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 모르지. 기억나는 게 없으니 생각해 볼 게 이것들밖에 없잖아. 그렇다고 확신이 있어서는 아니야. 가정을 해서 접근해볼 뿐이지. 혹시 다른 것들이 끌려와줄까 하는 바람에서.”
뫼가 처지를 들먹이며 누리의 타박을 밀어낸다. 사실 그도 자신이 없다. 누리 말대로 자연은 밑도 끝도 재기 어려울 만큼 거대하다.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도 믿을 수가 없다. 자연의 앙갚음에 속절없이 무너질 문명이라면 문명치고는 치졸한 문명이다. 그럼에도 자료의 내용을 아주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내 말은 생각해볼 가치도 없다는 거냐? 화면 속의 자료가 더 믿음이 간다는 거야?”
누리가 뫼의 말에 발끈한다. 어깃장을 놓는다.
“그게 아니야. 나도 알 수가 없어서 그래. 모른다고 그걸 핑계로 그냥 멍하니 있을 수는 없잖아. 어느 쪽으로든 생각을 굴려봐야 하잖아. 그래야 찾아낼 가능성이 높으니까.” 뫼는 누리의 어깃장에 물러나지 않고 되받아친다. 누구 하나라도 잃는 건 원지 않기에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은 피해왔다. 그렇더라도 속말까지 참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생각을 꺼내야 생각을 좀 더 넓게 굴릴 수 있다. 그래야 가능성에 좀 더 빨리 다가갈 수 있다.
“널 탓하려는 건 아냐. 난 그냥 자연환경 때문에 인류가 멸망했다는 게 영 믿기지 않아서 그래. 2013년에도 멀쩡했고, 지금도 멀쩡한 지구가 모래뿐이었다는 게 상상이 안 돼서. 우리가 어떻게 여기로 왔는지는 너도 나도 몰라. 그리고 너만 가정해보란 법은 없어. 내가 놀자-파이긴 하지만 머리는 굴러가. 그러니까 내 생각을 그렇게 깔아뭉개지 마!”
누리의 말에 뫼의 가슴이 뜨끔하다. 자신의 생각에 빠져서 누리의 생각을 밀어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누리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미안. 내가 내 생각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나봐. 니 생각을 밀어낼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말이야.”
“나도 알아. 나야 생색내기로 툭툭 던지지만 넌 줄곧 거기에 매달리고 있잖아.”
뫼가 수그리고 들어오자 누리가 한 발 뒤로 물러난다.
“사실이라면 인류가 멸망 직전에 누군가가 써놓은 글 같아. 더는 글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그래. 그렇다면 그가 마지막 인간이었을 가능성이 커.”
이든이 이야기를 원점으로 다시 돌린다. 뫼는 화면에 뜬 글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누리에게 언성을 높인 뒤끝이 개운하지 않다. 뭐라 대꾸할 마음이 일지 않는다. 그렇다고 누리에게 언짢은 마음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좀 어색하다. 마음도 무겁다. 인류가 지구를 멍들게 하고, 그 대가로 인류가 멸망했다? 그리고 자연은 되살아났다? 생각대로라면 아마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자료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의 계산이다. 누리의 말대로 팍 와 닿지 않는다. 한데 그걸 믿지 않는다 해도 글의 내용을 무시할 수가 없다.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가슴이 아리다. 왠지 자신들의 삶을 미리 내다본 그런 느낌이다.
‘사실이라면 지구에 풀과 나무가 다시 자라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왜 인간은 되살아나지 못했을까?’
뫼의 생각은 차츰 자료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어간다. 자기도 모르게 그걸 인정한 물음들이 다가온다. 하지만 어느 것도 알 수가 없다. 더는 그걸 확인해줄 자료도 전설도 사람도 없다. 괜히 쓸쓸하고 서글프다. 다들 그와 마찬가지로 아픔을 억누르고 있는 모양새다. 아무도 말이 없다. 침묵이 길게 이어진다.
“한데 왜 2013년일까? 그리고 왜 3013년일까?”
들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연다. 인류가 자신들의 업보 때문에 3013년에 와서 멸망했다는 게 가슴을 뭉근하니 아프게 하긴 하다. 하지만 생각을 멈추게 할 만큼은 아니다. 차라리 칼로 도려내듯 아프다면 낫겠다. 그러면 생각도 멈출 거 같다.
잠시 그 생각에 붙들려 할 말을 잊는다. 그때 여자가 떠오른다. 여자가 글을 쓰고 있던 때는 2013년이다. 인류가 멸망한 때보다 까마득히 오래 전이다. 여자와 인류의 멸망, 만 년의 사람. 무슨 끈이 닿아 있는 걸까? 갑자기 그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