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의 시선이 하나의 길을 낸다. 북받쳐 오르던 슬픔은 사라지고 뫼의 얼굴에 미소가 뜬다. 들은 뫼를 멍하니 바라만 본다. 영 알 수가 없다.
“숲에 다녀오는 거야?”
뫼가 벌떡 일어나며 묻는다. 속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응. 넌 왜 그러고 있어?”
들이 어색하게 입을 뗀다. 뫼가 쑥스럽게 웃기만 한다. 말을 하지 않고 생각만 하는데도 멋쩍다.
“울었던 거야?”
뫼의 눈가가 촉촉하다. 뫼는 여전히 말은 없고 씩 웃기만 한다. 들도 더는 왜냐고 따져 묻지 않는다.
“아침 먹자!”
“니들끼리 다녀온 거야?”
뫼는 자신도 깨우지 하는 말을 하려다 만다.
“일찍 일어났어. 숲이 먼 것도 아니고, 다녀 버릇해서 이젠 이골이 났잖아. 길도 뻥 뚫렸고. 이젠 무섭거나 겁나지 않아.”
저녁과 달리 밖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한다. 이든과 누리는 숲에 다녀올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있다. 게다가 햇살이 강하게 비춰든다.
이든과 누리가 숲에 갈 준비를 하고 나온다. 남자다움을 드러내려 누리가 주먹을 쥐어 보인다.
“조심해!”
숲으로 향하는 둘에게 뫼가 말한다.
“둘인데 뭘? 걱정 마! 괜찮을 거야.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올게.”
이든과 누리가 숲으로 사라질 때까지 넷은 숲에서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별일 없겠지?”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아미가 돌아서며 말한다. 들도 버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뫼는 그럴 거라는 생각 대신 숲에서 보았던 짐승이 떠오른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이글거리던 눈빛. 화면 속의 여자가 그를 붙잡지만 않았다면 이든과 누리를 따라나서고도 남을 마음이다. 하지만 숲이라는 불꽃은 사그러든 채 일렁이지 않는다. 그에겐 숲보다도 중요한 여자가 있다.
여자는 옷차림이 바뀌었다. 날씨가 변한 모양이다. 길 위에 쌓여있던 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자의 발걸음은 처음보다 훨씬 더 무거워 보인다. 왠지 쓰러지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는 듯하다.
뫼는 집안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뒤진다. 새로운 뭔가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쌀쌀 뒤져도 새로운 것은 나오지 않는다.
화면 앞으로 가 앉는다. 이상하다. 여자가 보이지 않는다. 잠깐 집안을 살폈을 뿐인데 여자는 온 데 간 데 없다. 산길만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나타난다.
‘왜지? 여자는 어디로 사라진 거지? 아픈 걸까? 그래서 집에서 나오지 않은 걸까?’
아무리 왜냐고 물어도 7987년 전의 세상은 대꾸가 없다. 마우스를 이리저리 굴리고 누른다. 그래도 여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하다. 다른 화면을 불러와 누른다. 새로운 화면이 열린다. 하지만 글자들만 빼곡할 뿐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멍하니 화면만 바라본다. 암만 바라봐야 소용이 없다. 읽어낼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어디선가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꿈에서 밤새 들려왔던 그 소리다. 누굴까? 만 년의 사람이라고 읊어댄 그 여자일지도 모른다.
만 년의 사람. 그들은 바로 자신들이다.
뫼는 다시 이전의 창을 화면에 띄운다. 놀라 나자빠질 일이다. 산이 없어졌다. 위 두어 줄을 빼고는 온통 하얀 화면뿐이다. 소리가 날 때마다 백지 화면에 글자가 뜬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정신없이 단추를 누른다. 들이 허겁지겁 달려온다.
“뫼! 왜?”
들이 들어서자마자 묻는다. 걱정이 잔뜩 묻어있다. 하지만 뫼는 들의 걱정 따윈 아랑곳이 없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얼어붙어 있다.
“뫼! 왜 그래?”
들이 다시 한 번 다급하게 묻는다. 하지만 뫼는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들이 뫼 옆으로 바짝 다가온다.
“들! 들! 이, 이, 거”
뫼는 알아듣지도 못 할 말을 겨우 뱉어낸다. 그뿐이다. 다시 입이 열리지 않는다. 가슴만 쿵쿵 뛰고 있다.
“이게 뭐야?”
들이 화면으로 고개를 박으며 묻는다. 그녀의 눈에도 화면이 이상하다.
“여자야!”
뫼의 입이 마법에서 풀린 듯 말이 툭 튀어나온다.
“뭐가?”
