는 거 아냐? 인류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쓰고 있는 걸 보면 사람 꼴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거 아냐? 써 먹는 재주도 다양했을 테고. 화면에서 봤잖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생기가 넘쳐났던 거. 그게 다는 아니었을 거 아냐? 거대한 자연의 질서를 무너뜨릴 만큼 문명이 발달했어. 여자의 글에도 있었잖아. 인간이 이룩해낸 문명이 인류를 덮치기 시작했다는 안타까움을 그 안에서 읽었었잖아. 인류를 덮치기 시작했던 문명, 그걸 일구어낸 과학자들. 그때도 있었어. 글을 쓴 여자도 3013년의 과학자들도 아닌 21세기의 과학자들.” 아미가 다부지게 생각을 드러낸다. 뫼도 머릿속에서 생각을 굴린다. 아미의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온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던 거지? 맞아. 21세기의 두뇌파들.”
“정확히 2013년 이후의 두뇌파들이지. 여자가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게 2013년이었으니까.”
“아미 니 말이 맞아.”
뫼가 아미의 말에 격하게 맞장구를 친다.
“2013년의 두뇌파들이라면? 3013년의 과학자들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야?”
들이 뫼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묻는다.
“2013년이라면.”
“그럼 찾기가 더 어렵다는 뜻이잖아.”
“응.”
뫼의 목소리가 바로 힘을 잃는다. 여자 아니면 3013년의 과학자들이라고 생각할 때만 해도 길만 찾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것도 버거워 한참 헤매고 있는 중이다. 한데 2013년의 두뇌파들은 버거움을 넘어 힘이 쭉 빠진다. 길보다도 실체를 찾아내는 게 먼저다.
“실망하기엔 아직은 일러. 아무것도 모르던 때도 있었어. 그리고 여기까지 왔어. 빈손은 아니잖아.”
들이 뫼를 다독인다. 힘을 잃고 마음까지 주저앉을까봐 마음을 졸인다.
“빈손이나 다를 바가 없어. 어느 하나도 손에 쥔 게 없다고? 여자? 3013년의 과학자들? 2013년의 두뇌파들? 셋 중 하나라는 확신도 없잖아. 그냥 빈손인 게 허전해서 주워들어본 것에 지나지 않아. 누가 왜를 찾다가 눈에 띈 걸 놓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들고 있는 것뿐이야.”
아미가 싸늘하게 말한다. 김이 빠진다. “그럴지도 몰라. 그래도 거기까진 밀려나진 말자! 헛다리를 짚고 있다고 해도 주저앉는 것보단 일어서서 움직이는 게 나아. 나중에 아니라는 게 드러나면 어때? 보잘 것은 없지만 아직은 그게 힘이 돼주고 있는데. 난 여기서 주저앉고 싶지 않아, 아미.”
뫼가 아미의 말을 밀어낸다. 아미가 떫은 표정을 짓는다. 누리가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한다.
“나도 한마디 할게. 난 그런 걸로 힘 빼는 건 싫어! 이것저것 건드려 보는 것도 싫고. 그냥 일렬로 세워! 여자를 맨 앞에 세우면 되겠네. 우리 앞에 제일 먼저 나타났으니까. 여자를 상대해서 아니라는 게 밝혀지면 그 다음으로 넘어가면 되잖아.”
누리가 단칼에 매듭을 짓는다.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 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손에 쥔 게 많다면 추려내기라도 해야 한다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다. 고작 세 가지뿐이다. 그걸 가지고 옥신각신하는 건 시간낭비다. 그럴 바엔 차라리 한 자리에 빙 둘러앉아 히히덕거리는 게 낫다.
뫼는 할 말을 잃고 누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역시 누리다워. 이럴 땐 숲-체질이 딱이야. 나도 누리 말에 찬성이야. 여자부터 상대하자! 우리 앞에 맨 먼저 나타난 게 여자잖아. 우리가 여자의 상상을 바탕으로 살아내고 있기도 하고. 여자부터 상대하는 게 옳아. 한꺼번에 모두를 상대할 수 없다면 여자부터여야 해.”
이든이 누리를 추켜세운다. 그런 다음 자신의 논리를 내세운다.
“나도 누리 말에 한 표.”
버들도 누리 쪽으로 붙는다. 아미가 자신의 말이 씹히기라도 한 듯 쌩한 표정으로 돌아선다. 뫼가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괜찮을 거야. 아미도 생각이 있어. 무턱대고 우겨대지는 않아. 잠시 섭섭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뫼 니 편을 든 것도 아니잖아. 너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도 마음은 쓰이거든. 돌아서면 다른 것으로 생각이 옮겨가서 아닌 것처럼 보일 뿐이지.” 이든이 걱정을 내려놓으라는 뜻으로 말한다. 그러면서 뫼에게도 약하게 한 방 날린다.
“누가 뭐래?”
“여잘 꼭 찾아내라. 찾아내서 내 앞에 끌고 와! 내가 아작을 낼 테니까.” “넌? 넌 숲-체질이라는 핑계를 대고 뒷짐 지고 있으려고?”
“난 그쪽으론 젬병이잖아. 내가 주변에 있으면 외려 걸리적거릴 걸? 그러니까 일찌감치 물러나 있을게.”
누리가 아양을 떨 듯 헤실거린다.
“여자가 아닐지도 몰라.”
뫼가 다시 일깨운다. 하지만 그도 여자를 온전히 놓아주지는 못한다. 어쨌든 여자가 글을 썼고, 자신들은 여자가 쓴 글의 등장인물들이다. 그것은 누가 뭐래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니 여자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아니라 해도 책임을 아주 피해갈 수는 없다.
“아니면 다행이고. 그래도 지금은 아니니까 너그러울 건 없어.”
“알았어. 끌고 올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할게. 그럼 난 들어간다? 여자를 끌고 오려면 이렇게 있을 수 없잖아.”
뫼가 먼저 몸을 일으킨다. 이든이 뫼를 주저앉히려 하는 걸 누리가 나서서 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