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의 몸이 토끼를 향해 붕 뜬다. 그의 손이 쭉 뻗어나가는가 싶더니 토끼가 그의 손에 아슬아슬하게 잡힌다. 토끼가 발버둥 친다. 하지만 빠져나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누리가 흐뭇하게 발버둥치는 토끼를 높이 들어 올리고 바라본다. 얼굴이 온통 웃음꽃으로 환하다.
뫼와 이든도 누리의 손에 잡힌 채 발버둥치는 토끼를 본다. 뫼는 발버둥치는 토끼가 안 됐다고 생각한다. 이든은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이든이 성큼성큼 누리에게로 걸어간다.
“어, 요놈 봐라? 니가 토끼냐? 난 이든이다. 만나서 반갑다.”
이든이 토끼의 앞발을 잡고 살살 흔들어댄다. 놀란 녀석의 눈에 겁이 가득하다. 그 눈빛에서 뫼는 여자의 상상 속에서 빠져나오려는 자신을 본다.
‘여자도 누리처럼 웃고 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도 저 토끼처럼 겁을 잔뜩 먹었을까?’
그런 것도 같다.
‘여자의 상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여자가 상상하는 것만 겪게 되겠지? 저 토끼는 누리가 놔주지 않는다면 어찌 되는 거지?’
“누리! 그 토끼 어떻게 할 거야?”
뫼가 누리의 속을 슬쩍 떠본다.
“구어 먹어야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 날아온다.
“뭐라고? 먹겠다고?”
먹는다는 말에 뫼가 놀란다.
“왜? 먹으면 안 되냐? 사자가 주둥이에 온통 피범벅을 하고 고깃덩어리 뜯어먹는 걸 봤다며? 우리도 동물이야. 남의 살도 적당히 들어가 줘야 한다고. 난 그동안 요놈이 고팠어.”
누리가 입맛을 다신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그러니까 너도 사자처럼 피 범벅을 하고 뜯어먹겠다고?” “왜? 그럼 안 되냐? 난 아무렇지 않은데, 넌 그게 싫어? 누가 글도령 아니랄까봐.”
누리가 얼결에 뫼를 몰아붙인다. 뫼는 어물어물한다. 그러면서 눈살을 찌푸린다. 글도령이라는 말을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남자다움 내지 강인함이 빠져있다는 뜻으로 다가온다.
“아무래도 난 육식동물인가보다. 넌 초식동물 해. 세상의 모든 동물들이 넘의 살만 먹고 사는 건 아니잖아.”
누리가 눈치를 채고 얼른 둘러댄다.
“넌 육식동물, 난 초식동물?”
“왜? 것도 싫어?”
뫼는 누리의 말을 곱씹는다. 초식동물을 되새김하는데 버석거린다. 초식동물을 끌어당기려고 손을 내밀려다 만다.
“그게 선택해야 하는 거냐? 난 내가 초식동물인지 육식동물인지 헷갈린다. 넌 니가 육식동물이란 걸 어찌 알아? 고기 맛을 본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복잡하게 말해? 열매만으로 버틸 수 있으면 초식동물인 거지? 나야 요놈의 살점이 고프거든. 열매만으론 양에 안 차. 벌써 입안이 군침으로 가득하다. 봐!”
누리가 입을 크게 벌리고 고인 침을 혀끝으로 흘린다.
뫼와 이든이 얼굴을 찌푸린다.
“짜식, 그렇게 할 거까지.”
이든이 얼굴을 찌푸린 채 한마디 한다.
“신경 쓰지 마! 글도령은 풀과 나무 열매만 먹고 사는 줄 아냐? 물도 마셔.”
뫼가 쏘아붙인다. 그렇다고 누리를 겨냥해 앙갚음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입이 근질근질하다보니 말에 좀 힘이 들어갔을 뿐이다. 하지만 왜인지는 자신도 알 수가 없다.
“얌마, 니 세상에 와 있다는 티 좀 작작 내. 온갖 티를 다 낼 거면, 우린 왜 오자 했냐? 니 둘러리로 세우려고 데려왔냐? 그럴 바엔 아예 짐승이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녀라! 적당히 거리라도 두고 살게. 넘의 살점을 먹어야 하는 육식동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너 혼자만 생각하고 그렇게 해. 난 사정해도 꿈쩍 안 할 거니까.”
누리가 거들먹거리며 혼자 아는 척 하는 게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이든이 톡 쏘아붙인다.
