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노인 기준 연령을 75세로 상향 조정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284

운명을 향한 더딘 걸음마.


BY 한이안 2015-04-20

하늘이 보인다. 구름 한 점 없다. 태양이 혼자 세상을 감싸고 있다. 태양의 품에서 모든 게 다 살아있음을 뽐내고 있다. 그녀도 뽐내고 싶다. 사람의 마음이 참 묘하다. 변덕스러운데 그게 싫지가 않다. 바로 전까지 마음을 다 차지하고 있던 생각이 빠져나갔음에도 썰렁하지가 않다. 외려 그득한 느낌이다. 뫼가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누리와 이든, 아미와 버들이 이웃으로 와준 게 벅차게 기쁜 일이라 여겨진다. 들은 모두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 웃으니까 좋아 보인다.”

뫼가 활짝 갠 마음으로 말한다. 누리와 이든도 고개를 끄덕인다. 들은 웃음으로 멋쩍음을 털어낸다.

우린? , 우린 안 보여?”

안 보이긴? 니들 웃는 모습으로 내 안이 죄 채워져 배부른데. ! 내 배, 산처럼 불룩 솟아있지 않아?”

뫼가 장난스럽게 말한다. 다들 뫼의 장난스러움에 깔깔 웃는다. 뫼도 웃는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는다. 좀 전에 한 말들이 머릿속으로 다시 밀려들어온다. ? 누가? 그도 속으론 아미가 그랬던 것처럼 그 말을 부르짖는다. 하지만 드러낼 수는 없다. 드러내면 모두가 거북해질 뿐이다.

배도 채웠는데 이제는 뭐하지? 그놈의 시간을 잊을 수 있는 거, 뭐 없을까? 웃는 거 말고.”

뫼가 누리의 눈치를 살피며 묻는다.

쿡쿡 찌르는 것도 빼고.”

아미도 누리를 겨냥하여 말한다.

그럼 죽을상 하고 파고들어! 차라리 빨리 끝장을 내라! 그래야 더는 그놈의 것에 매달리지 않지.”

누리가 어깃장을 놓는다.

어깃장 놓지 말고.”

어깃장 아니야. 니들 벌써 돌아가고 있잖아. 그놈의 시간, 7987년을 잊을 수 없다는 거잖아.”

누리가 정곡을 찌르고 들어온다. 뫼가 움찔한다.

미안. 그 놈이 이미 내 몸속에 콱 박혀버렸나 봐.”

그러니까 나 맘 쓰지 말고 빨리 끝장을 내라고.”

미안하다고?”

뫼가 누리의 눈치를 살피며 거듭 용서를 구한다.

-찮다니까.”

누리가 살짝 소리를 높인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어. 마땅히 할 것도 없잖아. 누리 말대로 우리 마음이 방금 전의 상태로 되돌아왔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럴 바엔 차라리 그 놈의 우스꽝스러운 궁금증들부터 죄 풀어내자!”

내 잠자코 있던 들이 끼어들어 차분하게 상황을 일깨운다. 뫼도 마음이 움직인다. 누리도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매번 이런 일이 되풀이 된다면 밀어내는 것보단 맞서는 게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럼, 화면 앞으로!”

뫼가 구호를 외치듯 큰 소리로 말한다. 뫼의 말에 다들 우르르 화면 앞으로 몰려간다.

7987년 전만 해도 2013년의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한데 지금은 2013년에서 7987년을 건너뛴 만 년이다. 여섯 말고 다른 사람은 없다. 뒤늦게 깨어날 누군가를 셈에 넣는다고 해도 많을 거 같지가 않다. 누가? ? 어떻게? 그걸 알아내겠다는 마음으로 여섯이 똘똘 뭉친다. 화면 앞에서 눈빛들이 다들 초롱초롱하다.

들이 단추를 눌러 화면을 이리저리 바꾼다. 화면이 바뀔 때마다 눈동자가 커진다. 하지만 이내 시들해진다. 벌써 같은 움직임만 여러 번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아무도 말을 못한다. 다들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될 거 같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뫼가 벼르다가 말문을 연다. 서로 말을 피하다보니 괜히 어색함만 떠돌 뿐이다.

