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이럴 수가!”
”맙소사,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딘가에 내동댕이쳐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웅성웅성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 소리들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수향은 일어나서 웅성거리는 무리 속으로
끼어들어갔다.
‘맙소사, 이럴 수가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도 다른 영들처럼 벌어져 닫힐 줄을 몰랐다.
“네 놀라셨을 겁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모두 영계와 육계를 완전히 분리된 다른
공간으로 생각하셨을 겁니다. 게다가 두 세계는 까마득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거라고 알고 있었을 테고요. 그러나 그 두 세계는 여러분이 지금 눈으로 확인하고
있듯이 완전히 별개의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지도, 까마득하게 떨어져 있지도
않습니다.”
푸른 제복을 입은 안내자 영이 무리지어 서있는 영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안내자
영이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영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놀라고 있었다.
수향도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여러분은 지금 영의 눈과 육의 눈으로 두 세계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셨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두 세계는 공존하고 있습니다. 두 세계의 눈을
가지고 보면 그것은 확실히 그렇습니다. 자 보셨으면, 이제 모두 저를
따라오십시오!”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영들의 무리가 그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수향도 그들의 무리에 섞여 따라갔다.
‘다행이야. 남편을 매일 같이 볼 수 있어서. 여기서 내가 말을 걸어준다면 심심하지
않을 지도 몰라.’
수향은 뜻밖의 이 횡재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세상이 근사하게
여겨졌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영들의 얼굴에도 그러한 표정이 떠다녔다.
그들은 넓은 홀로 안내되었다. 거기엔 또 다른 제복을 입은 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 이거. 오늘 이곳으로 들어온 영들의 명단이네."
인수인계인 모양이었다.
수향을 비롯한 영들의 시선이 모두 그들에게로 향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오늘도 많지는 않군.”
“육계에 머무는 시간이 많이 길어졌잖나. 의학이 발달해서 수명을 연장시켰으니
어쩔 수 없지.” “허긴 그래. 수고했네.”
그들의 대화는 짧게 끝이 났다. 대화가 끝나자 영들의 무리 속에서 웅성웅성하는
잡음이 다시 일었다.
“자 다들 이쪽으로 오십시오! 여러분 모두를 환영합니다. 여러분들은 오늘부터
이 영계의 가족이 되셨습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저 제복 입은 영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표정만이 흐를 뿐이었다.
“이곳에서 여러분들은 영계에 입문하기 위한 적응교육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먼저 여러분들의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지금 질문하십시오.
최대한 성의껏 대답을 해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교육자 영은 영들의 무리를 눈으로 훑고 있었다.
수향은 뭘 물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멍하니 다른 영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다들 서로의 표정을 살피느라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교육자 영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한참 만에 누군가 한 영이 손을 번쩍 들었다.
“무엇이든 괜찮습니까?”
“예.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그러면 물어보겠습니다. 적응교육은 오래 받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오른쪽을 보십시오. 영들의 모습이 보이지요?
모두들 무언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배우고 있는 영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지요.
예, 여기에서는 아무도 배우지 않습니다. 물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적응교육이 끝나면 여러분들도 저곳에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저들이 하는 것을 여러분들도 하면서 살게 될 겁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이 겪게 될지도 모르는 서먹함을 없애도록 최소한의 부분만
도와 줄 것입니다. 그게 이곳에서 해야 할 우리들의 임무이니까요.
그 나머지는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집에는 자유롭게 다녀올 수 있나요?
후손을 돌보는 것도 우리들의 몫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수향은 두 귀를 쫑긋 세웠다. 수향 역시 알고 싶었다.
“안타깝지만 그건 안 됩니다. 저기가 아니라 바로 여기가 여러분들의 세계입니다.
여러분들은 곧 그걸 받아들이게 될 겁니다.”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행여 미련을 가질까봐 그런 싹은 애초부터 잘라내겠다는
그런 마음이 담겨 있었다.
