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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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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그리고 이별


BY 권희정 2010-11-17

내인생을 조금은 행복하게 또 조금은 폼나게 살고 싶었는데, 어릴적 사춘기를 맞으면서 갑자기 기울어진 가세로 일찍감치 대학을 포기 했다. 남보다 욕심 많고 사치많았던 나는 돈을 벌기 위한 일이라면 어떤일도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던중 친구가 쉽고 돈도 많이 벌수 있다고 나를 유혹했다.

호기심반 유혹 반으로 가본 곳은 강남의 고급 룸싸롱 이었다.

소위 귀공자들만이 모인다는 그야말로 으리으리했다.첫날 사장 언니의 부름으로 어느 좌석에 이끌려 갔는데

그곳은 생전 처음 보는 그런 호화스러운 방이었다. 한50~60명은 족히 앉을만큼 그런 큰 좌석에 겨우3명이 앉아있었다.

그들과의 첫만남도 어색 했고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일행중 한명이 나를 지목했고, 사장언니는 연실 뭐가그리도 고마운지 고맙다고 계속 머리를 조아렸다.

그날 그렇게 좌석이 끝나고 나를 지목했던 그가 사장언니에게 뭐라뭐라 하더니 가방을 들고 대기한 차에 오르라했다.

그러면서 내미는 수표에 난 내눈을 의심했다.

잠깐의 갈등은 있었지만, 싫었다.돈은 좋았지만 그돈에 내순결을 그것도 술집에서 처음본 남자와는 내자존심이 허락치않았다.정말 미련없이 거절하고 사장언니의 포악함을 뒤로하고 돌아왔다.

그리곤 그곳도 잊었다. 돈도 좋았지만 왠지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별천지 같은 세계였다.

하는일 없이 그렇게 집에서 빈둥거리면서 신세 타령에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친구들은 대학에 들어가서 미팅이니 뭐니 즐겁게 살고 난 바보가 된듯한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부모만을 원망하고 있던

그쯤 친한 친구가 자기 학교에 놀러오라고 했다. 대학교 캠퍼스 구경도 할겸 가고 싶었다.

모처럼 맘 먹고 이쁘게 꾸미고 마치 대학생이 된듯한 착각으로 책도 몇권 들고 신촌에 있는 친구학교를 찾았다.

정말 좋았다. 다 이뻐 보이고 멋져 보였다. 그순간 난 결심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너희처럼 대학생이 될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친구와 학교 정문을 나서는데 왠 차가 갑자기 내앞에 멈추어 날 보며 손짓하고 있었다.

난 순간 숨이 멈출뻔 했다. 하루 잠시 좌석을 같이 했던 남자였지만 술집에서 만났다는게 친구에게 알려질까 두려웠다.

그런데 어느새  차에서 내려 내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반갑다며 차를 한잔 하자고

정말 공손하게 제의했다.한참을 망설이며 넋이 나가 있는데 어느틈에 친구는 내손을 잡고 그남자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래 가보자, 설마 그날 싸롱 이야길하려고 , 내심 불안 했지만 우린 벌써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차를 마시면서도 난 불안해서 한마디도 할수가 없었다. 혹 이제나 저제나 그곳 얘기가 나올까 두려웠지만 다행으로 차만 마시고 돌아설때까지는 별탈은 없었다.

친구는 돌아 오는 버스안에서 그남자가 너무 멋있다고 어떻게 알았냐고 연실 떠들면서 감탄했고 난 그저 묵묵히 듣기만했다. 그와의 인연이 그토록 길고 내남은 지금의 인생까지도  망치게 될줄은 감히 어느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그후 몇달이 지나고 올해는 꼭 대학에 가야지 돈 없으면 좀 후진대가서 장학금 받고  아르바이트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도서관으로 매일 도시락 두개를 가지고 마지막 버스 몇분전까지 필사적으로 매달리면서 공부를 했다.

82년 그러니까 내나이 20살 되던 무더운 여름 그날밤 마지막 버스 놓칠새라 죽을 힘을 다해서 뛰고있는데 왠 검은차가

내앞에 섰다.<야  타 데려다 줄께>스치듯 돌아 보았는데 그 귀공자였다. 

어 아저씨 우리집 데려다 주시게요, 먼데요.

