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든과 뫼가 누리의 난데없는 한방에 옆으로 휘청한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다. 장난기가 발동한다.
“어쭈! 날 밀쳤어? 한판 붙어볼까?”
뫼가 주먹을 쥔 채 누리에게로 다가선다. 누리도 주먹을 쥐고 가볍게 뛰며 뫼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린다. 이든이 실실 웃으며 둘의 주변을 빙글빙글 돈다. 들과 아미, 버들은 멀찌감치 비켜선다. 그들도 재밌는 구경거리는 놓치고 싶지 않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둘을 지켜본다.
누리가 먼저 팔을 뻗어 공격을 한다. 뫼가 슬쩍 피한다. 이든의 눈이 잽싸게 움직인다.
누리는 연신 주먹을 날린다. 뫼가 굼뜨게 움직이다 누리의 주먹에 한 방씩 얻어맞는다. 뫼의 눈이 꿈틀거린다. 장난처럼 실실 웃던 웃음이 싸하게 걷힌다. 뫼의 팔이 누리 쪽으로 쭉쭉 뻗기 시작한다. 누리가 요리조리 몸을 피한다. 뫼의 혈기가 제대로 솟는다. 주먹을 쥔 팔을 번쩍 치켜든다. 한 방 거칠게 후려질 기세다.
주변이 싸늘해진다. 들과 아미, 버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이 된다. 이든이 얼른 끼어든다.
“됐어. 이제 그만. 근육질은 누리, 너라는 거 인정할게. 뫼, 넌 두뇌-파야. 근육질이 아니라고. 근육질은 누리에게 양보해. 아무래도 누리가 그동안 얌전히 있느라 몸이 근질근질했나봐. 봐! 이 통통한 팔을! 단단한 게 나무토막 같지 않아? 이런 녀석을 옭아매놓았으니 오죽 답답했겠냐.”
이든이 나서서 둘을 멀찍이 떼어놓는다. 뫼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 한데 이상하다. 몸이 개운하다. 뻑뻑하던 몸이 매끄럽다.
누리는 개의치 않고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다. 오랫동안 가뭄에 시달리다 단비를 만난 나무 같다.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가볍고 날렵하다.
버들이 웃으면서 누리에게 다가간다.
“타고난 근육질인 거야? 한 번 만져 봐도 돼?”
“버들, 역시 넌 날 알아보는구나? 몸이 왜 이렇게 가뿐하니 좋은 거지? 아까까지만 해도 무거웠었는데. 니들도 한 번 나처럼 펄쩍펄쩍 뛰어봐! 기분이 훨 좋아져.”
누리가 들과 아미, 버들에게 말한다. 들은 조마조마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피식 웃는다. 누리답다는 생각을 한다.
뫼가 누리를 흘낏 쳐다본다. 맘껏 휘갈겨 주고 싶다. 하지만 생각뿐이다. 누리의 단단한 근육질이 그의 눈에도 들어온다. 장난으로 살살 내려쳤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한데 살살 내려치는 건 누리 쪽에서일 뿐이었다. 그에게는 찌릿한 통증이었다. 통증이 가실 새도 없이 이어지자 슬슬 오기가 붙었다. 한 번 덤벼보자 생각하고 달려들 심산이었다. 한데 이든이 끼어들었다. 덤벼들어야 하는데 외려 맥이 탁 풀렸다.
“야 누리 너, 힘이 남아돈다고 함부로 쓰지 말고 아껴둬! 쓸 때가 있을지 모르니까.”
이든이 뫼를 밀고 가면서 누리에게 말한다. 뫼는 힘을 뺀 채 이든에게 몸을 맡긴다. 누리도 투덜거리지 않는다. 누리도 뫼도 이든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몸은 개운한데 마음은 찝찝하다. 마음 같아선 모든 걸 내려놓고 맘껏 치고받고 해보고 싶다. 몸이 완전히 풀릴 때까지 치고받다가 바닥에 드러누워 깊은 숨을 들이쉬고 싶다. 한데 그 생각이 꺾이고 만다. 여섯, 한 번도 거기에서 놓여난 적이 없는 거 같다. 아리다. 사는 게 고달픈 것도 아닌데 서글프다. 누리가 부럽다. 매이지 않고 속내를 다 드러내며 사는 누리가 한없이 부럽다. 허탈함을 드러내지 못하고 몸을 돌린다.
누리는 여전히 가볍게 뜀뛰기를 한다. 팔을 쭉쭉 뻗어 보기도 한다. 그 때마다 몸이 통통 튀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낀다. 아쉽다. 이든이 끼어드는 바람에 너무 빨리 끝나버리고 말았다. 뫼가 기를 쓰고 달려들 때는 그 역시 아차 했다. 뫼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자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몸 구석구석 끼어 있던 찌꺼기가 빠져나가는 상큼함을 내려놓고 싶지 않았다. 누리는 뫼도 그걸 느낄 거라 생각했다.
뫼가 돌아서는 걸 보고 이든은 누리에게로 다가간다. 누린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뗀 채 몸 풀기를 그치지 않는다.
“자식.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덤볐냐? 뫼는 그냥 장난이드만.”
“죽기 살기로 덤비긴? 그냥 기분이 좋아서 주먹이 나가는 대로 슬쩍슬쩍 뻗어본 것뿐인데. 뫼가 그렇게 화를 낼 줄 누가 알기나 했냐? 화낼 줄 알았으면 그냥 건드리기만 하는 건데.”
“그게 슬쩍슬쩍 이었냐? 내 보기엔 쭉쭉 이더만.”
“못 믿긴? 몸은 뛰고 있었지만 팔은 슬쩍슬쩍 뻗치기만 했어. 나도 장난과 몸싸움이 다르다는 건 알아.”
“그렇게 몸이 근질근질했냐? 그동안 어떻게 참았냐?”
“어떻게 참긴? 참고 있다는 것도 몰랐지. 니들이 하는 말은 도통 귀에 들어오지 않고, 몸은 뻐근한데 그게 뭔 줄 몰랐지. 난 아무래도 꼴통인가 봐.”
“꼴통까지야? 그냥 좀 지나쳤다는 거지.”
누리가 이든 옆으로 와서 앉는다.
“그게 아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 걱정하며 사는 거. 나도 그 생각을 놓을 수 없어. 여섯뿐이라는 게 몸에 착 달라붙어서 떨어져나가질 않아.” “아마 뫼도 그랬을 거야. 그렇지 않고야 내가 떠미는 대로 밀려갔겠냐? 골이 난 김에 끝까지 들이받았겠지. 한데 너도 그런 생각을 하기는 하냐?”
이든이 믿기지 않는 듯이 누리를 쳐다본다. 누리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게 영 낯설다.
“그럼? 무슨 배짱으로? 혼자 떠도는 뜨내기도 아닌데. 나 니들 없이는 못살아. 니들도 그거 알잖아.”
통통 튀기만 할 거 같은 누리의 목소리가 흐늘흐늘하다. 그게 이든의 마음속으로 흘러든다.
“인류의 멸망에서 선택되어 여기 보내졌다고 생각해봐도 전혀 기쁘지가 않아. 겪고 싶지 않은 것들이 군데군데 도사리고 있는 느낌이야. 그게 삶인가? 뫼와 들은 내려놓고 살아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 누가, 왜, 어떻게, 에 매달리잖아. 넌 쥐어 줘도 털어내기 바쁘고.”
이든이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털어내긴? 그냥 빠져나가지. 미안해서 붙들고 싶어도 그걸 잡을 힘이 없나봐?”
“이 근육질에도?”
“그래, 이 근육질에도 그렇다? 왜 아니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