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가 화면을 확대한다. 일기 같기도 한 내용이 화면에 뜬다.
‘서기 3천 13년 3월 8일. 해가 쨍쨍 내리쬔다. 밖에는 모래폭풍이 불어대고 있다. 내일은 이곳을 떠나야 한다. 살려면 한곳에 머물 수가 없다. 끊임없이 자연의 심술을 피해 움직여야 한다. 풀은 보이지도 않는다. 나무도 없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리 푸른빛이 보였었다. 한데 오늘은 그마저 사라지고 없다.
해는 어제나 다름없이 쨍쨍하다. 눈앞에 펼쳐진 대지를 뜨겁게 달군다. 땅은 나날이 사막으로 변해간다. 살아있는 인간의 수도 줄어만 가고 있다. 얼마 안 가 마지막 인간이 죽어 없어질 날이 올 것이다. 한낱 시체가 되어 햇볕에 통나무처럼 말라 뒹굴 날이 멀지 않은 거 같다. 어쩜 내가 마지막 인간일지도 모른다. 두렵다. 내가 살아있는 마지막 인간이라면 나의 죽음은 인류역사의 끝이라는 뜻이다. 난 그게 두렵다. 얼른 어떤 해결책이 나왔으면 한다. 하지만 그건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땅 밑 깊숙이에서는 과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인류를 살려낼 궁리를 짜내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너무 늦었다. 이렇게 한가하게 앉아서 글을 쓸 시간도 점점 줄어간다.
대지는 타들어가고 사람들이 살 곳은 점점 줄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아무도 아이를 갖지 않는다. 과학자들이 끊임없이 복제인간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고 있지만 그들도 견디지 못하고 픽픽 쓰러져 죽어간다. 인류가 앞만 바라보고 달려온 결과다. 너무 참혹하다.’
“옥신각신할 필요도 없네. 이거야말로 빼도 박도 못할 확실한 증거 아냐? 3013년의 조상이 살아남은 인류에게 이 문제로 더는 티격태격하지 말라고 써놓은 꼴이 됐어. 뭐가 이래? 읽지 않은 게 나을 뻔 했어. 도대체 자연환경이 뭐기에. 이렇게 거대한 자연을 나약한 인간이 어찌 했기에? 아무리 인류의 문명이 발달했다고 해도 그게 얼마나 무시무시했기에?”
누리가 자조적으로 말하는 듯 하더니 이내 원망으로 옮겨간다. 들은 화면의 글을 읽고 또 읽고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누리의 말이 가시가 되어 온 몸을 찔러댄다.
“가만! 그렇게 벌레 씹은 얼굴들 하지 말고 함께 머리를 맞대보자! 먼저 내 생각을 말하면, 우리에게 인류의 멸망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하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우리를 누가 어떻게 여기로 보냈는지 그게 알고 싶은 거잖아. 지금까진 여자가 보냈을 거라고 믿었고. 하지만 이 자료를 보면 3013년의 과학자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인류를 살려낼 궁리를 짜내다 방법이 없으니까 이 만 년으로 우릴 보낸 건지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이건 슬퍼할 일이 아니야. 외려 운이 좋은 거지. 자연의 보복에 희생될 운명에서 선택되어 살아났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까?”
버들이 모처럼 눈망울을 굴리며 말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실소를 터뜨린다. “버들, 대단해. 이 상황에도 감상적이 될 수 있다는 게. 운이 좋아서 이 드넓은 지구에 달랑 여섯만 선택되어 남겨졌다고? 차라리 함께 부대끼며 살았던 사람들 옆에 시체로 나뒹구는 게 낫지.”
누리가 버들의 말을 씹는다. 그의 말에 버들은 멋쩍어진다. 그래 눈을 치켜뜨며 입을 삐죽 내민다.
“아냐. 그럴 수도 있어. 우리가 운 좋다는 말에 웃음이 나오긴 했지만 버들 생각이 맞을 수도 있어.”
뫼가 버들의 생각을 두둔한다.
“그건 아닐 거야. 7987년 동안 잠을 잔 게 사실이라면 들어맞지가 않아.”
들이 과학자들은 밀어낸다.
“그거야 조작을 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어. 우리를 만 년으로 보낼 정도면 그건 식은 죽 먹기 아니었을까? 자료쯤이야 입력하기 나름일 테니까.”
뫼는 과학자들을 끌어당긴다. 여자보다는 과학자들이 더 믿음이 간다. 상상보단 과학이 더 그럴 듯해 보인다. 여자의 상상을 바탕으로 살아내고 있으니 여자를 아주 떼어낼 수는 없다. 하지만 그건 삶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방법은 아닐 수도 있다 생각한다.