그렇게 그와의 인연이 시작 되었다. 그날은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별 얘기는 없었지만 재수하냐고 내가 대학생이 아닌줄은  처음부터 알았다고, 기분이 상했다. 부끄럽고 죄진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지만, 그래도 난 또박또박 말했다 공부 잘하는데 돈없어서 포기 한거라고  올해는 장학금 받고 간다고 ,

더이상은 말하고 싶지않았다.  내려 달라고 말하고 입을 닫아버렸다.

괜히 화가 났다. 젊은 놈이 그 좋은차도 돈 많은 부모 만나  편히 사는 그자체도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렇게 인사도 없이 내려서 가버렸건만 그다음날도 그는 나를 만났던 동대문 시립 도서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까지만 데려다 준다는 그의제의를 거절 했음에도 그다음날도 그다음날도 또 그자리 몇일을 계속 기다렸다.

난 도대체 몇일을 그렇게 기다리는 그를 이해 할수 없었지만 , 그날은 왠지 불쌍해 보이기까지 해서 그의차에 올랐다.

설마 날 어디로 납치하진 않을까 겁나고 무서웠지만 ,그는 그저 공부 열심히 하라며 오빠처럼 힘들고 어려울때

상의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표정없이 얘기하고 있었다.

난 그날밤 온통 그의 생각으로 사로 잡혔다. 좋은 사람을 괜히 이상한쪽으로 매도한 것 같아 미안 하기까지 했다.

그가 적어준 전화 번호로 몇일뒤 전화를 했다. 너무도 반가워 하며 좋아하는 그의 목소리에 왠지 나도 기분이 좋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급 레스토랑이란 곳에서 식사를했다. 차문도 열어주고 식사중 내내 시중도 들어주고 마치 공주가 된듯 잠시 착각에 빠지기도했다.

그렇게 들떠있는 나에게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대학가는 등록금을 대주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잘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얼마나 돈이 많으면  거절할리 만무였다.난 대학 가는게 최대에 목표이고 꿈이었으니까

열심히하겠노라고 대답하고 공주처럼 모시는 그의 차를 타고 돌아왔다.

83년 봄 난 내가 원하는 대학은 아니었지만 대학에 들어가서 이쁜 여대생이 되었다.

그를 만나면서 난 모든게 최고급으로 마음은 점점 사치스러워지고 공분 뒷전이었다.

그도 그저 동생이라 여기는지 단 한번도 함께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말만 하면 뭐든 되었다. 돈으로 해결 할수있는 일이면... 난 점점 뻔뻔 해져갔다.

혼자 살수있는 아파트를 원했다. 가난한 집도 싫었고 엄마는 도대체 돈이 어디서 나길래 그 좋은 옷이며 신발이며 사냐고 매일 닥달을 했고 난 그저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말로 모든것을  감추려 했다.

혼자 살고 싶었다. 집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그는 내뜻대로 반포에 17평 아파트를 구해주었다. 정말 이제야 내 세상이 된듯 사는것이 즐거웠다.

그렇게 호화스레 2년을 살았다.그러나 그는 정말 날 여자로 보지 않았다.신기하리만큼 남자의 구실을 할 수없는 걸까

혼자 온갖 상상을 하다가 어느날 내가 물었다,오빤 정말 내가 여자로 안보이냐고 ,정말 내가 동생이냐고

우린 남자 여자라고 ,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넌 아직 애기야 ,그리고 여자아니야, 사실 그랬다.그때까지만 해도 나이트 클럽에 가면 꼭 신분증을 보여야만 했다.  마음은 어른이 다되었지만 ,

키만 삐죽 큰 나를  이쁘다는 그남자에게 난 뭐든 다하고 싶다고 했다. 뭐든 다하고 싶었다.

3학년이 되던 봄 골프를 배우고 왠 만한 사람 평생 만지지도 못하는800만원을 혹가하는 폭스를 걸치고 귀부인 처럼 나돌아 다녔다.

그런 나에게 오빤 한마디했다. 내가 화를 낼까 두려워 조심스레 그렇게 다니다가 남자들 따라오면 어쩌려고 오빠랑 함께가 아닌 외출은 삼가라고 학교만 잘 다니고 친구는 집으로 데려오라고, 그는 날 자기만의 여자로 꾸미고 있었다.

