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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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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퇴 후


BY 하윤 2013-05-30

3월이 되자 수연이는 야학에 입학했다.

잠깐 일하다 그만둔 한 아이한테서 야학에 관한 정보를 전해 듣던 날부터 입학하던 날까지 수연이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혜란에게도 그 소식은 반가운 것이었다. 수연이는 방을 얻은 다음부터 매일 혜란이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처음 퇴근 후에 잠깐 들르는 걸로 시작한 것이 나중에는 주말이면 아예 거기서 자고 월요일에 바로 출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도 야단이 났지만 돈 낭비 시간 낭비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고 외로워하는 수연이를 모른 척하는 것도 쉽지 않아 혜란은 속만 끓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야학 소식을 듣게 되었으니 혜란으로서도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었다.

혜란은 한 시간 일찍 퇴근해서 입학식을 보러 갔다. 한 종교 단체가 운영한다는 그 학교는 중고교 각 2년 과정에 선생은 자원 봉사 대학생들이라고 했다. 허름한 상가 건물 2층에 자리 잡은 초라한 학교였지만 학생들의 표정은 진지하고 의욕이 넘쳤다. 혜란은 잔뜩 겁먹은 눈으로 S여상에 첫발을 디뎠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딱 일 년 전의 일인데, 과연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득한 기억이 돼 버렸다.

“나, 검정고시 봐서 고등학교도 가고 대학도 갈 거야!”

수연이는 선생들이 나누어 준 교재를 가방에 챙겨 넣으며 씩씩하게 말했다. 혜란은 섣부르게 동조하기보다는 그냥 웃어 주었다. 그리고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수연이에게 김밥과 라면을 사 주었다. 혜란은 밥 잘 챙겨 먹고 다니란 말을 하려다 그냥 삼켰다. 쉽지 않은 일임을 뻔히 알면서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당사자보다 더 걱정이 많은 혜란과 달리 수연이는 벌써 박사라도 딴 양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수연이의 하루 일과는 빠듯했다.

오후 6시에 총알같이 튀어 나가 곧장 버스를 타야 겨우 7시 수업 시간에 댈 수 있었다. 원래 퇴근은 7시지만 동수엄마는 순순히 수연이의 퇴근 시간을 조정해 주었다. 동수엄마는 가불 사건 이후로 수연이와 붙어 봤자 좋을 게 없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수업이 밤 10시에 끝나면 수연이는 차비를 아끼려고 집까지 걸어왔다. 하루 두 끼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상황에서 그런 강행군을 계속하다 보니 부작용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수연이는 아침마다 잠이 덜 깬 상태로 출근했고 일하는 내내 헛손질을 하기 일쑤였으며 틈만 나면 꾸벅꾸벅 졸았다. 동수엄마와 공장 사람들의 시선이 갈수록 따가워졌으나 정작 수연이는 눈치를 못 채는 듯했다. 어쩌면 알고는 있어도 거기에 대처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보다 못해 혜란이 한 마디 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그러다 공부는커녕 몸만 상하겠다.”

“혜란아, 나 요즘 행복해. 진짜 살아 있는 것 같아. 이런 기적이 내게도 올 줄은 정말 몰랐어.......”

수연이는 몽롱한 표정으로 동문서답을 했다. 그러고 보니 수연이는 정말 피곤에 찌든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표정만은 꿀단지에라도 빠진 듯 행복해 보였다. 그럼 그걸로 된 게 아닐까. 배가 고파 수업에 집중을 못한다든지, 피곤해서 직장 일에 소홀해진다든지 하는 건, 어쩜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었다. 수연이는 지금 자신이 어딘가에 소속돼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것이고, 그걸로 야학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혜란은 수연이가 될 수 있으면 욕을 덜 먹도록 옆에서 도와주면서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수연이는 꼬박꼬박 야학에 나갔다. 몸이 안 좋으면 한 번쯤 빼먹을 만도 한데 하루도 쉬지 않고 나갔다. 혜란은 그런 수연이를 처음에 과소평가했던 걸 반성했다. 그런데 야학이 쉬는 토요일에도 수연이는 쌩하니 퇴근하기 바빴다. 혜란은 자신의 존재가 어느새 수연이의 마음에서 밀려난 것 같아 섭섭했다. 수연이 방에서 라면 끓여 먹고 낄낄대며 놀던 일들이 새삼 그리웠다.

