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들을 바라본다. 그 다음 말을 꺼내라는 눈빛들이다.
“왜 하필 여자의 작품 속 등장인물로 우리가 여기 이 만 년에 와 있느냐고? 여잔 인류의 멸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듯한데 말이야. 여자를 떠올리면 이상한 게 너무도 많아. 작품 속 등장인물인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도 이상하고, 여자가 우리 앞에 나타난 것도 이상하고, 여자의 글이 우리 화면에 올라오는 것도, 31세기가 아니라 2013년까지의 자료들이 도배를 하고 있는 것도 이상해. 31세기의 과학자들은 땅속에 꽁꽁 숨었는지 보이지도 않아. 우리가 살아내는 삶은 여자의 상상을 뼈대로 하고 있고. 여자의 글이 우리가 살아내는 걸 앞지르는 것도 아냐. 여잔 작품을 써가고 있는 중이야. 완성된 게 아니야. 아무래도 그게 이상해. 3013년이라면 이미 작품은 완성됐어야 해.”
들은 여자와 2013년을 도로 주워든다. 대신 3013년의 과학자들은 밀려난다. 주워들고 싶어도 건더기가 보이지 않는다. 저절로 힘을 잃는다.
“글쎄? 여자와 인류의 멸망, 어떤 끈이 닿아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 31세기는 텅 비었어. 과학자들뿐만이 아냐. 일반 사람도 없어. 자료를 찾아들어오기는 했지만 이게 다야. 다른 것은 보이지도 않아. 마지막 인간도 글만 남겼지 모습은 어디에도 없고. 게다가 니 말대로 3013년이라면 작품은 끝이 드러나 있어야 마땅해. 한데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시간 이후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어. 현재까지의 이야기만 존재해.”
뫼도 꺼림칙함을 털어놓는다. 들과 뫼의 말에 다들 시무룩해진다. 말을 꺼낸 들도, 뫼도, 나머지도 화면 속 자료 앞에서 멍한 채 서 있다.
“우리 힘으론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어.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모를까. 그냥 무시하고 이대로 사는 건 안 되는 거야?”
누리가 모두의 눈치를 살피며 말한다.
“몰랐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알면서 무시하고 살아내는 건 쉽지 않아. 끊임없이 들끓는 생각에 발목이 잡힐 거라고. 그때마다 늘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며 살 수는 없어. 뒤늦게 후회할 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담 그건 바람직한 게 아니야. 적어도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다면 말이야. 게다가 이 문제를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면. 그렇다면 이걸 해결하는 것은 우리 몫이어야 해.”
뫼가 냉정을 되찾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득하듯 말한다.
“나도 뫼와 같은 생각이야. 다음 세대들은 홀가분하게 자신들의 삶을 살아내야 해. 아주 먼 과거에서 여기로 온 게 그들이 아니니까. 그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니까. 그러니까 그건 우리 문제야. 노력도 해보지 않고 미리 포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봐. 그건 다음 세대에게 영원히 갚을 수도 없는 빚을 지는 거나 다를 바가 없어. 적어도 우린 어정쩡한 선조가 되어선 안 된다고 봐.”
들이 누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난 그냥 해결할 수 없을 거 같아서.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 아닌가, 해서. 하지만 알았어. 되든 안 되든 해보자고. 발목을 잡히는 것보단 그게 낫다면 가보는 수밖에.”
누리가 뒤로 쏙 몸을 빼낸다. 본전도 못 찾을 거 괜히 말했다 생각한다.
“뭐가 이렇게 복잡한 거야? 우릴 이 만 년으로 보냈으면 만 년에 적응해서 살게 놔두든지, 아니면 돌려보내든지. 왜 우릴 끊임없이 우리 삶과 상관도 없는 것들을 들춰내며 이렇게 머리 터지게 하는 거야?”
아미가 짜증을 낸다. 밑도 끝도 없이 다가오는 새로움에 차츰 질려가는 모양이다.
“오늘은 이만 하자. 앞으로 갈 길이 먼데 여기서 진을 다 빼면 나머지 길을 갈 수가 없잖아.”
뫼가 마우스에 손을 올린다.
