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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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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학


BY 하윤 2013-06-06

적금 만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혜란은 잘하면 겨울방학이 끝나기 전에 귀 수술을 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만기일이 며칠 지날 때까지도 부모님은 아무런 말이 없었던 것이다. 하루 이틀 눈치만 보던 혜란은 밤을 깎다가 엄마한테 슬쩍 물어보았다.

“적금 찾으러 안 가요?”

“뭔 소리야? 그거 깨서 방세 준 지가 언젠데.......”

“예? 그럼 내 수술은요?”

“당장 길바닥에 나앉을 판인데 그깟 귀가 대수냐?”

엄마의 태도가 어찌나 당당한지 혜란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러니까 적금은 만기가 되기도 전에 이미 방세로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당사자인 자신은 까맣게 모른 채. 혜란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자 엄마는 그걸로 얘기가 끝났다고 여겼는지 벽시계를 보며 말했다.

“벌써 시간이 저렇게 됐네? 나가서 점심이나 차려 와라.”

너무 기가 막혀 혜란의 눈에선 굵은 눈물만 뚝뚝 떨어졌다. 엄마가 발끈했다.

“왜? 누가 죽었니?”

혜란은 들고 있던 칼과 밤을 던져 놓고 밖으로 나왔다. 엄마는 곧장 작은방으로 쫓아와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뭐가 문젠데? 뭐가 잘못됐는데? 그래, 네 돈으로 방세 좀 낸 게 그게 그리 배가 아프냐? 넌 어디 남의 식구니? 이집 식구 아니야? 혼자서 방 한 칸을 다 쓰는 주제에 어디서 유세를 떨고 지랄이야?”

혜란은 귀를 틀어막았다. 미쳐서 돌아 버린다는 게 바로 이런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다른 때 같으면 말대꾸라도 했을 혜란이 하염없이 눈물만 쏟고 있자 엄마도 더는 쏘아붙이지 못하고 방을 나갔다. 혜란은 저녁이 될 때까지 작은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겨울이라 노가다 일감이 뚝 떨어져 하릴없이 술이나 먹으러 다니는 아버지가 돌아왔다.

“혜란이는?”

“왕이라도 낳는지 방구석에 처박혀서 나올 생각을 안 하네요.”

“왜? 뭔 일 있었어?”

“난데없이 적금 타령을 하며 저 지랄을 떨고 있어요.”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엄마가 저녁 밥상을 들여가며 소리쳤다.

“너, 진짜로 밥 안 처먹을 거야?”

기다렸다는 듯 혜란의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침 먹은 것 말고는 여태 빈속이어서 현기증까지 일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 밥을 먹으러 나가서 천하에 밸도 없는 아이가 될 수는 없었다. 엄마는 두 번 묻지 않았다. 큰방에서 딸그락거리며 숟가락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혜란은 적어도 아버지가 방문을 열어 보고 자기한테 해명 한 마디쯤 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엄마와 다를 게 없었다. 잔인하리만치 무심한 부모님의 태도에 혜란은 거듭 절망했다. 혜란은 울음소리를 들키기 싫어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밤이 깊어가면서 사방은 조용해졌다. 부모님은 평소처럼 9시 뉴스가 끝나기도 전에 잠자리에 들었다. 혜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 더더욱 분명해졌다. 아무리 억울하고 분한 감정에 치를 떨어도 누구 하나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는 사실은 너무나 허망하고 쓸쓸했다. 결국 안 죽고 살아남으려면 혜란 스스로 자신을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혜란은 사건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하나하나 따져 보기로 했다.

열 달마다 한 번씩 내야 하는 사글세 방값이 자기 집의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사안이라는 데는 혜란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방 기한이 끝날 때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르듯 그 시기를 넘겨 온 게 어디 한두 번인가. 그 달 그 달 살아내기도 빠듯한 형편에 방세를 미리 모아 두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항상 닥치고 나서야 부모님은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니거나 금고에 빚을 내서 급한 불을 끄곤 했다. 그러면 또 그걸 갚아 나가야 하니까 다음을 대비하는 일 같은 건 더더욱 꿈도 못 꾸었다. 그런 차에 이번에는 적금 넣던 게 있었으니 방세부터 치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귀 수술이야 뭐 조금 미룬다고 당장 죽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혜란은 억지로라도 부모님 입장에서 이해를 해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백번을 양보해도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게 있었다. 그 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단 한 마디의 상의도 없었다는 점, 그건 정말 생각할수록 치가 떨리고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이로써 부모님이 자신을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된 것만이 그나마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그렇다면 혜란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이 집을 떠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아무리 심사숙고해도 졸업하기 전까지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부모님한테 빌붙어 살아야 했다. 혜란은 비참한 무력감을 느꼈다.