“가족들은 볼 수 있겠지요? 지금처럼요.”
“그것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직접 경험하십시오.”
“가족들을 볼 수 없다는 말인가요?”
“글쎄요.”
그가 얼버무리자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둘러보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말은 더 하지 않았다.
수향은 숨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남편을 만날 수 없다면 새로운 세계는 자신에게
의미가 없는 삶의 저장고에 지나지 않는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남편은요? 나는 그를 다시 만나야 합니다.”
그녀가 다급하게 손을 들고 물었다. 교육자 영은 그녀에게 묵묵부답의 시선만을
보낼 뿐이었다.
“아니, 전 그를 다시 만날 거예요. 난 그를 다시 만나야 해요.”
그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숨통이 조여드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전 그를 다시 만날 겁니다. 그를 만날 수 없다면 전 저기로 가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영들의 세계를 손으로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왜죠?”
“……” 그가 난감을 표정을 지었다.
“왜 안 되죠?”
“이곳의 룰이니까요. 이 말밖에는 해줄 말이 없습니다. 유감입니다. 더는 고집부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의 말투는 단호함에서 약간의 애원조로 바뀌어 있었다.
“난 그를 만나야 돼! 난 그를 만날 거야. 룰 따위로 방해받을 수는 없어!”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를 교육자 영이 힐끗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에 뭔가 불안한 기색이 잠시 스치듯 지나갔다.
그는 영들의 무리를 둘러보았다.
“다른 질문이 없으면 저를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그가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들도 따라 웅성거리며 움직였다.
교육자 영을 따라 들어간 곳은 사방이 투명벽으로 된 방이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벽 가까이로 가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투명벽 너머에는 영과 육의 세계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수향도 유리벽 너머로 펼쳐진 두 개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 가득했던 생각들은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자 창밖을 보십시오. 영과 육의 세계가 넓게 펼쳐져 보이지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영과 육의 세계는 여러분의 눈에 보이듯 서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긴밀하게 서로 작용하면서 말이죠.
그렇다고 서로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대혼란이 생기겠죠.
그것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서로 넘나드는 것만은 제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곳에 온 이상 육의 세계로 나갈 수는 없습니다. ···
이제 여러분들에게 초록색 안경을 하나씩 나눠주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영들의 손에는 안경이 하나씩 주어졌다.
“한 번 써 보시길 바랍니다.”
안경을 쓰자 영의 세계는 사라지고 육의 세계가 확대되어 나타났다.
“육의 세계만이 보이죠? 지금까지 여러분이 살았던 세계입니다.
여러분의 가족들이 남아서 여전히 살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죠.
그리고 언젠가 여러분이 다시 돌아갈 세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전세이면서 내세가 될 세계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가족들을 찾아서 당겨보세요.
안경 오른쪽에 있는 스위치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수향은 두리번거렸다. 수많은 낯선 건물과 사람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헤맴 끝에 겨우 자신의 집을 찾았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시신이 장례식장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서둘러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도 낯선 사람들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 주변을 더듬기 시작했다. 멀리 가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자신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해 납골당에 와 있는 가족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보였다.
남편이 제사상 앞에서 술을 따라 올린 후 절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스위치를 조절하여 남편을 가까이로 끌어왔다.
절을 하고 일어서는 남편의 얼굴이 추위와 술기운으로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남편을 만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투명벽에 막혀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도 끌어와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모두들 지친 모습이었다. 수향은 나지막하게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족들을 볼 수 있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영들 모두가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수향도 코끝이 찡해 옴을 느꼈다.
그리고 다른 영들과 마찬가지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특히나 추위와 술기운으로 발갛게 상기된 남편의 모습을 봤을 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남편은 그녀에게 늘 변함없는 산이었다. 때론 그게 그녀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간혹 그녀가 원망어린 투정이라도 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다 그런 그의
믿음직스러움 때문이었다.