어찌 몰랐을까 너무도 철처했다. 그렇게 4년을 가꾸고 만들었다. 자기만의 스타일로 난 인형이었다.

졸업식장에서 그는 네게 프로포즈를 했다. 결혼하자고  그려려니 이토록 공 들이고 대학 까지 가르키고 당연한 답이었다.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나도 이미 그의 따스함과 자상함에 익숙해져버렸다.

아니 더 솔직히 하자면 내 마음대로인 그남자가 편했다. 나이가 9살 많은게 좀 그렇지만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독선이었다. 나만이 가질수있는 독선

그렇게 우린 약속 했다. 평생을 함께하기로 졸업 여행겸 언약여행을 떠났다.

속초로 겨울 바다도 보고 정말 행복했고 행복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히 오빠 친구를 만났다.날 처다보는 눈초리가 이상하리만큼 따가웠지만 난 개의치 않고 수다를 떨었다.오늘 우린 신혼 여행 예행 연습이라면서 즐거워했다.

하지만 묵묵히 날 보던 그눈빛은 한심한년 나쁜년 하고 욕을 하고 있었던것이다.

그날은 몰랐지만 그 사실을 알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박3일의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서는 그가 한동안 전화도 없었다. 그전에도 몇일에 한번 얼굴은 봐도 전화는 하루에도 몇번씩 했건만, 이상했다.한몸이 되었다고 그가 궁금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비서가 하는 말을 난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장인 회갑이라고 무슨말인지 몰랐다.

갑자기 망치로 머리를 맞은거 같았다. 오빠가 유부남 아니야 아닐꺼야 수화기를 놓고 저녁이 되어서  그가 오고 나서야

모든것이 사실임을 알았다. 여행을 갔을때를 제외하곤 오빤 단 한번도 외박을 한적이 없음을 알았다.

아무리 늦어도 아침식사는 온 식구들이 함께한다는 이유로 꼭 들어가곤 했다.난 부자들은 그러는줄 알았다.

조금도 의심 하지않았다. 의심을 같기에는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고  난 그런 기미 조차도 느끼지 못했다.

아니 그에게 무관심 이었다. 그저 내생활이 윤택해지고 가난이 싫어 나온 내집이 그나마 동생이 대학도 엄마가 살수있는 작은 연립 주택도 그렇게 생기니까 그저 그런것이 좋았던 것이다.

오빠는 그날 네게 말했다. 항상 웃고 내앞에서는 재롱마저 떨던 나이 많은 귀염둥이였는데,

25살에 결혼했다고, 어떻게 한것이 임신이되었고 알아주는 재벌들간의 정략이기에 시끄럽지 않게 결혼으로 이어졌다고,

난 웃었다. 아니 울었다. 소설 같은 얘기 집어치우라고 어디서 들은 얘기라고....

그런데 오빠는 울면서도 자기 사정을 계속 얘기하고 있었다. 결혼후에도 여전히 바람피우고 술마시고 했는데,

여행가서 자기 배를 못 봤냐고 못봤다. 부끄러워서 불을꺼 어두운데 어찌 보겠는가 배를 보여 주었다.

칼로 그은듯이 진한 흉이 있었다. 자기 아내가 바람 피운다고 , 소름이 끼쳤다. 무서웠다.

그런데 가여운생각에 갑자기 너무 불쌍해 보였다. 오빠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곧 이혼이 될거라고 소송중이라고

절대로 우린 안헤어진다고, 믿으라는 말을 수십번도 더했다.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난 이미 그를 믿고 있었다.

믿어야 했다. 난 이미 그의 여자가 되었는데, 답답했다. 내가어떻게 해야 하는지  남의 남자를 유부남을  하지만 난 그의말을 따르기로 했다.기다리자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흐를지는 모르지만 그의 말대로 기다리기로 했다.

한번 한다면 어떻게든 하고마는 내 성격이 화를 자초한 꼴이 되었다. 기다려 달라는 그의 말에 그 약속을 나에게 하고 그도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절대로 이혼은 안된다는  그의 아내에게 수 많은 위자료를 주고서라도 이혼 하려는 그의 피 눈물나는 노력을 보면서 난 연민으로 아니 사랑 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감싸고 있었다.