“그만 하자! 토끼도 한 마리 잡았는데 돌아가는 건 어때? 숲을 누빌 만큼 누비고 돌아다니기도 했고. 그래서 그런지 몸이 가뿐하지 않아? 배만 채우면 딱일 거 같아. 뱃속에 거지가 들었나봐? 막 먹어대도 자꾸 허기지는 게.”
뱃속이 요란하다. 몇 끼를 굶은 것처럼 아우성을 친다. 뫼가 꿀꺽 군침을 삼킨다.
“나도 실은 배가 고파. 열매 좀 따 먹고 가자!”
말을 하고 이든은 열매로 다가간다. 그의 뱃속도 시끌벅적하다. 눈에 띌 때마다 열매를 따서 먹었음에도 허기가 가시질 않는다. 정신없이 배를 채운다. 배가 이내 빵빵해진다. 한데 속이 여전히 허전하다. 부족한가 해서 열매를 따 입으로 가져간다. 한데 삼켜지지가 않는다. 물린다.
“열매만으론 안 돼. 배는 채웠는데 허기는 여전해.”
누리가 손을 털어낸다.
“그래서, 그 놈이 고프다고? 넘의 살점을 넣어줘야 한다고?”
이든이 돌리지 말라는 뜻으로 말한다.
“그게 어때서? 사자도 호랑이도 먹는데? 우리도 사자 호랑이나 다를 바가 없어. 걔들은 고상 떨 줄 몰라서 그렇게 먹는 줄 알아? 몸이 요구하니까 먹는 거라고. 몸에서 집어넣어 달라고 보채니까. 달리 고상 떨며 먹을 방법이 없으니까. 내 몸도 지금 보채고 있어. 달래줘야지. 그러려면 먹어줘야지.”
누리가 거침없이 말한다. 뫼는 누리의 말에 달콤하게 빨려든다. 열매를 아무리 먹어대도 허전하다는 누리의 말이 그의 입맛을 자꾸 자극한다. 입에 군침이 가득 고여 있다.
“고상 떨며 먹을 순 없어?”
이든이 어이없는 눈빛으로 뫼를 본다. 뫼는 이든의 눈길을 느낀다. 하지만 물러서고 싶지 않다. 누리 말대로 고프다. 몸이 요동치며 보채고 있다.
“고상?” “사자처럼 피범벅을 하고 먹을 순 없잖아.”
“먹고는 싶고?”
“나도 너처럼 그래. 열매는 아무리 먹어도 든든하지가 않아. 그래서.”
이든은 뫼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뫼 맞나 하고 보고 또 본다.
“지난 번 일 이후로 기운이 자꾸 달려. 열매를 먹어도 돌아서면 그만이고. 이러다간 먹는 걸로 하루를 다 보내게 될지도 몰라. 넘의 살점을 먹어주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고. 그 놈을 보니까 군침도 돌고. 육식동물인지 초식동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입에도 군침이 가득 고였어.”
뫼가 이든의 눈치를 살핀다. 육식동물이라는 게 몸에 달라붙은 가시처럼 걸리적거린다. 그래도 그걸 떼어낼 수가 없다.
이든은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다. 정말 뫼인가 해서 다시 한 번 뚫어지게 쳐다본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봐도 뫼 맞다.
“너도 먹고 싶다는 뜻이야?” 이든이 놀란 목소리로 묻는다. 뫼는 이든을 힐끗 쳐다보고는 말이 없다.
“설마 그런 건 아~니지?” 이든이 뫼를 압박한다.
“저 녀석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도 모르겠어. 배는 빵빵한데 자꾸 침이 고여. 열매를 먹자니 입에서 밀어내고.” 뫼가 흐물흐물 꼬리를 내린다.
“말도 안 돼. 누리야 그렇다 쳐. 어떻게 뫼 너까지?”
이든이 어이없어 한다.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어.”
뫼가 자조적으로 말한다.
“이든, 너 자꾸 그런 식으로 몰아가지 마! 이건 조물주도 간섭할 수 없는 문제야. 그러니까 내버려두고 있는 거잖아.”
뫼가 피식 웃는다. 이든도 어이없는 웃음을 쏟아낸다.
“왜?”
“난, 뫼 너는, 누리와 다르다고 생각했어. 한데 그게 아니잖아. 내 생각이 보기 좋게 엇나갔어. 철석같이 믿었던 것도 한 순간에 무너질 수가 있다는 거잖아. 그게 씁쓸해서. 앞으로도 그런 걸 겪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