60년이 넘는 세월을 그렇게 자신의 옆을 든든하게 지켜준 남편이었다.
그런 남편이 슬픔에 푹 젖은 채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 이제 안경을 벗으십시오.”
아무도 안경을 벗지 않았다.
“안경을 벗어주시기 바랍니다.”
교육자 영이 거듭 말하자 영들은 훌쩍거리면서도 하나 둘 안경을 벗기 시작했다.
안경은 영들의 손에서 빠져나가 교육자 영의 뒤로 가서 차곡차곡 쌓였다.
“이번엔 푸른색 안경을 나눠주겠습니다.”
이번에는 푸른색 안경이 하나씩 주어졌다. 영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안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쓰라는 지시가 떨어지기도 전에 안경을 귀에 걸고들 있었다.
“영의 세계가 보이나요?”
“예, 영의 세계가 보입니다.”
훌쩍거림은 어느 정도 잦아든 목소리로 영들이 대답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살아갈 세계입니다. 물론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언젠가 다시 육의 세계로 나갈 거니까요. 자세히 보십시오.
이번에도 스위치를 이용하여 조절할 수 있습니다.
게임을 하고 있는 영이 보이지요?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영, 책을 읽고 있는 영,
꽃을 가꾸는 영, 악기를 연주하는 영, 노래를 부르는 영, 빈둥빈둥 놀고 있는 영 등등
다양한 일을 하고 있는 수많은 영들이 보이지요?
이제 여러분들도 이런 일들 중의 어떤 것을 하면서 살아가게 될 겁니다.
하지만 어떤 영에게도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운명이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그것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노력에 따라 여러분의 운명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 운명을 가지고 여러분은 다음 세상에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운명을 만드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부디 좋은 운명을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교육자 영이 설명하는 동안 모두들 묵묵히 듣고 있었다.
장난을 치는 영도, 딴 짓을 하는 영도 없었다. 모두들 진지했다.
“그 운명을 가지고 다음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한 영이 묻자 다들 그게 궁금하다는 듯, 그러니까 어서 설명을 해달라고 재촉하듯
교육자 영을 바라보았다.
“아 그건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한 부모를 만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부자 부모를 만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노래를 잘 하는 부모를 만나기도 하죠.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 하는 것은 이곳에서 여러분이 선택하여 산 삶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 예-.”
영들이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수향도 교육자 영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대부분 수긍이 간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면 다음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겠네요?”
안경을 쓴 빼빼 마른 영이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예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건 좀 다른 문제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말하는 운명이란 다음 세상의 삶을 통째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여기에서 운명은 다음 세상에서의 삶의 조건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환경이나 재능 같은 거라고 보시면 타당하리라 봅니다. ···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졌다고 완벽한 삶을 사는 건 아니죠.
조건을 활용하는 노력이 없다면 타고난 것과 다른 삶을 살 수도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다음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주어진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사람들한테만 운명은 완성되니까요.
그러니까 순수한 운명이라는 것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도 운명을 만들어 가야죠, 완성을 위해서.”
“예, 이제 알겠습니다. 운명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군요.
여기서도 다음 세상에서도.”
“그렇다고 봐야죠. 다른 게 있다면 여기에서는 모두의 시작이 다 같다는 것이고,
다음 세상은 여기에서 만든 것을 기반으로 시작한다는 정도겠죠?
여기에서는 여러분 모두에게 똑같은 환경과 똑같은 조건이 주어질 겁니다.
다시 말하면 모두에게 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건 지금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한다 해도 여러분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알고 싶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우린 지금 육의 세계에서 익힌 방식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말씀을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미안합니다. 난 여러분에게 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약속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이상의 질문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약속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요?”
“그렇게 생각해도 됩니다.”