 

그런 어느 날, 집 근처니까 잠깐 나오라는 수연이의 전화가 걸려 왔다.

수연이가 야학에 다닌 지 한 달하고도 보름쯤 지난 어느 일요일이었다. 휴일 오후의 나른함을 이기지 못해 축 늘어져 있던 혜란은 단숨에 달려 나갔다. 그런데 수연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떤 남자와 손을 잡고 서 있었다. 혜란이 가까이 가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수연이는 냉큼 손을 잡아끌었다.

“괜찮아. 우리 야학 선생님이야. 오빠, 인사해요. 내 친구 혜란이에요.”

피부가 하얀 그 남자는 고개를 까딱했다. 혜란도 얼떨결에 꾸벅 인사를 했다. 야학 선생이라는 말에 경계는 일단 풀었지만 그래도 찜찜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수연이가 아무리 붙임성이 좋다 해도 야학 선생을 오빠라고 부르며 손까지 잡을 수는 없는 법이다.

“맞아. 지금 저 오빠랑 사귀고 있어.”

가까운 분식집에 자리를 잡고 남자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에 수연이는 선선히 실토했다.

“네가 봐도 멋있지? 우리 학교에서 인기 최고야. 입학하고 한 이틀 지났을 땐가, 하루는 저 오빠가 나한테 슬며시 쪽지를 주는 거야. 수업 끝나고 만나자고. 책만 펴면 조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 죽겠다나. 그때부터 오빠가 수업 끝나면 맨날 밥도 사 주고 집에까지 데려다 주고 그랬어.......”

그러니까 수연이가 야학에 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곧 남자가 돌아왔다. 수연이는 남자 옆에 찰싹 달라붙어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한데 그 모습이 꽤 낯익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수연이가 한창 혜란 자신에게 열중했을 때의 바로 그 모습이었다. 혜란은 살짝 배신감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웃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수연이는 남자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한 채 혜란에게 손을 흔들었다. 남자와 영화를 본 다음 저녁은 집에 가서 먹을 예정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수연이와 놀 생각으로 엄마한테 늦을 거라는 말까지 미리 하고 뛰쳐나왔다가, 달랑 떡볶이만 얻어먹고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가게 된 혜란은 기분이 팍 상했다.

수연이한테 농락당한 것 같은 느낌, 대학생과 사귈 만큼 수완이 좋은 수연이에 대한 질투와 부러움, 공부한다고 큰소리치더니 고작 남자한테나 빠져 버렸나 싶은 실망감, 그런 것들이 마구 뒤섞여 혜란은 심사가 어지러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비중이 큰 것은 단연 부러움이었다. 과연 얼마나 오래 갈까 싶으면서도 연애에 빠진 수연이가 부러웠던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던 지금 현재 사랑하고 행복하면 되는 것 아닌가.

고지식한 혜란이 그런 말랑말랑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백퍼센트 정우오빠 때문이었다. 정우오빠와 단 하루만 사귈 수 있어도 혜란은 자신의 인생을 몽땅 저당 잡힐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부터 자기 안에 그런 야무지고 도발적인 각오가 자리를 잡았는지는 혜란도 알 수 없었다.

 

정우오빠의 재수 소식 이후 소정이의 편지는 혜란에게 더 각별해졌다.

소정이는 정우오빠의 근황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바로 답장을 보내는 혜란에 비해 소정이는 일주일이나 보름씩 늦어지기가 예사였다. 혜란은 어쩐지 소정이가 억지로 편지를 쓰는 것 같아 자존심은 상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단 한 줄이라도 정우오빠의 소식을 얻어들으려면 소정이의 편지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또 한 가지, 공장에 다니는 혜란에게 있어 소정이는 밝고 환한 세상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소정이 같은 친구와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혜란은 자신의 위상이 높아지는 듯 마음이 뿌듯했다. 자신은 결코 시시하지 않으며 언젠가는 소정이와 비슷한 삶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가질 수 있었다.

소정이가 들려주는 영화나 책의 줄거리를 음미하다 보면 비참한 현실을 잊고 낭만적인 기분에 사로잡힐 수 있어 좋았다. 지금 오드리 헵번이 직접 부른 ‘문 리버’를 듣고 있어, 라는 말로 편지의 서두를 시작할 때면 혜란 자신도 참 고상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늘 정우오빠가 깔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