이제 매일 봐야한다. 하루도 안보면 보고싶어 미칠지경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를 더 힘들게 하고있었다. 그냥 보낼껄  어차피 내남자가 아닌 타인인것을 .....

그렇게 그와의 만남도 어느덧7년이 지났다. 88년 여름 그는 속옷바람으로 쇼파에 누워있었다.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고 들이닥친 여자들과 경찰관, 우린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져야했다.

간통 그렇다, 간통이지 남의 가정을 파괴하려한 가정 파괴범

그도 나도 부인 하지않았다. 7년을 만났다고 묻지도 않는 말을 그는 서슴치 않고했다.

난 무서웠지만 그를 믿고 담담하게 있었다. 참으로 뻔뻔한 여자였다.

용서를 빌지도 않았다.도대체 내가 무슨 죄인가하는 생각 마저도 가졌으니 난 지금 그죄를 받고 있는것이다.

오빤 죄 값으로 살고 나오면 자동 이혼이라며 유치장 안에서 온갖 포즈를 취하며, 입 모양을 보고 알았다.

유치장은 여자와 남자가 조금 떨어져 있었기에 대화 할수가 없었다.

이쪽에서 아무런 반응도 대응도 없이 오히려 잘된듯 포기하고 있는것을 알았는지 삼일만에 고소를 취하 해줬다.

삼일간 그곳의 생활이었지만  생각 하기조차도 싫었다. 집으로 돌아와 두문불출 몇일을 보냈다.

그렇게 나를 끔찍이 사랑 했던 그가 연락이 없었다.내가 목숨처럼 사랑하는 그가 연락이 되질 않았다.

도통 소식이 닿지 않았다.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비서도 상무님 부재중이라는 말만  반복 할뿐,찾아야 하는데 어디에도 없었다. 성북동 그의 집앞에도 가보았다. 불빛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듯 빈 집인듯 해보였다.

아들이 둘씩이나 있던 그에게 무엇을 기대 한것일까?

그래도 난 이성을 찾지 못했다. 미친듯이 그를 찾아 헤메고 있었다.

그가 자주 가던 술집도 가 보았다.없었다. 나를 버린거다.7년 세월을 그는 묻어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의  시간시간  그 소중했던 추억을 버리고 그는 그렇게 떠났다.

결국은 나를 버리고 본래의 위치로 자기 자리로 돌아간것이다. 그의 소식을 들은 그때는 이미 그는 인도네시아로 떠나고

 난 뒤였다. 가족과 함께 전부 가버린 것이다.

그는 그렇게 가버리고 그때부터 나는 외로움에 몸 부림을 치면서  방황이 시작 되었다.

혼자가 싫었다. 어딜 가도 그와 함께 일때는 공주였고 왕비였다.그러나 이젠 아니다. 천덕꾸러기가 되있었다.

밤이 싫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무서웠다.친구도 만나면 신랑 자랑에 난이제 친구도 싫었다. 다들 가정을 꾸미고 살고 있는지라 그렇게 방황 하는 나를 이해하지 않았다.

아니 용서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렇게 밤거리를 배회하고 울고 울고 또울어도 어디에도 그는 없었다.

스물의 나이에 그를 만나9년이 지나 버렸다. 그런 사람은 이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외로움에 몸부림을 치면서 2년을    보내고 이제 남은것이 없다. 방탕한 생활로 그가 나에게 해준 모든것이 바닥이나 버렸다.

호스트 클럽을 드나들며 써 버린돈 사채까지 얻어 집은 이미 경매되고 이제 내가 설곳도 갈곳도 없었다.

죽을수도 없었다.결국 어린 나이에 남들이 누릴수없던 부 때문에 내신세가 망가진것이다.

이제 남은것은 달랑 병들은 몸뚱아리 하나뿐, 결핵에 걸린것이다. 매일을 술로 살았으니 폐인이 된것이다.

그런 와중에 남편을 만났다.남편과의 만남이 91년3월이었을것이다.

돈도없이 매일 가는 포장마차에서 술에취해 바닥에 들어누워서 울고있는 나를 감싸안은 남자가 지금의 내  남편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스한 손길에 지쳐있던 내 힘겨운 생활을 정리하려고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기대고 싶었다. 그저 따스한 미소가 좋았고 나를 감싸줄 그런 사람으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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