모두의 시선이 뫼에게 쏠린다. 묘안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자 뫼의 마음이 버거워진다. 그래도 말을 꺼낸 장본인이다. 뭔가 기대에 걸맞은 말을 해야 한다. 그는 시선을 받아내며 뜸을 들인다. 머릿속으론 생각을 굴리고 굴린다. 아무리 굴려도 없던 묘안이 떠오를 리 없다.

내게도 방법은 없어. 다만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자는 거지.”

뫼가 솔직히 안을 드러내 보인다. 뫼의 말에 이번엔 다들 실망하는 눈빛이 되어 흩어져 간다.

방법을 찾아내야 해. 어차피 지금은 어둠속에서 바늘 찾기야. 더듬어보는 수밖에 없어. 그렇다고 손 놓고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수는 없잖아. 끝장을 보기로 했으면 이쯤은 각오를 해야지.”
뫼가 힘주어 말한다. 흩어져가는 생각을 되돌려야 한다. 그러려면 각자의 생각 속으로 달아나는 것부터 막아야 한다. 모두를 하나의 생각으로 엮어야 한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

이든이 시선을 뫼에게 돌리며 말한다. 뫼의 말이 백 번 와 닿는다. 뫼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읽어낸다.

뫼의 말이 맞아. 우린 방법을 찾아야 해. 이대로 우리의 삶을 시작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물론 이대로 시작한다고 해도 나쁠 건 없어.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왜, 누구에 의해 여기로 보내졌는지, 우리의 가족은 없었던 건지, 그런 것들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야 뒤늦게 후회하거나 궁금증이 불쑥불쑥 찾아드는 일을 겪지 않을 수가 있어. 그게 여기에서 우리들끼리 살더라도 우리를 지켜줄 힘이 돼줄 거라 믿어.”

이든은 모두를 둘러본다. 뫼가 미소를 짓고 그를 바라보고 있다. 고맙다는 뜻인 모양이다. 나머지도 눈빛이 살아나고 있다.

그럼, 집안부터 샅샅이 살펴보자! 실마리가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건성으로가 아니라 샅샅이 찾아야 해. 내 생각에 이정도의 집이면 보통수준은 넘는다고 생각돼. 그러니 7987년 동안의 자료가 어딘가 반드시 있을 거야. 그것을 찾아낼 실마리라도 있는지 찾아보자고.”

억지로 끼었다가 잔뜩 실망한 누리가 활기를 띤 목소리로 말한다. 뫼는 그런 누리가 고맙다. 맘에 들지 않음에도 토 달지 않고 따라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기 그지없다. 다들 누리의 말에 공감하는 눈치다.

그럼 지금부터 움직이자! 구석구석 샅샅이 훑어보는 거야.”

다들 흩어져 집안을 샅샅이 뒤진다. 열어보고 더듬어보고 만져보고 하느라 움직임은 더디다. 하지만 누구도 투덜거리지 않는다.

아미가 상자 안에서 뭔가를 꺼낸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살핀다. 그게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리 와서 이것 좀 볼래?”

아미가 꺼낸 것을 들고 이리저리 살피며 모두를 부른다. 아미의 말에 다들 그녀에게로 몰려든다.

그게 뭐야?”

다들 한목소리로 묻는다. 아미나 마찬가지로 그들도 모르긴 마찬가지다.

모르겠어. 뭐처럼 보여?”

아미가 물건을 모두에게 내밀며 되묻는다. 다들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리 줘봐! 어디에서 찾아냈어?”

뫼가 아미에게서 물건을 받아 이리저리 돌려보며 묻는다.
여기. 여기 이 안에서.”
아미가 천정을 가리킨다. 그런 다음 뚜껑을 열어 보인다. 뚜껑이 열리자 움푹 들어간 공간이 보인다. 뫼가 물건을 안에 다시 집어넣어본다. 물건이 쏙 들어간다. 미끄러지거나 흘러내리지 않는다.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꺼내서 다시 찬찬히 살핀다.

