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좀 맞아보자!”
누리가 해를 향해 두 팔을 뻗어 올린다.
“그래. 3013년에는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 없었던 곳 아니야? 그때 못 쬔 햇볕을 마음껏 쬐자고. 여자의 상상 속에 갇혀 있으면 어때? 우리에겐 3013년의 사람들에겐 다가가기 힘들었던 햇볕이라는 축복이 있는데.”
버들이 분위기를 바꾸려고 말을 띄운다.
“정말 그러네? 여자의 상상 속이라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마음껏 쬐어도 탈이 나지 않는 이 찬란한 햇빛과 마음껏 들이마실 수 있는 신선한 공기, 먹을 수 있는 달콤한 열매들이 이렇게 널려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우린 행운아들이라고. 이제부턴 하루에 한 번쯤 바꿔서 생각해보자고? 이런 행운이 꼬리를 물고 줄 서 있을지 어찌 알아?”
들이 맞장구를 치고 나선다. 말만이 아니다. 마음이 덩달아 덩실거린다. 여자의 상상 속이라는 덫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해 무겁기만 했던 마음이다. 3013년이 끼어들면서 혼란스러워진 마음이다. 그래도 삭막하지 않은 자연이 다소곳이 옆에 있다. 먹을 것도 부족하지 않다. 나눌 사람도 있다. 그 생각을 하니 착잡했던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 생각, 접수했어.”
이든이 얼른 동참한다. 뫼도, 아미도, 누리도 줄줄이 엮여온다.
다들 하늘을 올려다본다.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부시다. 3013년, 지구를 활활 태웠던 그 태양에서 뿜어 나오는 햇살이다. 그 햇살에 실려 있던 열기는 가시고 지금은 따끈따끈함만 느껴질 따름이다. 나무도 풀도 햇살을 받아 더욱 푸르다. 햇볕이 있어서 마냥 풍성할 뿐이다.
“햇볕을 쬐니까 마음이 밝아지는 느낌이야. 니들은 안 그래? 난 칙칙했던 마음은 이미 다 달아나고 없어.”
우중충함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걸 느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버들은 홀가분하다. 맘껏 숨을 들이마신다. 햇살까지도 빨아들이고 싶다.
“이상해. 나도 그래. 밖에 나와 햇볕을 쬐어서 그런가? 아깐 기분이 좀 꿀꿀했는데 지금은 그게 씻어낸 듯 싹 달아났어.”
아미도 활짝 웃는다. 신경을 곤두세우게 했던 짜증은 어디로 갔는지 없다. 그저 맑은 햇살 속에서 뿜어져오는 뽀송함으로 달콤하다.
“분위기 파악 좀 하지?”
누리가 고갯짓을 한다. 버들과 아미, 들이 해를 향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다. 햇살이 쏟아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같다. 뫼와 이든이 ㅎㅎ 웃는다. 누리가 둘을 잡아끈다.
웃음소리와 함께 소곤거리는 소리가 숲으로 난 길을 따라 멀어진다. 들과 아미, 버들은 ㅋㅋ 웃는다.
“우린 여기 있으면 되는 거지? 뒤쫓아 가지 않아도 되는 거지? 신난다.”
버들이 기분 좋게 속닥인다. “그럼 우린 풀이나 잘라내 볼까?”
“좋아. 심심한데 잘 됐어.”
셋이 쪼그리고 앉아 풀을 손으로 쥐어뜯는다. 뫼와 이든, 누리가 만든 공터에 다시 뾰족뾰족 풀이 올라오고 있다. 3013년에는 달아오른 대지에서 말라죽었던 풀이다. 그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게 고맙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앉을 자리에서는 얌전히 있어주기를 바란다.
“넓적한 돌도 여기로 가져오자!”
주변에 널려있는 돌들을 주어다 가지런하게 바닥에 깔고, 넓적한 돌을 그 위에 얹는다. 마음이 뿌듯하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지?”
들이 뿌듯함을 쏟아내며 미소를 짓는다.
“뫼, 이든, 누리도 감탄하겠지?”
“당연히 그래야지. 안 그럼, 두들겨주자!”
아미가 버들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뫼와 이든, 누리는 셋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셋은 열매를 건넨 후 쪼그리고 앉아 손으로 식탁을 쓰다듬는다.
“2013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하고 볼품없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거친 돌덩이면 어때? 바닥보다는 훨 나은데.”
누리가 감탄을 줄줄 쏟아낸다. 얼굴은 온통 미소로 넘쳐난다.
“맞아. 우리 앉을 돌들도 주워오자!”
말을 하고 이든이 돌무더기로 간다. 다들 이든의 뒤를 따라 우르르 몰려간다. 각자 제가 앉을 돌들을 찾아낸다.
금세 제법 그럴 듯한 식탁과 의자가 만들어진다. 들과 버들, 아미가 열매를 돌판 위에 올린다. 소박하지만 행복은 소박하지 않다.
따끈한 햇살과 달콤한 열매, 푸른 하늘. 주변은 공것들로 가득하다. 게다가 배도 불러온다. 배부른 돼지가 따로 없다. 나른하니 졸음이 쏟아진다.
한소끔 눈을 붙이고 일어난다. 머리가 맑고 개운하다.
“삶이 별건가? 이런 게 삶이지. 앞으로도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다.”
버들이 기지개를 켜더니 말한다.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다. 들은 버들을 보며 같은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내 밀어낸다. 행복은 달콤하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가 없이 주어지는 행복은 의미가 없다. 다소 거칠고 험난해도 자신의 의지로 헤쳐 가며 살고 싶다. 그 마음이 없다면 들도 버들의 생각을 밀어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버들의 마음까지는 엉망으로 만들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버들과 자신은 서로 다는 걸 꿈꾸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버들을 보며 웃어 보인다. 하지만 속으론 여자를 떠올리며 벼르고 있다.
‘아무리 달콤함으로 달래고 얼러도 주저앉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리 힘으로 억눌러도 눌리지 않을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린 반드시 당신의 상상에서 벗어날 겁니다. 그때를 위해서 오늘은 행복을 연습합니다.’
“그래. 지금은 행복이라는 단물을 마시자! 단물이 앞에 있는데 물리는 것도 예의는 아니잖아. 게다가 지금 마셔보지 않으면 나중에 실컷 마실 수 있게 됐을 때 단맛이 뭔지 모를 수도 있잖아. 그러면 너무 서글프지 않아?”
“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나도 미리미리 겪어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 니들은 안 그래?”
버들이 반색을 한다. 아미가 그런 버들을 보고 피식 웃는다.
“아미, 왜 그렇게 웃는데?” “니 감상을 누가 막을 수 있는데? 그래서 일찌감치 따라주려고. 어이, 사내들! 그렇게 폼 잡지 말고 이렇게 웃어보지?”
아미가 손으로 입 꼬리를 올리며 말한다. 뫼와 누리, 이든도 끝까지 참지 못하고 활짝 웃는다.
“허긴, 좋네. 부드럽게 속살거리며 스쳐가는 바람, 따끈따끈하니 피부를 말갛게 씻어주는 햇살, 바람에 지들끼리 스치며 내는 풀잎소리, 그리고 그 무엇보다 내 옆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는 니들. 이만하면 여자와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안 그래, 이든, 뫼?”
누리가가 이든과 뫼를 툭툭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