“나 때문이라면 그만 둬! 우린 하루라도 빨리 여자의 상상에서 벗어나야 하잖아. 자꾸 새로운 게 더해지는 걸 참을 수가 없었어. 나 이제 괜찮아. 그러니 신경 쓰지 마!”
아미는 뫼의 말이 거슬린다. 마치 자신을 겨냥하여 쏟아낸 말처럼 들린다. 속이 상한다.
“아미, 너 때문이 아니야. 나도 너랑 똑같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뭐라 말을 하고 싶어도, 참견을 하고 싶어도 뭐가 뭔지 몰라서 끼어들지도 못해. 그러니까 우리 잠시 머리를 식히자! 나도 그 놈의 것들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듣고만 있어도 머리가 지끈거려.”
버들이 아미를 토닥이며 말한다.
“감상파이니 오죽하겠어. 머리 싸매는 일은 젬병인데.”
누리가 섭섭함을 털어냈는지 버들에게 다가오며 말한다.
“그렇지? 니가 보기에도 내가 그렇게 보이지? 난 곁다리로 보냈나봐.”
버들이 자조적으로 말한다. “그래도 난 니가 있어서 살맛이 나더라. 니가 있어서 그나마 웃을 수 있잖아. 니가 없는 세상, 그건?”
누리가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건 뭐?”
기다리다 못한 버들이 누리에게 말하라고 압박을 한다.
“뭐는? 3013년의 모래벌판이지.”
아미가 키득키득 웃는다. 버들도 어이가 없는지 웃음을 쏟아낸다.
“왜? 믿기지 않아? 그럼 널 싹 빼내 봐! 3013년의 모래벌판만 떠다니잖아. 뫼도 들도 이든도 모래벌판 얘길 하잖아. 화면에도 모래벌판이 딱 버티고 있고 말이야. 니가 없으면 아미도 저쪽으로 붙겠지? 난 끼어들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을 거야.”
누리가 제법 그럴 듯하게 말을 늘어놓는다. 버들이 씁쓸하게 웃는다.
“우리 중에 니가 꼭 있어야 하는 이유야. 모두 다 뫼와 들 같다면? 웃음이 뭔지도 모르고 살게 될 거야. 모래벌판을 걷는 거나 다를 게 뭐가 있어.”
누리가 버들을 한껏 치켜세운다. 뫼와 들을 겨냥할 생각은 없었지만 둘이 구석으로 몰린다. 둘은 누리의 말을 곱씹는다. 누리의 말이 화살촉으로 날아와 가슴에 박혔는지 아프다. 그래도 누리의 말을 밀어낼 수가 없다. 같은 것도 버들에게 가 닿으면 웃음꽃으로 피어난다. 하지만 둘에게 주어지면 무거운 돌덩이로 변한다. 그건 바람직한 게 아니다. 주어진 상황에 매달리는 게 썩 좋은 것만은 아닌 듯하다. 웃을 수 있는 여유도 필요하다. 한데 그걸 늘 잊는다.
“맞아. 이번엔 누리 말이 틀리지 않아. 넌 그 재주 하나는 타고 났어. 곁다리 같은 소린 입에도 올리지 마!”
들이 씁쓸함을 걷어내려 힘줘 말한다.
“그럼, 나도 가슴을 쫙 펴볼까? 내가 있어야 사는 맛이 난다는데?”
버들이 움츠렸던 몸을 곧게 세운다. 옥아 있던 어깨가 쫙 펴진다. 몸을 곧추세우고 뫼와 들이 있는 곳으로 사뿐사뿐 걸어간다. 누리가 ㅋㅋ 웃는다.
“버들이니까.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해.”
아미도 ㅋㅋ 웃는다. 버들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얄밉지가 않다. 누리 말대로 버들이 있어야 웃음이 의미를 띠고 다가온다. 쿡쿡 쑤셔대던 통증도 힘을 잃는다. 웃으니까 아무렇지 않다.
“배고픈데 끼니 좀 때우고 하지?”
아미는 뫼와 들을 툭툭 친다. 배를 움켜쥐고 고프다는 시늉을 해 보인다. 밥 때를 넘겼다는 것을 알린다.
“배 안 고파? 먹고 하자고.”
“알았어. 오늘은 정말 그만 하자!”
뫼와 이든이 몸을 돌린다. 다들 패거리가 되어 우르르 밖으로 나선다. 해가 쨍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