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후의 하루하루는 그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그러던 중 예전에 면접을 봐 두었던 한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중장비 기계를 만드는 회사였는데 중소기업치고는 규모가 컸다. 혜란은 다음날 당장 출근했지만 가장 자신 없던 컴퓨터 업무를 맡게 된 데다 사무실 여직원들 사이의 알력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나흘 만에 그만둬 버렸다. 번듯한 사무직을 걷어찼다는 이유로 혜란의 처지는 더 위태로워졌다. 혜란은 아침저녁으로 들어야 하는 부모님의 타박을 견디다 못해 생산직이든 어디든 아무 데나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K제과에서 생산직 사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다. 혜란은 자신만만하게 이력서를 들고 면접을 보러 갔다. 면접관은 하얀 가운을 입은 공장장이었다. 그는 혜란의 서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S여상을 나온 사람이 왜 여기를 지원하는 거지? 이 정도 조건이면 다른 자리도 많을 텐데?”
혜란은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다른 데는 문턱이 너무 높아 실패했다고 말했다.
“생산직이, 여기저기 다 찔러 보고 실패한 사람들이나 오는 덴줄 아나 본데, 잘못 생각한 것 같군.”
“네?”
“다음!”
혜란은 무참하게 옆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혜란은 그런 데쯤은 눈 감고도 붙을 자신이 있었다. 자기가 누군가, 바로 N은행까지 지원했던 사람이 아닌가. 공장장은 그런 자만으로 가득 찬 혜란을 정확하게 알아보았고, 오래 일하긴 글렀다는 듯 보기 좋게 탈락시킨 것이었다. 혜란은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합격한 사람들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돌아가라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혜란은 그곳을 뛰쳐나왔다.
그 일 이후 혜란은 눈만 뜨면 무조건 집에서 나왔다. 공장에서까지 떨어졌다는 이유로 부모님은 거의 혜란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늘 함께 있어 주던 정아가 할머니 병시중으로 꼼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돼 버린 것이었다.
“집 앞에서 넘어졌는데 하필 전에 한 번 골절된 데가 또 탈이 났어. 노인네라 뼈 아물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아.”
정아는 전화기 너머로 허탈하게 웃었다. 정아도 정아지만 혜란은 더 난감했다. 혼자 청승맞게 티파니에 죽치고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집에 일찍 들어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이었다.
혜란은 무작정 걸었다. 3월이라지만 추위는 여전했고 바람도 많이 불었다. 걷다가 지치면 서점이나 백화점 같은 데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주머니에 돈도 없이 그것도 혼자서, 마음 편히 머물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쇼윈도에 비친 혜란의 모습은 너무 처량하고 불쌍했다. 졸업만 하면 멋지게 독립할 줄 알았는데, 비굴하게 부모님 신세를 져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한심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은 그 상황이 도대체 언제 끝날지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아무 데나 돌아다니는 것이 지겨워지자 혜란은 추억 순례라도 하듯 전에 한 번이라도 가 봤던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G대 주변, S여상까지의 등하굣길, 정우오빠와 함께 걸었던 길, 소정이가 살았던 집, 수연이의 자취방이 있던 골목길, 잠깐 다니다 말았던 직물 공장까지, 그야말로 추억이 많든 적든 거리가 멀든 가깝든 가리지 않고 구석구석 훑었다.
한번은 봉제 공장 차례가 되었다. 혜란은 멀찍이 떨어져서 봉제 공장을 바라보았다. 파란색 대문은 칠이 좀 벗겨졌을 뿐 예전 그대로 활짝 열려 있었다. 매일 그 문을 통해 출퇴근하던 때가 그리웠다. 머리에 붙은 실올을 떼 낼 틈도 없이 허겁지겁 야학으로 달려 나가던 수연이도 보고 싶었다. 당시에는 지긋지긋했지만 그나마 거기에 다닐 때가 심리적으로는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혜란의 어깨를 툭 쳤다.
“너, 혜란이 아니니?”
깜짝 놀라 돌아보니 뜻밖에도 동수엄마였다. 동수엄마는 외근 나갔다 막 돌아오는 참이라며 혜란의 손을 덥석 잡더니 다짜고짜 공장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사무실은 아직 시집을 안 간 싸가지 경리가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동수엄마는 경리에게 커피를 부탁하고는, 혜란의 근황을 물었다. 혜란은 졸업은 했고, 현재 발령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놀고 있다 이 말이네?”
“네.”
“마 잘됐네! 낼부터 여기 와서 일 좀 해라. 요새 일손이 딸려서 죽을 지경이다.”
화끈한 동수엄마 덕분에 혜란은 졸지에 취직이 돼 버렸다. 혜란은 좀 어리둥절했지만 이제 정처 없이 떠돌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내심 기뻤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응은 냉담하고 잔인했다.
“뭐어? 봉제 공장? 잘났다! 겨우 거기나 갈려고 여태 고르고 골랐던 거니?”
“기껏 공순이나 될 거, 뭐 하러 기를 쓰고 학교는 다녔냐?”
“차라리 복학도 안 하고 공장이나 계속 다녔으면 벌써 미싱사라도 돼 있을 건데, 이제 다시 시다를 시작해 갖고 어느 세월에 돈을 번단 말이냐, 응?”
“꼴에 장학금까지 받기에 저년은 뭔가 좀 다를 줄 알았더니 별 거 없네.”
주거니 받거니 장단 맞춰 자신을 씹어 대는 부모님한테 혜란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내가 왜 아무 데나 취직을 한 건데요? 놀고먹는다고 눈치를 준 사람들이 누군데요? 가만히 발령이나 기다리게 해 줬냐고요? 나는 뭐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요?”
꾹꾹 눌러 참았던 분노와 서러움이 밀려와 혜란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가만 안 놔뒀으면 우리가 언제 등이라도 떠다밀었단 말이냐?”
“아이고 마, 정신 시끄럽다. 울려면 나가서 울어라. 뭘 잘했다고 울고 지랄이고?”
혜란은 두말없이 밖으로 나왔다. 생각해 보니 자신도 부모님과 다를 게 없었다. 자기 입으로 ‘아무 데나’ 취직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다음날 아침 혜란은 다시 예전처럼 도시락을 챙겨 들고 7시 50분에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