화면하고 관련이 있는 거 같아. 여기도 죄 단추들이 가득하잖아. 화면을 움직일 때 썼던 단추가 여기에도 있어.”

뫼가 물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나직하게 말한다.
그럼 한 번 눌러봐!”

그래볼까?”

뫼가 단추를 꾹꾹 누른다.

화면이 움직여.”

다들 흥분하여 들뜬 목소리로 외친다. 뫼도 마찬가지다.

이번엔 화면에 없는 단추를 눌러볼게. 눈 크게 뜨고 잘 봐!”

뫼는 맨 위에 있는 단추를 누른다. 그랬더니 화면에 있던 것들이 싹 사라진다. 다시 한 번 누른다. 이번엔 화면이 되살아난다.

이건 화면을 끄고 켜는 단추야.”

어떤 건데?”

맨 위에 있는 이거.”

뫼는 단추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여준다.

이번엔 다른 걸 눌러봐!”

뫼는 다른 단추도 눌러본다. 그렇게 단추를 하나하나 눌러서 기능을 확인해나간다. 어떤 것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도 있다. 그래도 얻은 게 있어서인지 못마땅하지는 않다.

우리 여기서 모두 모여 이렇게 할 게 아니라, 각자의 집으로 가서 이걸 꺼내 확인해보자! 아직도 우리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우리들 자신과 관련해서는 알아낸 게 하나도 없어. 어쩜 이게 우리를 도와줄지 몰라. 이것만 제대로 다 알아내도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내기가 쉬울 수도 있어.”

뫼가 모두를 둘러본다. 밀어내지 말라는 눈빛이다. 기본적인 기능은 어느 정도 알아냈으니 다른 복잡한 기능들을 찾아내는 것도 어렵지만은 않을 거 같다. 그걸 혼자보다는 여럿이 하면 더 빨리 찾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뫼는 다들 그의 그런 마음을 읽어주길 바란다.

그래. 뫼의 말대로 해보자! 집들이 모두 같으니 이것도 하나씩은 있을 거 아냐.”

누리가 뫼의 말을 받아 말한다. 그도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 누리가 몸을 휙 돌리더니 잽싸게 먼저 빠져나간다. 나머지도 서둘러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다들 돌아가고 나서 뫼는 다시 화면을 바라보고 앉는다. 꼭 찾아내고 말리라고 마음을 다진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의 마음이 그 생각에서 놓여나지를 못하고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던 마음이다. 오늘 시작된 마음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미의 궁금증이 줄줄이 엮여 나오면서부터다. 그렇다고 그 이전엔 아무렇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어렴풋하게나마 간간이 스쳐지나갔다. 말 그대로 그 생각에 얽매인 적이 없을 뿐이다. 한데 지금은 꽁꽁 얽매여 빠져나갈 수가 없다.

그는 다시 물건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핀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이름부터 알아내자. 이름이 있어야 해. 들처럼, 이든처럼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있어야 해.’

그는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행여 이름이 기억날지도 모를 일이다. 2013년에서 함께 건너왔다. 2013년까지 얼마를 살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살았다면 그것을 사용한 적이 있을 터였다. 그랬다면 불렀을 이름도 있을 게 틀림없다. 뫼는 그것부터 알아내려 머리를 쥐어짠다. 하지만 다가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물건만이 덩그러니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름을 지어야 하나? 뭐라고 짓지? 누르면 화면이 바뀌니까 그것과 어울리는 이름이어야 할 텐데.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일단은 생각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자. 그럼 이제부터 하나하나 짚어나가 볼까?’

그는 이미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눌러봤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하나씩 누르는 건 더 해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번에 하나씩이 아니라 두 개를 동시에 눌러보기로 한다. 끄고 켜는 단추를 빼고 그는 차례로 단추를 두 개씩 눌러볼 생각이다.

그때 천정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