그날 새벽, 운동 나갈 시간에 혜란은 어두컴컴한 부엌에 서서 밥과 김치를 정신없이 입안으로 쓸어 넣고 있었다. 얼음처럼 차고 딱딱한 밥알을 우적우적 씹으면서, 그 어떤 분노도 증오도 배신감도 허기를 이길 순 없다는 것을 혜란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까지 부모님한테 얻어먹은 밥값은 그깟 백만 원 갖고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 밥값 치른 셈 치자, 혜란은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기로 했다. 순간, 부모님과 자신 사이에 간당간당 연결돼 있던 가느다란 실 하나마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혜란은 운동을 계속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마음 같아선 다 때려치우고 방안에만 처박혀 있다 그대로 죽어 버리거나 폐인이 되고 싶었다. 그것만이 가장 빠르고 손쉬운 복수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혜란은 이를 악물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에어로빅은 혜란에게 유일한 희망이 돼 주었다. 그것만 성공해도 이번 방학이 아주 헛되지는 않게 되고 상처 받은 마음도 위로가 될 것 같았다. 혜란은 매일 아침 붉은 해를 보며 그런 현명한 결정을 내린 스스로를 칭찬했다. 집을 나서기 전에 움츠러드는 건 여전했지만, 맑고 차가운 공기를 흠뻑 들이키며 몸을 흔들다 보면 죽어 있던 자신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 기운으로 절망적인 하루하루를 이겨낼 수 있었다.

드디어 운동 시작한 지 꼭 한 달이 되었다. 혜란은 체중을 재 보기로 했다. 할머니가 보약이다 뭐다 너무 해 먹이는 게 괴롭다며 가끔 전화로 푸념을 했던 정아는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해야 한다며, 혜란이 싫다는데도 부득부득 목욕탕엘 따라왔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도 목욕을 함께 하는 건 아니다 싶은데, 정아가 너무 거침없이 밀어붙이니까 혜란으로선 져 줄 수밖에 없었다.

정아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옷을 훌렁훌렁 벗더니 체중계 위로 폴짝 올라갔다. 계기판을 가릴 생각도 안 했다.

“어? 나 좀 빠졌어. 이키로.”

“진짜? 좋겠다.”

혜란은 정아를 저만치 쫓아 보낸 다음 조심조심 체중계에 몸을 실었다. 운동도 안 하고 방학 내내 챙겨 먹기만 했다는 정아가 저 정도 빠졌으니 자신은 더 빠졌으리란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혜란은 오히려 2킬로그램이 불어 있었다. 혜란은 그 자리에서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인데 정아는 눈치도 없이 얼마나 빠졌냐고 자꾸만 다그쳤다. 혜란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지는 걸 보고서야 정아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근데 막상 정아가 입을 다물어 버리니까 그게 또 눈에 거슬렸다.

혜란은 씻는 둥 마는 둥 대충 물만 끼얹고 목욕탕을 나왔다. 정아는 자기 집에 놀러 가자는 둥 어디 가서 뭐라도 먹자는 둥 혜란의 기분을 맞춰 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혜란은 모조리 묵살했다. 결국 정아도 더는 참기가 힘들었는지 그럼 잘 가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혜란은 무시하고 그냥 걸었다.

“혜란아!”

정아가 다급하게 혜란을 불렀다. 혜란은 대답 대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힘내. 운동을 처음 시작하면 당장 효과가 나타나진 않는대.......”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혜란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다시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정아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귀찮아했으면서 정아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혜란은 마음이 휑했다. 괜히 애꿎은 정아한테 화풀이를 한 게 미안했다.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누가 뭐라 해도 이번에 운동만큼은 최선을 다했는데, 보기 좋게 배신당한 꼴이라니. 그 충격은 부모님한테 배신당한 것보다 더 처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