“우리를 이곳으로 보낸 사람, 바로 그, 여자라고.”
“여자가 어떻게? 그리고 이건 뭐야?”
“여자가 쓰고 있는 거야. 잠결에도 들렸어. 잠결에 여자가 끊임없이 만 년의 사람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어. 이걸 두드리는 소리도 들렸어. 한데 그땐 그러려니 했어. 아침에 일어나서 기억을 되살려본 후에야 여자가 중얼거린 만 년의 사람이 우리들이라는 것을 알았어. 하지만 그땐 알쏭달쏭했어. 그래도 이상하긴 했어. 그래서 서둘러 너를 찾았던 거야. 한데 넌 대답이 없었어. 그래서 난 니가 어떻게 된 줄 알았어.”
뫼가 아침의 일을 대충 추려 말한다. 들은 아직도 무슨 말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
들이 눈만 멀뚱거린다.
“여잔 만 년의 사람을 그리고 있어.”
뫼가 애가 달아서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한다. 하지만 들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눈빛이다.
“아직도 모르겠어? 잠결에 들렸던, 두드리는 소리가 지금 그대로 들리고 있어. 여자가 이걸 두드려 그리고 있는 사람, 바로 우리라고. 여잔 우리를 그리고 있어. 내 느낌인데, 우린 여자의 상상 속에 갇혀 이 만 년으로 왔나봐. 그리고 지금은 여자가 그리는 대로 살고 있고. 우린 앞으로도 여자가 그리는 대로 살 거야.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설마? 여자가 왜?”
여전히 알쏭달쏭함은 풀리지 않는다. 뭐라 딱 잘라 말할 수도 없다. 그냥 얼 띤 눈빛으로 뫼를 바라보기만 한다.
“거기까진 나도 모르겠어. 아직은 나도 느낌뿐이야. 확실한 건 나도 몰라.”
뫼가 들의 눈길을 의식하며 말한다.
“그럼, 우린 7987년 동안 잠을 잔 게 아니었어?”
어렴풋이 뫼의 말이 이해가 된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7987은 상상속의 시간이야. 여자의 상상으로 건너 뛴 시간.”
“맙소사. 한데 그게 상상으로 가능해? 상상으로 사람을 만들어내는 게 가능하냐고?”
“그건 나도 확실히는 몰라. 하지만 상상일지라도 어떤 법칙은 따랐을 거야.”
“어떤 법칙?”
“그건 나도 모르지. 2013년의 사람들이 찾아낸 법칙인지, 아니면 자연의 법칙인지. 그건 나도 몰라. 그냥 느낌일 뿐이야.”
“느낌으로 그런 걸 알 수도 있어?”
“그게 말로는 설명이 어려워. 나도 느낌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건 없어.”
“니 느낌대로라면?”
들이 뜸을 들인다. 말을 하기 전에 여자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단단하지도 대단해보이지도 않는다. 그냥 세상과 겉도는 모습만 약하게 떠 있을 뿐이다.
“뭔데?”
“다름이 아니라, 그 여자, 너무 평범해.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가 않아.”
“그 여자가 아니라 그 여자의 상상력이 대단한 거겠지.”
“상상력이 대단하다고? 상상력이 뭐기에.”
“상상으로 못 하는 건 없어. 현실에서 할 수 없는 것도 상상으로 아주 가뿐하게 해낼 수가 있어.”
“상상 속에선 그렇지. 한데 우린 상상 속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야. 현실을 살아내고 있다고. 봐! 니 앞에 내가 있고 내 앞에 니가 있어. 만지면 잡히기도 해.”
“알아. 니 말이 맞아. 상상만으로 안 돼. 현실이 뒷받침을 해주지 않으면 상상은 현실이 될 수 없어.”
“그러니까 니 말은? 현실이 뒷받침을 해주고 있다는 거지? 그게 법칙이라는 거지?”
“맞아.”
“어렵다. 말로는 깨끗하게 설명이 되는데 손에 쥔 건 하나도 없어. 여전히 모르는 거 투성이야.”
들이 한숨을 길게 내쉰다. 갑자기 막막해진다. 숨통이 조여 오는 것도 같다. 2013년을 살고 있는 여자의 머릿속에서 자신들의 삶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걸 믿고 싶지 않다. 한데 왠지 뫼의 느낌이 틀리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다가온다. 그걸 뒤엎을 만한 생각이 다가오지 않는다. 그게 더 한숨짓게 한다.
“만약 그렇다면 말이야, 뫼?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말과 생각들도 그 여자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상상이겠지?”
“아마도.”
“그럼 그게 화면에 그대로 써지고 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