“조작? 3013년의 과학자들이? 니 말대로 자료쯤이라면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우린 여자의 상상에 따라 살아내고 있어. 7987년을 건너뛰어 여기로 왔고. 그런 것들은?”
들이 뫼가 잘라내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붙들고 있는 문제점을 들춰낸다.
“나도 그게 이상해. 2013년도 3013년도 1만 년도 모두가 현실로 존재했다는 것이 낯설긴 해.” “아니야. 3013년은 현실이 아니야. 2013년이야 여자가 살아내고 있는 시간대니까 현실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어. 하지만 3013년은 아니야. 과거에 묻혔어. 자료만 있을 뿐이야.”
들이 뫼가 놓친 부분을 또다시 짚어준다.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럼 우릴 조작한 건지도 모르지.”
“아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야. 2013년에서 건너왔다고 해도 그냥은 보내지 못했을 테니까. 기억이 모두 지워진 걸 보면 그래. 여자의 글에 맞물려 살아내도록 설정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뫼의 말이 터무니없게 들리지 않는다. 들도 여자를 떠올린다. 글은 써대도 산 사람을 7987년 동안 잠재웠다가 만 년에 깨어나게 할 능력은 없어 보인다. 상상 속에서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아니다.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는다. 한데 그렇게 정리를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다. 여자가 자신들 앞에 나타난 게 영 이상하다. 그냥 글만 썼다면 굳이 여자가 7987년을 건너 뛴 만 년의 화면에 나타날 이유가 없다. 게다가 2013년의 세상도 마찬가지다. 화면엔 2013년까지의 자료들이 도배를 하고 있다. 열리는 것마다 2013년까지의 자료들이다. 다른 것들은 애써 찾아들어가야 겨우 만날 수 있다. 3013년의 과학자들이 여자의 작품을 읽었던 걸까? 그럴 수도 있다. 여자가 작품을 썼던 그 해를 기점으로 선택했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닐 것이다.
“뭐, 짚이는 거라도 있어?”
들이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지켜보다 뫼가 혹시나 해서 묻는다.
“아니. 하지만 아주 불가능한 얘기는 아냐. 과학자들이 여자의 글을 읽었을 수도 있어. 그럴 경우 인류의 멸망을 막을 대안으로 선택했을 수 있다는 생각은 들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들은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데 무게를 둔다. 섣부르게 단정 짓는 것은 피해야 한다. 아직은 그럴 처지가 아니다. 3013년의 과학자들로 몰아가는 건 옳지 않다 생각한다. 그러기에는 여자가 내려놓아도 좋을 만큼 가볍지가 않다. 그녀도 탐탁지 않은 구석이 많다.
“땅속에서 인류를 살려낼 궁리만 해댄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잠든 시점을 2013년으로 하는 게 어렵지 않았을 수도 있어. 것도 함께 궁리를 했을 거 같거든. 3013년의 지구는 펄펄 끓는 가마솥이잖아. 햇볕은 쨍쨍 내리쬐고, 모래바람은 사납게 불어대고. 어디를 봐도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3013년의 지구는 삭막함뿐이잖아. 우리에게 기억하게 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어. 깨어나서 그걸 떠올리는 것은 끔찍하잖아. 나도 개인적인 생각이야.”
뫼가 제법 그럴듯한 근거를 끌어온다. 그도 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개인적 생각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누린 인상을 찌푸린다. 3013년은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어디를 봐도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는 불덩어리 지구라면 머릿속에 들어있던 것도 지워내고 싶다. 하지만 들과 뫼의 말은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3013년의 과학자들일지도 모른다는 얘길 하는 거야? 우리가 모래바람을 피해 그 황량한 지구를 떠돌다가 선택돼서 여기로 왔다고? 2013년엔 멀쩡했던 지구가 천 년 만에 그렇게 됐다고? 인간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죽음을 깔고 앉아 있는 걸로도 부족해 제 손으로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고? 인간이? 그래서 영웅심에 범벅이 된 몇 명의 과학자들이 고심 끝에 우릴 이곳으로 보냈을지도 모른다고? 3013년의 알량한 과학자들이?”
누린 3013년의 과학자들도 못마땅하다. 지구가 온통 사막으로 변했다는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인간이 스스로 멸망을 자초했다는 것도 미덥지 않다. 뫼와 들이 들먹이는 가능성이라는 게 형편없이 초라하게 여겨진다.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마저 맘에 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