그는 한 발 물러난 듯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교육자 영은 그의 시선을 피해 얼른 다른 영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집요함이 계속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다행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모두들 진지하게 그 둘의 대화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똑같은 환경과 조건에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이 맘에 드는
모양이었다. 수향도 그건 맘에 들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둘의 대화가 처음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면 그냥 그러려니 했겠지만
그녀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듯해서 괜히 불안했다.
그가 너무 쉽게 물러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영들도 잔뜩 호기심이 동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녀는 묻고 싶었다. 하지만 뭘 어떻게 물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미적미적하며 그게 뭔지 생각해내려고 애를 썼다.
교육자 영은 그런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애쓰지 말아요. 괜히 기운만 뺄 뿐입니다.’
그는 그 여자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눈길은 그 여자에게 멈춰 있으면서도 입에서는 늘 하던 말이 기계적으로
흘러 나왔다.
“다른 질문이 없으면 이제 저를 따라오십시오!”
마지막 관문이었다. 더 이상의 질문은 잘라야 했다. 그 관문만 무사히 통과한다면
그들은 지금 했던 생각과 질문을 깡그리 잊을 것이었다.
이제 더는 질문을 받지 않겠습니다. 영들에게 교육자 영의 말은 그렇게 들렸다.
그들은 그의 단호함에 눌려 묻고 싶은 수많은 궁금증을 억누르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그런 표정을 거슬러 질문을 한다고 해도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다들 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 맘에 들기는 하지만,
그것이 뭔지 몰라서 불안한 모양이었다. 수향도 그랬다.
남편의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남편의 표정에서 육의 세계를 벗어나 아내인 자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을 읽은 듯도 했다. 그 생각을 하자 불안감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가슴도 두근거렸다.
'그 약속은 어찌되는 걸까?'
수향은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시작이 남편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대신하게 된다면,
그래서 남편을 잊게 된다면, 미지의 세계가 아무리 찬란한 삶을 보장해준다고 해도
그것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향은 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난 그를 만나야 해! 이곳에서 기다리겠다고 약속을 했어. 그것을 지켜야 돼.
명심하자. 어떤 상황에서도 그 기억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그녀는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자 여기가 마지막 관문입니다.
움직이지 말고 잠깐 서서 제 말을 마저 들어주십시오.”
교육자 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들이 서있는 자리가 층층으로 만들어졌다.
그러자 키 큰 영들에 에워싸여 보이지 않던 교육자 영의 모습이 그녀에게도 보였다.
“여기 이곳이 영계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안개가 많이 끼어있지만 여러분이 영계로 들어가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겁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뱉어보세요.”
영들이 그의 말에 따라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예 그냥 그렇게 숨을 쉬면 됩니다. ······.”
교육자 영의 말은 계속됐지만 수향에겐 들리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기억을 놓치면 안 돼!’
수향은 자신의 생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계속 되뇌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주변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자 이제 안개 속으로 발을 디뎌보십시오.”
영들의 무리가 안개 속으로 밀려갔다.
수향도 무리에 떠밀려 안개 속으로 움직였다.
무리에 떠밀려가면서도 그녀는 남편에게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이상했다. 분명히 무리가 함께 움직였는데 안개 속에 들어서자 홀로 있는 거 같았다.
왠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팔을 휘저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겁이 났다.
그녀의 기억에 한 번도 겁이 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거 같았다.
남편이 옆에 있을 때는 그런 기분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남편을 떠올렸다. 그의 모습이 가물가물 멀어졌다.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더니 기억 밑바닥에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휴-'
“휴, 어딨어? 무서워?”
“휴, 어디 있어-? 무섭다구요?”
“휴, 휴, 휴-?”
“기다릴게-.”
“휴, 숨을 쉴 수가 없어. 이 꾸물거리는 것들 때문에 숨이 쉬어지지가 않아-.”
수향은 캑캑거렸다. 안개가 걷히는 게 보였다.
목에 걸린 이물질이 빠져나왔는지 목이 편안해졌다.
이내 눈꺼풀이 내리더니 눈앞에 베일이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